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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4:11-24 병거는 진창에, 영광은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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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락이 다볼 산에 올랐다는 보고를 들은 시스라는 철 병거 구백 대와 온 군대를 하로셋 학고임에서 기손 강으로 모읍니다(12-13절). 드보라가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넘겨 주신 날이라 선언하자 바락은 만 명을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가고, 여호와께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온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합니다(14-16절). 그가 이른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습니다. 야엘은 그를 영접해 이불로 덮고 우유를 마시게 한 뒤, 깊이 잠든 그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습니다(17-22절).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굴복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손이 마침내 야빈을 진멸합니다(23-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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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번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고,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한 문장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성취의 기록입니다. 사사기의 화자는 예고하고, 늦추고, 마침내 보여 줍니다. 이야기 자체가 신학을 실어 나릅니다.

# 무대는 이스라엘 북부입니다. 다볼 산은 이스르엘 평원 동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평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무엇보다 철 병거가 올라올 수 없는 지형입니다. 반면 기손 강은 므깃도와 다아낙 일대를 가로지르는 와디, 곧 건기에는 마른 바닥을 드러내는 계절 하천입니다. 시스라가 구백 대를 그곳에 집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건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볼 산을 에워싸면 바락이 독 안에 든 쥐가 되리라 계산했습니다. 지형만 놓고 보면 틀린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4장은 정작 전투 장면을 거의 그리지 않습니다. 열다섯 절 가운데 실제 교전은 한 절뿐입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다음 장의 노래입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웠고, 기손 강이 그 무리를 표류시켰다고 노래합니다(삿 5:20-21). 건기의 마른 강에 폭우가 쏟아졌고, 기동성으로 살던 철 병거는 제 무게에 스스로 갇혔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무기는 더 좋은 병거가 아니라 한 차례의 비였습니다.

# 이 이야기를 꿰는 낱말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병거'입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이 낱말이 쓰이는 자리의 거의 전부가 드보라 이야기에 몰려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고(4:2), 시스라를 바락의 손에 넘기시겠다 하셨고(4:7), 다시 여인의 손에 파신다 하셨습니다(4:9).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야빈을 눌렀다고 맺습니다. 손이 바뀌는 이야기입니다.

# 겐 족속은 모세의 처가 쪽 사람들로, 사사기 1장 16절에 따르면 유다 자손과 함께 아랏 남방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벨은 자기 족속을 떠나 북쪽 게데스 근처로 올라와 하솔 왕 야빈과 화친을 맺었습니다. 언약 백성과 가장 가까운 혈연을 지닌 사람이 언약의 반대편에 장막을 친 셈입니다. 그 장막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무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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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절 이야기를 끊고 들어온 한 문장

하나님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한 줄의 사건까지 구원의 무대로 미리 배치해 두시는, 역사의 세밀한 주관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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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삿 4:11). 바락이 만 명을 게데스로 불러 모은 10절과, 그가 다볼 산에 올랐다는 보고가 시스라에게 전해지는 12절 사이에, 전쟁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이주 기록이 불쑥 끼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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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흐름을 이렇게 툭 끊는 문장은 대개 복선입니다. 성경의 화자는 필요 없는 정보를 넣지 않습니다. 이 한 줄에는 세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헤벨이 모세의 처가 쪽 사람이라는 것. 둘째, 그가 자기 족속을 떠났다는 것. 셋째, 그가 게데스 가까이에 장막을 쳤다는 것입니다. 게데스는 바락의 고향이자 이스라엘 군대의 집결지입니다. 곧 헤벨은 이스라엘 진영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7절은 하솔 왕 야빈과 헤벨의 집 사이에 화평이 있었다고 덧붙입니다. 양쪽을 다 아는 사람이 한쪽 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12절의 '사람들'이 누구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바락이 다볼 산에 올랐다는 정보를 시스라에게 즉각 물어다 준 그 정체불명의 사람들 말입니다. 헤벨의 선택은 언약 백성이 따라서는 안 될 본보기였습니다. 모세의 외척으로 태어났으나 언약 공동체를 떠나 압제자와 손을 잡았고, 그 대가로 안전을 얻었습니다. 자기 족속을 떠났다는 짧은 말 속에 한 사람의 신앙 이력이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신앙은 대개 큰 배교로 무너지지 않고, 안전을 따라 장막을 조금씩 옮기는 일로 무너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배반의 장막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습니다. 헤벨이 야빈 곁으로 옮겨 온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하나님은 그 이주를 시스라의 마지막 도피처를 만드는 데 쓰십니다. 사람은 자기 계산으로 움직이고 하나님은 그 계산까지 품어 자기 뜻을 이루십니다. 훗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손조차 구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 섭리는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곁가지처럼 보이고, 다 지나고 나서야 복선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믿음은 지금 이해되는 만큼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이해되지 않는 대목까지 그분의 손에 맡기는 일입니다. 오늘 알 수 없는 한 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 다 쓰지 않으신 문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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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할 때 큰 사건만 붙듭니다. 극적인 응답, 뚜렷한 전환, 눈에 보이는 열매를 두고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 주는 섭리는 그런 모양이 아닙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한 가족의 이사 한 번이 스무 해의 압제를 끝내는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별일 아니다' 하고 지나친 자리들이 실은 하나님의 문장 안에 이미 배치된 낱말이었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내 삶에서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한 대목은 무엇입니까. 어그러진 계획, 뜻밖에 옮겨진 자리, 이해되지 않는 만남이 있을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그것을 지워 버리지 말고 여백에 한 줄로 적어 두십시오. 성경의 화자가 11절을 지우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당장 답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한 줄이 왜 거기 있었는지 알게 되는 아침이 반드시 옵니다.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그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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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절 병거를 진창으로 이끄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이 자랑하는 가장 강한 것을 가장 약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전쟁의 참된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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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라는 보고를 듣고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읍니다(삿 4:13). 드보라가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14절) 외치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내려가고, 여호와께서 시스라의 온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합니다(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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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의 드보라의 말에는 시제가 없습니다. '넘겨 주실 날'이 아니라 "넘겨 주신 날"입니다. 아직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 이미 끝난 일로 말합니다. 이어지는 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나님이 앞서 나가시는 것이 먼저이고 바락이 내려가는 것이 나중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신앙은 곧 모험이 되고, 순서가 바르면 순종이 됩니다. 바락은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드보라는 그 문장을 대신 만들어 그의 손에 쥐여 줍니다.

15절이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혼란에 빠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 쓰인 낱말은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어지러워졌을 때 쓰인 그 낱말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화자는 치열한 교전 장면을 그리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열다섯 절 가운데 전투는 한 절로 지나가고, 대신 병거가 무너졌다는 사실만 남깁니다. 다음 장의 노래가 그 빈칸을 채워 줍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웠고 기손 강이 그 무리를 표류시켰습니다(삿 5:20-21). 하나님이 부르신 군대는 하늘의 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일은 산에서 내려간 것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늘이 했습니다.

여기에 이 본문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시스라는 병거를 펼치기 가장 좋은 곳을 골랐는데, 바로 그 자리가 병거를 묻어 버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마른 강바닥을 골랐는데 그 강바닥이 범람했습니다. 가장 강한 무기가 가장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바락은 끝까지 병거를 쫓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병거를 무력하게 하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병거에 눈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작 사람을 놓칩니다. 두려워하던 것에 붙들린 사람은 그것이 무너진 뒤에도 한동안 그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화자는 바락의 그 미련까지 굳이 적어 둡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사람이 다 성숙해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미숙한 사람을 데리고도 기어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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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오늘 시스라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규모와 시설과 조직을 우리의 병거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사역이 된다고 믿었고, 그것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병거를 늘려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시고, 병거가 아무 소용 없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더 큰 병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앞서 나가신다는 한 문장입니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병거를 세며 삽니다. 통장의 숫자, 진단서의 소견, 관계의 냉랭함, 자녀의 성적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을 아무리 오래 세어도 세는 일 자체에는 힘이 없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세기를 멈추고 14절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묵상은 없는 것을 세던 눈을 앞서 가시는 분께로 옮겨 놓는 일입니다. 그 한 문장이 마음에 앉는 순간, 진창에 빠진 병거처럼 나를 눌러 오던 것들의 무게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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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절 장막이 전쟁터가 되던 날

하나님은 세상이 세지 않는 사람의 평범한 손을 들어 역사의 결말을 쓰시는, 뜻밖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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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도망한 시스라가 이른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습니다(삿 4:17). 야엘은 나가 그를 맞으며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18절) 하고 이불로 덮어 줍니다. 물을 청하는 그에게 우유를 주고(19절), 그가 깊이 잠들자 장막 말뚝과 방망이를 들고 가만히 다가가 그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습니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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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이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웬만해서는 장면을 이렇게 느리게 늦추지 않습니다. 전투는 한 절로 지나갔는데 장막 안의 몇 분은 여섯 절에 걸쳐 펼쳐집니다. 서술이 느려지는 자리가 화자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은 시종일관 야엘입니다. 그가 나가서 맞고, 그가 들어오라 청하고, 그가 덮어 주고, 그가 마시게 하고, 그가 다가가고, 그가 박습니다. 군대 장관은 이 여섯 절 내내 끌려다니기만 합니다.

말의 결이 바뀌는 대목을 눈여겨보십시오. 처음 물을 청할 때 시스라는 "청하노니"라는 정중한 말을 씁니다. 그러나 우유를 마시고 기운을 되찾자 곧바로 장막 문에 서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원문에서 이 명령형은 남성형입니다. 여인에게 남성 명령형을 쓴 것은 문법의 실수가 아니라, 평소 남자 군인들에게 호령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 것입니다. 패잔병으로 들어왔던 사람이 우유 한 그릇에 다시 군대 장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마지막 명령이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였습니다. 그 말은 그대로 자기 운명이 됩니다. 조금 뒤 그는 정말로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야엘이 든 것은 칼이 아니라 장막 말뚝과 방망이였습니다. 유목민의 장막은 여인들이 치고 걷었으므로 말뚝과 방망이는 그의 손에 가장 익숙한 살림살이였습니다. 군대 장관이 수많은 칼로도 죽지 않던 그날, 한 주부가 부엌 세간 같은 물건으로 스무 해의 압제를 끝냅니다. 여기서 소 모는 막대기로 육백 명을 죽인 삼갈이 겹쳐 보이고, 왼손의 단검으로 에글론을 처단한 에훗이 겹쳐 보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무기의 우열로 결판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야엘이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끝내 침묵합니다. 동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팔렸다는 말씀의 성취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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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사역자를 세울 때 여전히 조건을 먼저 봅니다. 학력과 경력과 직분과 성별을 헤아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역사의 결말을 쓴 사람은 사사도 선지자도 군인도 아니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맺은 동맹을 깨고 하나님 나라 편에 선 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어느 편에 서느냐를 보십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미리 지워 버린 이름들이 없는지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 붙들 것은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입니다. 야엘은 없는 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늘 쓰던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늘 쓰던 것이 있습니다. 밥을 짓는 손, 운전대를 잡는 손, 자판을 두드리는 손, 아픈 이를 씻기는 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그 손을 하나님 앞에 한 번 펴 보십시오. 묵상은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오늘 내 손에 쥐어진 것을 주님의 것으로 다시 받아 드는 일입니다. 그 손이 곧 하나님이 쓰시는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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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4절 손이 바뀌었다

하나님은 위기를 잠시 면하게 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완전한 회복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이끄시는, 신실한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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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삿 4:23).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24절)로 이야기가 맺힙니다.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대신, 그 승리가 누구에게서 왔고 어디까지 갔는지를 밝히는 두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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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이 장 전체에서 사람의 이름이 그토록 많이 나왔는데, 마무리에서 화자는 굳이 하나님을 주어 자리로 되돌려 놓습니다. 드보라의 카리스마도, 야엘의 담대함도, 바락의 만 명도 이 문장의 주어가 아닙니다. 사람의 헌신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뿌리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사사기가 인물 무용담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사는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 마무리가 없었다면 오늘 본문은 한 용감한 여인의 무용담으로만 읽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화자는 그 오독을 막으려고 마지막에 한 번 더 하나님을 부릅니다.

24절은 2절과 정면으로 맞세운 문장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습니다. 24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손'이 야빈을 누릅니다. 같은 낱말이 처음과 끝에 놓여 상황의 완전한 역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점점 더'라는 말이 눈에 걸립니다. 시스라가 죽은 그날 모든 것이 한 번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승리는 그날 시작되었고 진멸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대개 이렇게 옵니다. 결정적인 전환은 한순간에 오지만, 그 전환이 삶의 구석구석까지 스미는 데는 걸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한 번의 사건으로도 말하고 오래 걸어야 할 길로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두 절은 '마침내'라는 낱말로 닫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위기 모면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을 향해 갑니다. 스무 해를 눌러 온 세력을 뿌리까지 뽑기 전에는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 걸음은 결국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뿌리까지 무너뜨리시고 부활로 그 승리를 확정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집니다. 이미 이루어졌으나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그 승리 안에서, 오늘 우리도 '점점 더' 눌러 가는 걸음을 걷습니다. 오늘의 더딤이 하나님의 더딤은 아닙니다. 방향이 이미 정해진 싸움에서 남은 것은 시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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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부흥을 사건으로만 기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한 번의 집회, 한 번의 결단, 한 번의 응답으로 모든 것이 뒤집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하루의 승리와 '점점 더'의 시간을 함께 적습니다. 결정적 은혜를 붙드는 것도 신앙이지만, 그 은혜를 일상 속에서 끈질기게 밀고 가는 것도 신앙입니다. 한 번의 뜨거움보다 오래 가는 방향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나를 눌러 온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본문은 야빈이 그날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날부터 굴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한 걸음이 어제보다 조금 더 눌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오늘 이 한 문장만 들고 하루를 걸어가 보십시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마침내에 이른다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그 마침내를 향한 오늘의 한 걸음이, 아무 표도 나지 않는 이 아침의 십 분 묵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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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

역사를 세밀히 주관하시는 주님,

아무 상관 없어 보이던 한 줄이

구원의 자리였음을 봅니다.

저희 삶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대목을

지우지 않게 하시고,

주께서 놓아두신 문장으로

읽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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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

저희는 오래도록

병거의 수만 세어 왔습니다.

세어도 힘이 되지 않는 것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앞서 나가신다는

한 문장 앞에

저희 두려움을 내려놓습니다.

마른 강에 비를 내리신 주님,

오늘도 그렇게 일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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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주님,

장막 말뚝 하나를 들어

스무 해를 끝내신 주님,

없는 것을 구하기 전에

지금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먼저 주님께 펴 드리게 하옵소서.

작은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그 손을 주님의 손으로 삼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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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한 번의 뜨거움이 아니라

점점 더 나아가는 걸음으로

주의 나라를 살아 내게 하옵소서.

눌린 자리마다 손이 바뀌게 하시고

저희 아침의 작은 묵상이

그 마침내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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