시편 19:01-14 하늘과 말씀으로 말을 거시는 하나님 :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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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과 궁창, 낮과 밤이 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전한다고 노래합니다. 그 증언에는 언어도 소리도 없지만 온 땅 끝까지 이르고, 해는 신랑처럼 떠올라 하늘 끝에서 끝까지 달리며 그 열기를 피할 자가 없습니다(1-6절). 이어 시인은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고 눈을 밝게 하며, 순금보다 귀하고 송이꿀보다 달다고 고백합니다(7-11절). 마지막으로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숨은 허물과 고의의 죄를 보고,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여호와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을 드립니다(12-14절). 하늘에서 시작한 노래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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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까지 사흘 동안 읽은 시편 18편은 하나님이 다윗을 건지시고 그의 등불을 켜시며 싸우는 법을 가르치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노래는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순수하다는 고백(18:30)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 19편은 바로 그 완전한 말씀을 노래의 한가운데로 가져옵니다. 전쟁터의 왕이 이제는 말씀 앞에 선 주의 종으로 서는 것이고, 승리의 노래가 말씀의 노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뚜렷이 나뉩니다. 1-6절은 하늘과 해를 노래하며 하나님을 보편적인 이름인 엘로 한 번 부르고, 7-14절은 율법을 노래하며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일곱 번 부릅니다. 앞부분은 긴 호흡의 찬양이고 뒷부분은 짧고 단단한 지혜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두 편의 시를 이어 붙였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해가 모든 것을 비추듯 말씀이 숨은 것을 드러낸다는 빛의 그림이 두 부분을 하나로 꿰고 있습니다.
# 시편 19편은 창세기 1-3장을 시로 다시 부르는 노래라고도 합니다. 앞부분은 하늘과 궁창, 낮과 밤, 큰 광명을 지으신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뒷부분의 지혜롭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는 말은 에덴의 나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손을 뻗어 얻으려 했던 지혜와 밝은 눈을 하나님은 말씀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 신약에서 바울은 4절을 인용하여 복음이 온 땅에 퍼진 것을 노래합니다(롬 10:18). 하늘의 소리가 세상 끝까지 이르듯 하나님의 말씀도 막힘 없이 땅 끝까지 간다는 고백입니다. 또 이 시는 왕의 구원을 노래한 18편과 왕을 위해 기도하는 20-21편 사이에 놓여, 참된 왕은 칼보다 말씀을 사랑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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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말 없는 말
성부 하나님은 하늘을 통해 소리 없이 쉬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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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낮은 다음 낮에게, 밤은 다음 밤에게 이야기를 넘겨주며 하루도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증언에는 언어도 말씀도 들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리는 온 땅에 통하고 세상 끝까지 이르며, 시인의 눈은 하늘 한가운데 장막을 둔 해에게로 옮겨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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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은 하늘과 선포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 나타내다와 궁창이 서로 마주 보며 둥글게 감싸는 구조입니다. 선포한다는 말은 본래 수를 정확하게 센다는 뜻을 품은 낱말이어서,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로 잰 듯 또박또박 셈하여 들려준다는 그림이 됩니다. 두 동사 모두 지금도 이어지는 꼴이니 하늘의 증언은 한 번 하고 끝난 연설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낭독입니다. 2절의 말한다는 동사는 샘에서 물이 솟구쳐 쏟아진다는 뜻입니다. 낮과 밤은 마치 두 무리의 합창대처럼 번갈아 서서, 앞 사람이 받은 이야기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이어달리기를 합니다.
3절은 2절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듯한 역설입니다. 말한다고 해 놓고 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역설이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하늘의 증언은 사람의 귀에 들리는 낱말로 오지 않습니다. 4절의 소리로 옮긴 낱말은 본래 측량하는 줄을 뜻하기도 해서, 하늘의 증언이 온 땅을 줄로 재듯 빈틈없이 덮는다는 그림을 함께 품습니다. 이웃 나라의 신화에서는 하늘의 소리를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천둥으로 그렸지만, 시인은 그 침묵이 실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하다고 노래합니다. 다만 이 소리는 하나님을 아는 귀에 가장 또렷이 들립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뒤에 이어질 분명한 말씀을 기다립니다.
고대 세계는 하늘과 해와 별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시편 19편에서 하늘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영광을 받지 않고 지으신 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핑계할 수 없다고 말하고(롬 1:20), 이 4절을 들어 복음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고 노래합니다(롬 10:18). 하늘이 말 없이 시작한 이야기를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의 말로, 그리고 육신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하셨습니다. 말 없는 하늘의 증언은 말씀이신 그분을 향해 달려가는 서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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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들리지 않았던 것은 우리 귀가 다른 소리로 가득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며 이 하늘이 누구의 솜씨인지 소리 내어 고백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자녀와 함께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낮이 낮에게 넘겨준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십 분만 창밖을 보는 것으로도 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일터에서는 성실하게 제 몫을 다하는 손길 속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소리를 키워 세상을 이기려는 공동체가 아니라, 말 없는 하늘처럼 존재와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다음 사람에게 넘겨지기를 기도합니다. 주일 예배의 찬송이 월요일의 일터와 화요일의 부엌에서도 이어지는 이어달리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하루도 쉬지 않았듯 우리의 고백도 하루도 끊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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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절 신랑 같은 해
성자 하나님은 의로운 해처럼 떠올라 어둠 구석구석을 비추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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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하늘의 여러 피조물 가운데 해에게 시선을 모읍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해를 위한 장막을 베푸셨고, 해는 아침마다 그 장막에서 나옵니다. 그 모습은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환하고, 제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처럼 힘찹니다. 해는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쉬지 않고 운행하며, 그 열기에서 숨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의 운행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그대로 하루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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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는 세 가지 그림이 겹쳐 있습니다. 장막에서 나오는 해,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길을 달리는 용사입니다. 신방으로 옮긴 말은 혼인 때 신랑 신부 위에 드리우는 덮개를 가리킵니다. 혼례를 마치고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신랑의 얼굴처럼, 아침 해는 날마다 처음인 듯 기쁨으로 떠오릅니다. 세 그림을 하나로 묶는 낱말은 기쁨입니다. 해는 억지로 끌려 나오는 일꾼이 아니라 자기 길을 달리는 것이 즐거운 사람처럼 그려집니다. 그리고 1절의 하늘로 시작한 노래가 6절에서 다시 하늘로 닫히며 앞부분을 둥글게 마무리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해는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바벨론은 해를 정의와 심판의 신으로 섬겼고, 이집트는 해가 떠오르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해를 하나님이 쳐 주신 장막 안에서 지내는 피조물로 그립니다. 신을 섬기는 자리에 있던 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일꾼의 자리로 내려온 것입니다. 해가 궁전이 아니라 장막에 산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참된 영광은 해가 아니라 해에게 장막을 쳐 주신 분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6절의 열기로 옮긴 말은 뜨거운 볕과 함께 진노를 뜻하기도 하고, 끝이라는 말은 땅의 가장자리와 함께 생의 마지막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가 구석구석 비추듯 하나님의 공의로운 시선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친다는 울림을 남깁니다.
그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다는 말은 그대로 12절의 숨은 허물로 이어집니다. 해 아래 숨을 곳이 없듯 말씀의 빛 아래에서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빛은 드러내어 부끄럽게 하려는 빛이 아니라 고치려는 빛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라고 약속했습니다(말 4:2). 신랑처럼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신랑이라 부르셨고,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에 앉은 자들을 비추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해가 빛을 잃은 그 한낮에 그분은 우리가 피할 수 없었던 진노의 열기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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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해가 날마다 떠오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해가 기쁨으로 제 길을 달리듯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단 하루도 쉬지 않습니다. 오늘 내게 맡겨진 길을 억지로 끌려가는 짐이 아니라 기뻐 달리는 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아침마다 반복되는 집안일과 식탁 준비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닮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까지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해의 성실을 배우는 길입니다. 또 내 삶에 하나님의 빛이 닿지 않기를 바라는 그늘진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를 숨기지 말고 치료하는 빛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지역의 그늘진 곳까지 따뜻한 빛을 나르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의 방, 일자리를 찾는 이웃의 저녁에도 신랑처럼 오신 주님의 기쁨이 닿기를 기도합니다. 해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리듯, 우리의 섬김도 교회 담장 안에 머물지 않고 마을 끝까지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그 길이 지치는 짐이 아니라 기쁨의 달음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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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1절 꿀보다 단 말씀
성령 하나님은 완전한 말씀으로 지친 영혼을 소성시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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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노래는 하늘에서 율법으로 옮겨 갑니다. 여호와의 율법과 증거와 교훈과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와 법이 차례로 불려 나오고, 그것들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며 정결하고 진실하다고 고백됩니다. 말씀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합니다. 그 말씀은 순금보다 귀하고 송이꿀보다 달며, 주의 종은 그것으로 경고를 받고 지켜 큰 상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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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짜여 있습니다. 여섯 줄이 모두 여호와의 무엇은 어떠하여 사람에게 무엇을 한다는 같은 틀로 반복됩니다. 말씀의 이름이 여섯이고, 그 성품이 여섯이며, 그 열매가 넷에 영원과 의로움이 더해집니다. 앞부분에서 한 번 엘이라 불리던 하나님이 여기서는 언약의 이름 여호와로 거듭 불립니다. 하늘을 지으신 분과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같은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소성시킨다는 말은 돌이키다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먹여 기력을 되찾게 하는 장면에 쓰입니다. 말씀은 머리를 채우는 정보가 아니라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는 밥입니다.
이 단락의 낱말들은 해의 그림을 이어받습니다. 계명이 순결하다는 말은 아가서에서 해같이 맑다고 할 때 쓰인 말이고, 눈을 밝게 한다는 말에는 빛이라는 낱말이 들어 있습니다. 해가 땅을 비추듯 말씀이 영혼의 눈을 밝힙니다. 또한 지혜롭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 보기에 탐스럽다는 표현은 에덴의 선악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지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라는 양식을 먹는 사람은 참된 지혜를 얻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9절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를 말씀의 이름 가운데 넣은 것도 뜻깊습니다. 참된 경외는 사람의 감정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오래 마주할 때 빚어지는 열매입니다.
10절은 이 모든 고백을 금과 꿀이라는 두 그림으로 모읍니다. 금은 가장 값진 것이고 꿀은 가장 단 것입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간절히 바라고 탐낸다는 뜻이어서, 에덴에서 사람이 탐냈던 그 자리에 이제 말씀이 놓입니다. 11절의 경고를 받는다는 말은 빛을 받아 깨닫는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말씀은 우리를 묶는 줄이 아니라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4:4).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셔서, 돌판에 쓴 법을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판에 쓴 편지가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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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씀을 의무처럼 읽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씀이 꿀보다 달다고 말합니다. 단맛은 억지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머금을 때 느껴집니다. 오늘 하루 한 구절을 정해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 세 번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식탁에서 오늘 읽은 말씀 한 줄을 서로 나누며, 그 말씀이 어떤 맛이었는지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판단이 흔들리는 순간마다 말씀이 눈을 밝게 하는 빛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날일수록 말씀은 영혼을 일으키는 밥입니다. 밥을 거르면 몸이 먼저 알듯, 말씀을 거른 날은 마음이 먼저 압니다. 우리교회가 매일성경으로 매일 같은 말씀을 먹는 공동체로서, 서로의 영혼이 소성되는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단맛을 먼저 본 사람이 아직 그 맛을 모르는 이웃에게 한 숟가락을 건네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교회보다 말씀을 맛있게 먹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단맛이 우리의 말투와 얼굴에서 먼저 묻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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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마음의 묵상
삼위 하나님은 숨은 허물까지 씻으시고 우리 묵상을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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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빛 앞에 선 시인은 이제 자기 자신을 봅니다. 누가 자기 허물을 다 깨달을 수 있느냐고 물으며,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어 고의로 짓는 죄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막아 달라고 구하고, 그리하면 큰 죄과에서 벗어나 온전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여호와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열납되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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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의 허물은 길을 잘못 들어 모르고 짓는 죄를 가리키고, 13절의 고의로 짓는 죄는 알면서도 교만하게 짓는 죄를 가리킵니다. 율법은 그릇 범한 죄와 짐짓 범한 죄를 구분했고, 짐짓 범한 죄를 훨씬 무겁게 다루었습니다. 시인은 그 둘을 나란히 놓고 두 가지 모두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장한다는 말은 창조 때 해가 낮을 다스린다고 할 때 쓰인 말입니다. 해가 낮을 다스리듯 죄가 내 삶을 다스리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정직하다는 말은 7절의 완전하다와 같은 뿌리여서, 말씀이 완전하듯 그 말씀을 받은 사람도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피하려는 큰 죄과는 단순한 실수를 넘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근본적인 반역을 가리킵니다. 에덴의 첫 사람들이 지은 바로 그 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힘을 믿지 않고 14절에서 하나님을 두 이름으로 부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터를 주시는 분이고, 구속자는 종이 된 친족의 빚을 갚고 되찾아 오는 가까운 친척입니다. 하늘에서 시작한 이 시는 사람의 마음에서 끝납니다. 하늘이 말 없이 하나님을 노래하듯, 시인은 자기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그 합창의 한 소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열납이라는 말은 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제사의 말이니, 그는 짐승이 아니라 자기의 말과 생각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응답되었습니다. 우리의 숨은 허물을 다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저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속자는 친족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자기 피로 우리의 빚을 갚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셔서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합니다(롬 12:1). 오늘 우리의 묵상은 이 반석 위에서, 이 구속자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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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내 허물은 잘 보지 못합니다. 말씀을 읽는 시간은 그 숨은 허물을 비추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하루를 마치며 내가 한 말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리기 부끄러운 말이 무엇이었는지 조용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 숨은 허물이 아니었는지 살피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알면서도 눈감아 온 작은 타협이 나를 다스리기 전에 끊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입술의 첫마디를 시편 19편 14절의 기도로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서로의 허물을 들추는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반석이신 주님 앞에 서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제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회의 자리에서 오가는 말과 소그룹에서 나누는 말이 모두 주님께 드리는 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숨은 허물을 들킨 사람이 숨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품이 우리교회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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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하늘을 지으시고 날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낮이 낮에게, 밤이 밤에게
주님의 이야기를 넘겨주는 그 소리를
저희가 너무 오래 듣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분주한 귀를 닫고 고요한 마음을 열어
하늘이 전하는 영광을 듣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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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처럼 오신 의로운 해 예수님,
저희 삶의 그늘진 구석까지
치료하는 빛으로 비추어 주옵소서.
주님의 빛을 피해 숨으려던 자리에서
도리어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시고
날마다 기쁨으로 저희 길을 달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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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마음에 새기시는 성령님,
지친 영혼을 소성시키시는 말씀을
꿀보다 달게 맛보게 하옵소서.
순금보다 귀한 그 말씀을 사모하여
우둔한 저희가 지혜로워지고
흐린 눈이 밝아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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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저희가 알지 못하는 숨은 허물을 씻어 주시고
알면서 짓는 죄가 저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