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6:01-10 구원자보다 먼저 오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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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의 노래가 남긴 사십 년의 평온이 지나자 이스라엘 자손은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하나님은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십니다(1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기니 백성은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숨고, 파종만 하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메뚜기 떼 같이 올라와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않습니다(2-5절). 궁핍함이 심하여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이번에는 구원자가 아니라 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6-8절). 그 선지자는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일과 그 땅을 주신 은혜를 상기시키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고 책망합니다(9-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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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리는 드보라의 노래가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라는 한 줄로 닫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평온이 깨지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사사기를 여기까지 읽어 온 이에게 이제 익숙해진 순환이 있습니다. 배교하고, 압제를 받고, 부르짖고, 구원자가 일어나고, 땅이 안식합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드온 이야기에서 이 익숙한 순환에 낯선 일이 하나 끼어듭니다. 부르짖음 다음에 당연히 와야 할 구원자의 자리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한 선지자가 대신 서 있습니다.
# 사사기 6장부터 9장까지는 이 책에서 가장 긴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가 네 장에 걸쳐 이어집니다. 오늘 읽는 1절부터 10절까지는 그 긴 이야기로 들어가는 현관과 같은 자리입니다. 아직 기드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왜 필요했는지, 이스라엘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먼저 밝혀 둡니다. 이 현관을 건너뛰고 곧장 삼백 명 이야기로 달려가면, 뒤에 오는 승리의 뜻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 이번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은 미디안입니다. 원래 시내 반도와 아라비아 서쪽을 오가던 유목 족속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때로 우호적이었고 때로 적대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 사람이었고, 바로 앞 장에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던 야엘도 미디안과 이어진 겐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4장과 5장에서 이스라엘을 도왔던 쪽이 6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짓밟는 쪽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어제의 동무가 오늘의 압제자가 되는 이 뒤바뀜이야말로 사사기 시대의 어지러움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 압제의 방식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 땅에 주저앉아 다스린 것이 아니라, 파종기에 맞추어 계절마다 올라와 약탈하고 물러갔습니다. 씨를 뿌려 놓고 거두기 직전에 모두 쓸어 가는 방식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장막을 지고 왔고 낙타를 몰고 왔습니다. 이 무렵부터 사막 유목민들이 낙타를 대규모로 부리기 시작했는데, 낙타는 그들에게 놀라운 기동력을 주었습니다. 번개처럼 나타나 쓸어 담고 사라지는 이 약탈 앞에서 정착 농경민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신명기는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이런 일이 임할 것을 미리 일러 두었습니다. 밭에 씨를 뿌려도 다른 민족이 먹을 것이며, 소와 나귀를 빼앗겨도 되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경고가 문자 그대로 실현된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는 미디안의 수가 많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언약의 주인을 잊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에야 7장에서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을 이기는 이야기가 제 뜻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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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또, 라는 한 글자
하나님은 되풀이되는 배신 앞에서도 언약을 거두지 않으시고, 징계마저 돌이킴의 길로 삼으시는 신실한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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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삿 6:1). 오늘 이야기의 서두는 이 한 절이 전부입니다. 무슨 악을 행했는지는 한마디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또'라는 한 글자가 앞의 모든 이야기를 등에 업고 서 있고, 그 뒤로 칠 년이라는 기간과 미디안이라는 이름이 곧바로 따라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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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호와의 목전에'라는 표현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했는가를 묻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사사기 후반부를 지배하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와 정확히 맞은편에 서 있습니다. 누구의 눈을 기준으로 삼느냐, 사사기 전체가 되풀이해 묻는 물음이 여기 첫 절부터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이 악의 내용을 굳이 적지 않은 데에도 뜻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하루의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삶 전체가 향한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느냐보다 어느 쪽을 보고 서 있느냐가 먼저였습니다.
다음으로 '넘겨 주시니'의 주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미디안이 강해져서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넘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나님의 통제 밖에서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징계였습니다. 칠 년은 앞선 압제 기간들에 비하면 짧습니다. 메소보다미아는 팔 년, 모압은 십팔 년, 야빈은 이십 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사기 저자는 유독 이 칠 년의 참혹함을 길게 그립니다. 기간이 짧다고 고통이 가벼운 것은 아니며, 징계의 무게는 길이가 아니라 목적에 있습니다. 그 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돌이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또'라는 한 글자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은혜의 경험은 결코 죄에 대한 면역이 되지 않습니다. 드보라를 통해 주신 사십 년의 평온이 감사의 토양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망각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우리는 더 놀라운 것을 봅니다. '또' 악을 행한 백성을 하나님은 '또' 찾아오십니다. 언약을 깬 쪽은 늘 사람이었고, 언약을 붙들고 계신 쪽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는 사도의 고백이 사사기 첫 절부터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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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지난 백여 년 동안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잘해서 얻은 결과라고 여기게 만들었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배교는 광야의 굶주림 속에서가 아니라 평온한 사십 년 뒤에 찾아왔습니다. 위기는 대체로 부족할 때가 아니라 넉넉할 때 시작됩니다.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간은 어려운 때가 아니라 아무 일 없이 잘 굴러가는 때입니다. 받은 은혜를 세어 보는 습관을 잃어버리는 순간, '또'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이 한 글자는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되풀이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몇 번을 결심해도 다시 돌아가는 습관, 기도로 이겨 냈다고 믿었는데 어느새 제자리인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낙심하고, 낙심은 곧 포기가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한 절 앞에 잠시 머물러 보십시오. 본문은 '또'라고 적으면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반복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오래갑니다. 오늘 아침 되풀이되는 그 자리 하나를 이름 붙여 적어 보시고, 그 옆에 하나님이 여태 거두지 않으신 은혜 하나를 나란히 적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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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절 숨어서 뿌리고 빼앗기며
하나님은 빼앗긴 것의 목록보다 무너진 관계를 먼저 보게 하시며, 궁핍의 밑바닥에서 터져 나온 신음까지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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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기자 이스라엘 자손은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삿 6:2).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3-4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삿 6:5). 마침내 궁핍함이 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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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의 '이긴지라'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본디 '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자대로 읽으면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 위에서 강했다가 됩니다. 여기서 '손'은 힘이며 지배입니다. 그 손이 위에 놓이자 이스라엘은 산으로 올라가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팠습니다. 정착해 살아야 할 백성이 유목민처럼 산속을 떠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나그네처럼 숨어 사는 이 역설이야말로 오늘 본문이 그리는 가장 아픈 그림입니다.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 땅에서 마음 놓고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3절의 '치러 올라와서'는 원문에서 '올라오다'라는 동사가 두 번 반복됩니다. 직역하면 그들이 올라왔다, 그를 치려고 올라왔다가 됩니다. 파종기만 되면 어김없이 되풀이되었다는 지긋지긋함이 그 반복 속에 담겨 있습니다. 4절의 '가사에 이르도록'은 서남쪽 국경 끝까지, 곧 온 땅이 예외 없이 짓밟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5절의 메뚜기 떼라는 비유가 서늘합니다. 메뚜기는 본래 애굽 위에 내렸던 재앙이었습니다. 애굽을 치던 재앙이 이제 이스라엘 위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언약 백성이 언약을 저버릴 때, 그들은 자기가 구원받아 나온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6절의 '궁핍함이 심한지라'에 쓰인 낱말은 낮아지다, 미천해지다, 참혹하게 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단순히 배가 고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할 지경으로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밑바닥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이 진정한 회개였는지 그저 아파서 지른 비명이었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온 신음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 불분명한 신음마저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되지 못한 탄식을 성령이 친히 아뢰신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여기서 벌써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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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안에도 이스라엘처럼 밑 빠진 독을 안고 사는 자리가 있습니다. 수고는 많은데 남는 것이 없고, 사업은 늘어나는데 사람은 지칩니다. 그때 우리가 흔히 하는 일은 더 열심히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른 진단을 내립니다. 문제는 파종의 양이 아니라 밭을 지키시는 분과의 관계였습니다. 교회가 정말 점검해야 할 것은 프로그램의 개수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있느냐입니다. 열매가 계속 사라진다면 뿌리를 살펴야 하고, 강이 마른다면 샘을 살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산속의 굴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을 피해 숨고 싶은 마음, 애써 이룬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상황부터 바꾸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상황이 먼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관계가 먼저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잃어버린 것의 목록을 적기 전에 이렇게 한 줄만 물어보십시오. 나는 언제부터 그분과 멀어졌는가. 그리고 아직 말이 되지 않는 신음이 있다면 그대로 아뢰십시오. 다듬어진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밑바닥에서 새어 나온 소리도 하나님께는 이미 부르짖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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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절 구원자보다 먼저 오신 말씀
하나님은 고통을 즉시 거두시기보다 먼저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원인 앞에 세우시고 은혜의 기억을 되살리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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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삿 6:7-8상). 그가 전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8하-9절).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온 것은 군대도 사사도 아니고, 이름 없는 한 사람의 입에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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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은 6절 끝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는 말을 두 번 적은 것입니다. 이야기꾼이 같은 말을 반복할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무엇이었는지를 힘주어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앞선 회차들에서는 백성이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곧바로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옷니엘도 그랬고 에훗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구원자가 아니라 예언자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당장 원하던 응답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응답이었습니다.
8절의 '한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남자 선지자를 뜻하는 표현인데, 구약에서 이렇게 쓰인 곳은 여기뿐입니다. 바로 앞 장의 드보라는 이름도 지파도 거처하던 종려나무까지 알려진 여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름도, 출신 지역도, 소속 지파도 없습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뿐입니다. 메신저의 자취가 이렇게 지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메시지 그 자체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커지면 말씀이 가려집니다. 이 이름 없는 선지자는 자기를 지운 채 말씀만 남긴 사람의 첫 얼굴입니다.
그가 전한 내용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다 아는 옛이야기, 곧 출애굽입니다. 8절 원문에서 하나님은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문장 맨 앞에 세우십니다. 그 일을 하신 분이 누구인지 못을 박는 어법입니다. 그리고 이 짧은 두 절 안에 '손'이 거듭 등장합니다. 애굽 사람의 손,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입니다. 1절에서 그들을 짓누르던 것도 미디안의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서 건지시기 전에, 애굽의 손에서 건져 내셨던 그 손을 먼저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역사가 먼저 있었고 명령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이 순서는 복음에서도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일이 먼저였고, 우리의 순종은 그 은혜 뒤에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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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응답이 빠른 신앙에 익숙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해결을 구하고, 해결이 더디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던 자리에 실은 말씀이 먼저 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없애 주시기 전에 고통의 원인 앞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더 깊은 자비입니다.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결과만 치워 주는 것은 같은 자리로 또 돌아가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도가 빨리 끝나게 해 달라는 데서 멈추지 않고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로 깊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에 들어섭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이 순서는 은혜입니다. 기다림이 길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안 들으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이미 응답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응답이 우리가 기대한 모양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응답이 더딘 그 자리에 대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혹시 하나님은 이미 말씀으로 대답하고 계시지 않는가. 지금 내가 펼쳐 놓은 이 본문이 그 대답은 아닌가. 말씀은 읽고 지나갈 때가 아니라 그 앞에 붙들려 서 있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오늘 십 분만 더 이 자리에 머물러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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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로 우리의 예배를 읽으시며, 무너진 언약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한마디로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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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말씀은 이렇게 맺힙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삿 6:10). 은혜의 회고가 끝나자 곧바로 명령이 나오고, 명령 뒤에는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짧은 판결이 놓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그대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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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는 십계명의 서문과 같은 언약의 공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호칭이 좁혀지는 방식입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셨는데 10절에 이르면 '너희의 하나님'이 됩니다.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일반적인 고백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로 성큼 다가오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문제를 풀 능력이 아니라, 그분이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관계의 확신입니다. 상황이 흔들릴수록 붙들어야 할 것은 환경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에 쓰인 히브리어는 무서워하다라는 뜻과 함께 경외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방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겁먹지 말라는 격려가 아니라, 그것들을 경외하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선포입니다. 여기에 더해 왜 하필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려면 그 땅의 신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 가나안의 상식이었습니다. 비와 풍요를 바알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배교는 종교를 바꾼 사건이라기보다 먹고사는 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땅을 선물로 주신 분을 두고 땅의 신에게 소출을 구하는 이 모순이 그들을 굴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하나님은 대명사를 나란히 세워 대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망은 여기서 뚝 끊깁니다. 회개하라는 명령도, 그리하면 구원하리라는 약속도 붙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진단만 남기고 퇴장합니다. 열린 채로 남겨진 이 결말이 독자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로 찾아가십니다. 책망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혜가 그 뒤를 따라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복음의 순서가 여기서도 그대로 지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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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오늘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숫자와 평판과 재정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정직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기준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예배는 남아 있어도 그 예배가 향하는 방향은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아모리 사람의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유효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 고백은 장식이 되고 맙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이 물음은 예리합니다.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나는 무엇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그 답이 곧 내가 실제로 섬기는 것의 이름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이 한 문장만 들고 걸어가 보십시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이 짧은 선언이 내 하루의 두려움보다 크다는 것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보십시오.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이 있습니다. 그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이고, 그 기쁨이 우리를 하루 더 걷게 합니다. 오늘도 그런 아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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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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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라는 한 글자 앞에 섭니다.
저희는 몇 번이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평온한 사십 년이
망각의 온상이 되지 않게 하시고
받은 은혜를 세는 아침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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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속에 숨은 백성을 보시는 주님,
저희에게도 숨고 싶은 자리가 있습니다.
수고는 많은데 남는 것이 없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잃은 것의 목록을 세기 전에
무너진 자리를 먼저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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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먼저 보내시는 하나님,
저희는 늘 빠른 응답만 구했습니다.
고통을 치워 달라는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묻게 하옵소서.
이름 없이 사라진 그 선지자처럼
저희도 저희를 지우고 말씀만 남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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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그 한마디에 오늘을 걸겠습니다.
저희 두려움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땅의 신들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하옵소서.
책망 뒤에 찾아오시는 은혜를 믿으며
오늘도 상수리나무 아래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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