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5:19-31 하늘이 싸운 전쟁, 땅이 받은 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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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의 노래가 후반부로 접어듭니다.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 한 조각도 탈취하지 못했고,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며 기손 강이 그 무리를 표류시켰습니다(19-22절). 이어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돕지 않은 메로스를 거듭거듭 저주하라 명하고, 반대로 야엘은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라 선언되며 시스라의 최후가 느린 화면처럼 그려집니다(23-27절). 한편 시스라의 어머니는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으며 아들이 노략물을 나누느라 늦는다고 스스로를 달랩니다(28-30절). 노래는 주의 원수는 망하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해 달라는 기도로 닫히고, 그 땅은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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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리는 이 노래의 앞 절반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일과 에돔 들에서부터 강림하시고, 백성이 골짜기로 내려가고, 어떤 지파는 시냇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노래가 절정에 오르는 자리입니다. 앞 절반이 '누가 내려갔는가'를 물었다면, 뒤 절반은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노래합니다. 전쟁이 어떻게 끝났고, 끝난 뒤에 누가 저주를 받고 누가 복을 받았으며, 진 쪽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차례로 보여 줍니다.
# 노래의 짜임새는 넷입니다. 전쟁의 승리(19-22절), 전쟁 후의 상벌(23-27절), 시스라의 어머니(28-30절), 그리고 송영(31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배열입니다. 전투 장면은 네 절뿐이고, 전쟁이 끝난 뒤의 이야기가 훨씬 깁니다. 노래가 관심을 두는 곳이 승패 자체가 아니라 그 승패 앞에서 사람들이 어디에 서 있었는가에 있다는 뜻입니다.
# 지리를 알면 19-21절이 훨씬 또렷해집니다. 다아낙과 므깃도는 이스르엘 평야의 남쪽 가장자리에 나란히 선 두 요새 도시입니다.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국제 대로가 이 두 도시 사이를 지났기에, 고대 근동에서 이곳은 늘 군대가 부딪치는 자리였습니다. 기손 강은 그 평야를 가로질러 지중해로 흐르는데, 우리가 아는 강이 아니라 '와디'라 불리는 건천입니다.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는 마른 바닥을 드러냅니다. 시스라가 철 병거 부대를 그 마른 바닥에 세워 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평야의 단단한 땅은 병거에게 가장 유리한 전장이었습니다.
# 종교적 배경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은 비와 폭풍을 다스린다고 여겨지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기 한복판에 폭우를 쏟아부어 병거를 진창에 빠뜨리신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20절이 별들을 불러오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들은 별을 폭우의 근원으로 그리곤 했는데, 드보라는 바로 그 익숙한 그림을 빌려와 하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뒤집어 선언합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이기 전에 여호와와 바알의 전쟁이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 단락은 세 여인을 나란히 세워 놓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 장막에서 손을 쓴 이방 여인 야엘, 그리고 창살 뒤에서 전리품을 세는 '가나안의 어머니'입니다. 사사기 4장과 5장은 유난히 여성의 자리가 두드러지는 본문인데, 오늘 본문에 이르러 그 대비가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 편에 선 두 여인은 각각 찬양과 복으로 끝나고, 세상의 힘에 소망을 둔 한 여인은 허망한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노래는 이 세 사람을 통해 정경 전체가 되풀이해 묻는 물음을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왕으로 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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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절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전쟁터 뒤에서 온 우주를 동원해 친히 싸우시는 하늘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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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습니다(삿 5:19).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삿 5:20) 하고 노래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고, 드보라는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삿 5:21) 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 외칩니다. 그리고 그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고 마무리합니다(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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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시작합니다. 싸운 상대가 '시스라'가 아니라 '가나안 왕들'입니다. 실제 전투는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 한 사람과의 충돌이었지만, 노래는 그것을 가나안 전체와의 전쟁처럼 크게 부풀립니다. 이 전쟁이 한 지역의 국지전이 아니라 땅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가르는 싸움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한마디로 못 박습니다.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전리품 한 조각도 챙기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20절에서 노래는 갑자기 시선을 하늘로 올립니다. 땅에서 벌어진 싸움을 별들의 싸움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수사가 아니라 신학적 선언입니다. 별이 폭우를 몰고 온다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림이었고, 그 폭우를 다스리는 신은 바알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건기의 마른 하늘을 열어 억수를 쏟아부으신 분은 바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마른 바닥이던 기손 강이 순식간에 급류로 변했고, 철 병거 구백 대가 진창에 잠겼습니다. 21절이 굳이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하고 덧붙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홍해에서 애굽의 병거를 삼키셨던 그 손이 여기서도 똑같이 움직였다는 기억의 고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승리는 기손 강가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땅에서는 그 결정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21절 후반의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옮기면 '진군하여라, 내 영혼아, 힘차게'가 됩니다. 승리를 회상하는 말이라기보다, 하늘의 결정을 본 사람이 자기 자신을 향해 지르는 외침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22절의 요란한 말굽 소리는 개선의 행진이 아니라 물을 피해 달아나는 자들의 아우성입니다. 세상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이 장면은 훗날 십자가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거기서도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무장 해제를 당했고, 이긴 것처럼 보이던 자들이 사실은 이미 진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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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싸움의 무대를 땅에만 그려 왔습니다. 숫자와 여론과 영향력이 신앙의 승패를 가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상대보다 더 큰 병거를 갖추려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드보라의 눈에는 전쟁터보다 하나님의 보좌가 먼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병거 구백 대 앞에서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더 나은 전략이 아니라, 하늘을 먼저 올려다보는 시선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힘은 우리 손에 있는 무기가 아니라 하늘을 움직이시는 분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는 저마다의 철 병거가 서 있습니다.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건강, 몇 해째 풀리지 않는 자녀 문제, 아무리 애써도 좁혀지지 않는 형편의 격차입니다. 그것들 앞에 서면 나의 방패와 창은 늘 초라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병거가 무너진 자리가 사람의 힘이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이 스무 번째 절 한 줄 앞에 십 분만 더 머물러 보십시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한 문장을 소리 내어 되씹는 동안, 내 눈이 보는 전선의 크기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전선의 크기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묵상은 새로운 소식을 얻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결정된 일을 내 마음에 옮겨 적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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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7절 오지 않은 이름, 복 받은 이름
하나님은 형제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침묵을 저주라 부르시고, 작은 손의 순종을 가장 큰 복으로 갚으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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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삿 5:23) 하는 선언이 갑자기 울립니다. 그 반대편에 야엘이 섭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라 노래합니다(24절).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야엘은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25절),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고 오른손에 방망이를 들어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습니다(26절). 시스라는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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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에서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는 것은 중요한 장치입니다. 이어지는 저주와 축복이 드보라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못 박기 때문입니다. 원어에서 '저주하다'라는 동사는 이 짧은 구절 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토록 강한 저주를 받은 메로스의 죄목이 무엇인가 하면, 놀랍게도 우상을 섬겼다는 말도 없고 가나안 편에 붙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다만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않았을 뿐입니다. 메로스라는 지명은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고 위치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듣는 이의 관심은 자연히 '그곳이 어디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왜 저주를 받는가'로 옮겨 갑니다. 메로스는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라, 도울 수 있었는데도 오지 않은 모든 이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 저주와 정면으로 마주 보도록 배치된 것이 24절의 축복입니다. 히브리어 어순을 살려 읽으면 이렇습니다. '복을 받을 것이다, 여인들보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안의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다.' 같은 낱말이 앞뒤를 감싸고 그 한가운데에 야엘의 이름이 놓입니다. 우리말은 비교급처럼 들리지만 실은 최상급 표현으로, 여인 중에 가장 복되다는 선언입니다. 세 번 반복되는 저주와 두 번 감싸는 축복이 마주 보는 이 구조가 오늘 본문의 뼈대입니다. 오지 않은 자와 손을 쓴 자, 노래는 그 둘을 나란히 세워 놓고 하나님의 저울을 보여 줍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는 화면이 갑자기 느려집니다. 물을 구하는 자에게 야엘은 우유를, 그것도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내놓습니다. 그녀가 줄 수 있는 최상의 대접이었고, 동시에 그를 깊은 잠으로 이끄는 손길이었습니다. 26절에서 그녀가 잡은 것은 장막 말뚝과 일꾼들의 방망이입니다. 둘 다 유목민 여인이 날마다 장막을 치고 걷으며 쥐던 살림의 연장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대단한 자격이나 특별한 무기가 아니라,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일상의 도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27절은 시스라가 무너지는 동작을 세 번이나 되풀이해 묘사합니다. 꾸부러지고 엎드러지고 쓰러졌다가, 다시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짓밟던 철 병거의 주인이, 무장하지 않은 한 여인의 발치에 항복하는 자세로 엎드린 것입니다. 세상이 미련하다 여기는 것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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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가장 아프게 읽어야 할 절이 23절입니다. 메로스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안 앞에서 신중이라는 이름으로 침묵하고, 그 침묵을 중립이라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관심과 방관을 가볍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공동체가 신음하고 있는데 자기 안위만 지키며 물러서는 것은 단순한 소극성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서의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담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나와 무관하다고 느껴질 때, 오늘 이 저주의 세 번 반복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리로 옮겨 오면 물음은 더 구체적입니다. 나에게 야엘의 말뚝은 무엇입니까. 특별한 은사도 넉넉한 형편도 아닌, 지금 내 손에 이미 쥐어져 있는 것 말입니다. 밥 한 끼를 차릴 수 있는 손,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시간, 이름을 불러 기도할 수 있는 십 분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내놓으라 하지 않으시고 있는 것을 내어 드리라 하십니다. 오늘 그 도구 하나를 정해 이번 주 안에 한 번 써 보십시오. 오지 않은 이름과 손을 쓴 이름, 그 사이를 가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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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0절 창살 너머의 헛된 셈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었는지를 끝내 드러내시고, 헛된 기대의 끝을 정직하게 보여 주시는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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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삿 5:28) 하고 장면이 바뀝니다.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합니다(29절).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겠으며,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을 것이고, 시스라는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을 노략하여 목에 꾸밀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랩니다(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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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사사기 4장의 산문에 전혀 나오지 않고, 드보라가 실제로 보거나 들은 것도 아닙니다. 시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지어 넣은 상상의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는 강한 아이러니가 흐릅니다. 노래를 듣는 우리는 시스라가 이미 장막 바닥에 엎드러져 죽은 것을 압니다. 그러나 창가의 어머니는 모릅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이 간격이, 세상의 힘에 소망을 둔 인생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어떤 설교보다 아프게 보여 줍니다.
28절의 '부르짖다'로 옮겨진 히브리어 동사는 구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그 결을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흐느꼈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애도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애도로 읽는다면,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알지도 못한 채 이미 그 죽음을 곡하고 있는 셈입니다. 29절에서 '지혜로운 시녀들'로 번역된 낱말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시중드는 하녀가 아니라 왕궁에 속한 귀부인들을 가리킵니다. 곧 이 헛된 셈은 한 어머니의 개인적인 착각이 아니라, 그 사회 지배층 전체가 공유하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30절에 이르면 그 사고방식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한두 처녀'로 옮긴 히브리어를 문자대로 읽으면 '자궁 하나, 자궁 둘'입니다. 패전한 쪽의 여인을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전리품이자 생산 수단으로 세는 말입니다. 자신도 여인이면서 여인을 그렇게 셈하는 이 장면에서, 여성성보다 지배자의 폭력성이 더 크게 드러납니다. 이어서 '채색 옷'이 세 번, '수 놓은'이 두 번 반복되며 탐욕이 극대화됩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부와 권력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같은 노래 안에서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한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골짜기로 내려갔고, 다른 한 어머니는 자녀가 빼앗아 올 것을 세며 창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찬양으로 끝나고, 다른 한 사람은 허망한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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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안에도 창살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보다 무엇을 받을까를 먼저 세어 봅니다. 신앙이 노략물의 목록이 되면, 기도는 셈이 되고 예배는 투자가 됩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무섭게 다가오는 것은 그녀가 악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서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소망이 무엇을 딛고 서 있느냐에 따라 같은 기다림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헛된 셈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대가 지금 무엇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창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승진입니까, 자녀의 성적입니까, 형편이 나아지는 소식입니까. 그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오지 않으면 무너질 자리에 신앙 전체를 세워 두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성경 여백에 이렇게 한 줄만 적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옆에 다시 한 줄을 적으십시오. 그것이 오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찬양할 수 있는가. 이 두 줄을 마주 놓는 일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마음의 창을 열어 내 기대의 뿌리를 햇빛 아래 꺼내 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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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절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당신의 권능으로 떠오르게 하시어 온 땅을 비추는 빛으로 세우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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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다시 하나님을 향한 간구로 돌아와 끝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삿 5:31).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이 조용히 덧붙습니다.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창가의 헛된 셈 바로 뒤에 이 기도가 놓임으로써, 세상의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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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은 두 운명을 나란히 놓는 기도입니다. 한쪽은 주의 원수들이고, 다른 한쪽은 주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감정이 뜨거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신명기가 되풀이해 쓰는 '사랑'은 언약 관계 안에서의 신실한 충성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자리에 놓였던 메로스와 야엘이 바로 이 두 무리의 얼굴이었습니다. 노래는 그 둘의 마지막이 이렇게 갈리기를 구하며 닫힙니다.
'해가 힘 있게'라는 표현에는 놓치기 쉬운 보물이 숨어 있습니다. '힘 있게'로 옮긴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그의 권능으로'가 됩니다. 그런데 그 '그의'에 해당하는 접미어는 남성형인 반면, 히브리어에서 '해'는 여성형 명사입니다. 문법이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접미어는 '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받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게다가 여기 쓰인 '권능'이라는 낱말은 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께 돌려지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이렇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해를 떠오르게 하시듯, 주를 사랑하는 자들도 그의 권능으로 떠오르게 하소서. 성도가 빛나는 것은 제 안에 빛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해를 밀어 올리시는 그 손이 우리를 밀어 올리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사사기 특유의 후렴입니다.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 배교하고 압제를 받고 부르짖고 구원자를 얻고 안식하는 순환의 마지막 자리, 곧 안식의 자리입니다. 드보라는 사사들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죽음조차 기록되지 않은 채 조용히 무대를 내려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온이 사십 년짜리였음을 압니다. 참된 안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오랜 세월을 건너 한 예언으로 이어집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라는 말라기의 약속이고,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드보라의 마지막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응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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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어둡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실제로 신뢰는 낮아졌고 다음 세대는 줄었으며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노래의 마지막은 어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해를 향해 서 있습니다. 밤이 길다고 해가 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는 조바심에서 벗어나 다시 제자리를 찾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서 있는 일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의 사십 년은 저마다 다르게 흘러갑니다. 지금 밝은 낮을 걷는 분도 계시고, 아직 새벽 어스름 속에 서 계신 분도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이 문장 하나만 들고 걸어가 보십시오.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내 힘으로 빛나야 한다는 짐을 내려놓고, 나를 떠오르게 하실 그분의 권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이 있습니다. 그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이고, 그 기쁨이 우리를 하루 더 걷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도 그런 아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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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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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먼저 싸우시는 주님,
저희 눈이 보는 전선은 늘 좁습니다.
병거 구백 대 앞에서
저희 방패와 창은 초라합니다.
그러나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던
그 아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승리는 이미 하늘에서 결정되었고
저희는 그 결정을 따라 걷는 자임을
오늘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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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 저울을 드시는 하나님,
저희가 반대하지 않았다는 말로
오지 않은 자리를 덮지 않게 하옵소서.
메로스의 침묵이
저희 침묵과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형제가 진창으로 내려갈 때
신중이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지 않게 하시고
지금 저희 손에 쥐어진 것으로
그 자리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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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뿌리를 아시는 주님,
저희도 자주 창가에 앉아
오지 않는 것을 세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지 않아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저희 기대가 무엇에 뿌리내렸는지
햇빛 아래 정직하게 꺼내 놓게 하시고
받을 것보다 드릴 것을
먼저 헤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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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성령님,
저희가 스스로 빛나려 애쓰지 않게 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떠오르게 하옵소서.
밤이 길어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광양사랑의교회가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서 있게 하옵소서.
오늘 아침의 이 작은 묵상이
그 하루의 첫 빛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