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사기 03:01-11 남겨 두신 가나안, 세워 주신 구원자

*

하나님은 가나안의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새 세대를 시험하고 가르치시려고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십니다(1-3절). 남겨 두신 목적은 그들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심이었으나, 이스라엘은 여섯 족속 가운데 거주하면서 그들과 통혼하고 그들의 신들을 섬겨 그 시험에 무너집니다(4-6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자, 하나님은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고 그들은 팔 년 동안 그를 섬깁니다(7-8절).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매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그가 나가서 싸울 때 하나님이 대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고,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9-11절).

*

# 오늘 본문에는 경첩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사사기 1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가 서론이고, 3장 7절부터 16장 31절까지가 본론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6절까지는 서론의 마지막 문장이고, 7절부터는 본론의 첫 문장입니다. 어제까지 읽은 2장이 "왜 이스라엘이 실패했는가"를 진단했다면, 오늘 본문은 그 진단서를 덮으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여는 자리입니다. 한 본문 안에 내리막의 끝과 오르막의 시작이 함께 있습니다.

# 1절에서 6절은 2장 20절에서 23절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것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관심이 여호수아 시절에서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새 세대로 옮겨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한다'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입니다. 1절이 말하는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이라는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전투 경험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신 그 전쟁, 곧 2장 10절이 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르치려 하신 전쟁 기술은 칼 쓰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는 그 방식, 곧 승리가 군사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새 세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물려받았지만 그 땅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는 몰랐습니다. 유산은 상속되지만 경험은 상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곁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민족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 7절부터는 첫 사사 옷니엘의 이야기입니다.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가 등장하지만, 배교와 심판과 부르짖음과 구원과 안식이라는 순환의 네 마디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갖춘 사사는 옷니엘뿐입니다. 뒤에 오는 사사들은 이 틀을 물려받되 조금씩 어긋나고 이지러집니다. 그래서 옷니엘 이야기는 짧지만 사사기 전체를 읽는 자[尺]가 됩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친 나라는 하나님이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이 아니라 저 멀리 두 강 사이에서 온 아람의 왕이었습니다.

*

# 1-3절 남겨 두신 것은 실패가 아니라 학교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없애 주시는 분이기 전에, 남겨 두신 문제 앞에 서게 하셔서 당신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화자는 남겨진 민족들의 명단을 내놓기 전에 그 이유부터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삿 3:1). 이어 2절은 두 번째 이유를 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그리고 3절이 명단을 펼칩니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입니다. 시험하려 하심과 가르쳐 알게 하려 하심, 남겨 두심의 이유가 둘입니다.

.

먼저 낱말을 보아야 합니다. '시험하려'로 옮겨진 히브리어 '나사'는 넘어뜨리려고 함정을 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겪게 하여 그 실상을 드러내고 검증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낱말이 2장 22절에도 쓰였습니다. 원문에는 우리말 성경이 옮기지 않은 한 마디가 더 붙어 있는데, '그들을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시험의 도구가 무엇인지를 못 박는 표현입니다. 남겨진 민족들은 하나님이 미처 처리하지 못하신 잔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에 쥐고 계신 교재였습니다.

'가르쳐 알게 하려'는 표현은 더 깊습니다. 2절 원문에서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옮겨진 말은 직역하면 '얼굴을 향해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아는 앎, 곧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겪어서 아는 앎을 가리킵니다. 앞 세대는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 세대는 그것을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있습니다. 들은 믿음과 겪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가르친다'는 말을 군사 훈련으로 읽으면 본문을 놓칩니다. 가나안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었고, 여호와의 전쟁은 역설적으로 사람의 전쟁을 부정합니다. 그 전쟁에서 요구된 것은 병력이 아니라 순종이었고, 무기가 아니라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새 세대에게 그 사실을 몸으로 알게 하시려고 그들 곁에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남겨 두셨습니다. 가나안은 군사 훈련장이기 전에 신앙 훈련장이었습니다. 3절이 열거하는 네 무리가 이스라엘의 남서쪽과 남동쪽과 북서쪽과 북동쪽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의 다섯 군주는 사사 시대 초기에 존재하던 세력이 아니었으니, 이 명단은 특정한 한 시점의 지도가 아니라 사사 시대 전체를 통틀어 이스라엘을 흔든 세력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목록입니다. 곧 이 시험은 한 학기짜리가 아니라 한 시대에 걸친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광야로 이끌리신 그분도 시험을 면제받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말씀으로 서셨습니다.

.

우리는 신앙생활을 문제가 사라지는 과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고 빚이 정리되고 관계가 풀리고 자녀가 잘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일부러 남겨 두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신앙의 실패로 여기는 정서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낫지 않은 이들이 교회에서 마음 편히 앉아 있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문제가 곧 버림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내 앞에 남아 있는 것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몇 년째 그대로인 몸의 통증, 여전히 어려운 그 사람, 매달 되풀이되는 재정의 압박,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한 번만 다르게 물어보십시오. "주님, 이것을 남겨 두신 이유가 있습니까. 이 앞에서 제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는 문제를 없애 달라는 기도 한 가지에 문제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한 가지를 나란히 얹어 보십시다. 가시를 뽑아 달라는 기도와 가시 곁에서 살아갈 힘을 달라는 기도는 함께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

# 4-6절 함께 살다가 닮아 가는 자리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와 한 상에 앉는지까지 보시는, 삶 전체의 주인이십니다.

4절은 시험의 내용을 분명히 밝힙니다.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삿 3:4). 그리고 5절과 6절이 그 시험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로 끝납니다. 시험은 있었고, 결과는 낙제였습니다.

.

5절의 '가운데에 거주하면서'라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원문의 표현은 '~의 한복판에'라는 뜻을 지닙니다. 처음에 가나안은 밖에 있는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그 한복판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밖에 있던 것이 안으로 들어오면 관계의 성격도 바뀝니다. 경계하던 대상이 이웃이 되고, 이웃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사돈이 됩니다. 6절이 보고하는 통혼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5절의 자리 이동이 낳은 자연스러운 결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조심스레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문제 삼는 통혼은 혈통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그 증거가 6절 마지막에 있습니다.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화자는 결혼 자체를 고발하는 대신 그 결혼이 도착한 종착지를 고발합니다. 실제로 사사기의 첫 사사 옷니엘은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 가문 출신이 아니었지만 유다 지파의 딸과 결혼하여 언약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문제는 어느 집안에서 왔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예배하느냐였습니다.

그래서 이 단락은 타협의 순서를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함께 살고, 익숙해지고, 부러워하고, 마침내 닮아 갑니다. 처음에는 공존처럼 보이지만 끝에는 정체성의 상실로 갑니다. 무너짐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배교의 형태로 오지 않고, 매일 조금씩 물러서는 편의의 형태로 옵니다. 하나님이 정말 시험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전투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별됨이었습니다. 4절에서 '시험하사'로 옮겨진 히브리어 '나사'는 여기서 무엇인가를 조사하여 검증한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2장 22절이 하나님께서 검증을 위해 이방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사실까지 말했다면, 3장 4절은 그 검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의 여부입니다. 그 명령의 범위는 넓게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 전체이고, 좁게는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하지 말라 하신 그 말씀입니다(신 7:3-4).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시는 대신, 세상 한복판에서 구별되어 살게 하십니다.

.

한국 교회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도 박해가 아니라 동화입니다. 우리는 교회 밖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회가 세상과 너무 닮아 버려서 세상이 교회를 찾을 이유를 잃었습니다. 성공의 기준, 자녀 교육의 기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교회 안팎에서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그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부러움은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나침반입니다. 우리 아이가 저 집 아이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 교회가 저 교회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 내 노후가 저 사람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 안에 이미 내가 섬기는 신이 들어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는 우리 가정의 식탁에서 하나님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십시다. 신앙은 예배당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식탁과 거실과 일터에서 지켜집니다. 자녀에게 물려줄 가장 큰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우리 집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

# 7-8절 잊어버린 백성, 팔려 간 자유

하나님은 잊혀지고도 잊지 않으시며, 진노 가운데서도 언약을 거두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 3:7). 이어 8절이 그 결과를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두 절 안에 '섬기다'가 두 번 나옵니다. 앞의 섬김은 우상을 향한 것이고, 뒤의 섬김은 압제자를 향한 것입니다.

.

7절에는 2장 11절에 없던 말이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입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이 표현은 여기에만 나옵니다. 잊었다는 것은 기억이 흐려졌다는 뜻이 아니라 관계에서 지워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잊히지 않으시려고 온갖 장치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막절이 그것이고, 성막과 제사가 그것이며, 문설주에 새기라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장치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가 잊었습니다. 기억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고, 의도적으로 물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끊어집니다.

그다음 낱말이 무섭습니다. '파셨으므로'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파신다는 표현은 노예 시장의 언어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다시 종이 되었습니다. 8절 원문에서 진노를 묘사하는 표현은 '여호와의 코가 이스라엘을 향해 뜨거워졌다'입니다. 화가 난 사람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콧김이 뜨거워지는 모습을 그대로 옮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쓰인 전치사는 '~에게'가 아니라 '~을 대항하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반대편에 서신 것입니다. 승리를 주시던 그 손이 이제 그들을 넘기는 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락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음 친 나라는 하나님이 시험의 도구로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 두 강 사이에서 온 아람의 왕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워야 할 상대와 사돈이 되어 버렸으니 그쪽에서는 더 이상 긴장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훨씬 먼 곳에서 채찍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만의 신이 아니라 온 열방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노는 언약을 파기하는 진노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 내리는 징계였습니다. 버리시는 손이 아니라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손이었습니다.

.

오늘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위기도 박해가 아니라 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삶의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일정을 짤 때, 돈을 쓸 때, 진로를 정할 때 하나님이 거론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잊어버림입니다. 그리고 잊어버림의 대가는 늘 자유의 상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주인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내 삶에서 '팔 년'이 되어 버린 자리가 어디인지 살펴보십시오.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래 섬기고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습관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 가운데 잊고 지낸 것 하나를 꺼내어 적어 보십시다. 그리고 그것을 가족에게 소리 내어 이야기해 주십시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은 우리의 결론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하나님입니다. 이야기되지 않은 은혜는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합니다.

*

# 9-11절 부르짖음과 한 구원자

하나님은 잘 다듬어진 회개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고통의 소리에 먼저 반응하여 구원자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 3:9). 10절은 그가 어떻게 이겼는지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고,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대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11절이 이야기를 닫습니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

9절의 '부르짖으매'로 옮겨진 히브리어 '자아크'는 정돈된 기도가 아니라 크게 소리 지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에는 회개라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점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간절한 회개가 구원을 얻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압제의 고통에 반응하여 구원자를 세우신 것으로 읽는 편이 사사기 전체의 맥락에 더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본문 어디에도 그들이 무엇을 뉘우쳤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적혀 있는 것은 그들이 아팠다는 사실뿐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

그다음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이 첫 사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를 만났습니다. 사사기 1장에서 기럇 세벨을 점령하고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통혼이 배교로 이어지던 바로 그 시대에, 언약 백성 안에서 정통성 있게 결혼한 사람이 첫 사사로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급히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준비된 사람을 그때 꺼내어 쓰십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꿰고 있는 낱말은 '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고, 그들이 부르짖자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넘겨 주셨으며, 마침내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겼습니다. 손이 바뀌는 그 모든 과정의 주어는 한 번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승리도 패배도 여호와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옷니엘의 마지막은 더없이 담백합니다. 묻힌 곳도 자녀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남길 만한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이 사람이야말로 사사기가 제시하는 모범입니다. 다만 그도 죽었습니다. 사십 년의 평온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만의 평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죽지 않는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그 기다림의 끝입니다.

.

기도할 힘조차 없다고 느끼는 분들께 이 본문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옷니엘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이 회개를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아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의 자격을 먼저 갖추려고 합니다. 죄를 다 정리하고, 마음을 다 다잡고, 문장을 다 고르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듬어진 문장보다 앞서 신음을 들으십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더 화려한 기도가 아니라,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낼 수 있는 정직함입니다.

그리고 옷니엘의 자리를 우리 자신에게 옮겨 보십시오. 그는 특출한 재능으로 뽑힌 사람이 아니라 오래 순종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갑작스러운 기적보다 오래된 믿음 위에서 시작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는 작은 순종은 지금 아무 표시도 나지 않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펴는 일, 미운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를 정리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오래된 순종을 기억하셨다가 한 시대를 살릴 사람으로 꺼내어 쓰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준비되고 있는 이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서로를 그 눈으로 보아 주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그 눈으로 보십시다.

*

# 거둠의 기도

주님,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들 앞에서

우리는 자주 낙심했습니다.

왜 아직도 남아 있느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그것이 버려두심이 아니라

가르치심일 수 있음을

오늘 말씀 앞에서 배웁니다.

남겨 두신 것 앞에서

주님을 알아 가게 하옵소서.

.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함께 살다가

익숙해지고

부러워하다가

닮아 갔습니다.

싸워야 할 것과 사돈이 되고

경계해야 할 것을 이웃으로 삼았습니다.

세상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세상 한복판에서

구별되어 살게 하옵소서.

.

잊혀지신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일정을 짤 때에도

돈을 쓸 때에도

길을 고를 때에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잊어버림이 곧 잃어버림인 줄

이제야 압니다.

기억하게 하옵소서.

.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의 부르짖음은

잘 다듬어진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파서 지른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소리에 먼저 응답하셨습니다.

오늘도 문장이 되지 못한 신음을

그대로 들어 주시고

자격을 갖추기 전에

먼저 달려와 주옵소서.

.

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오래된 순종을 쌓아 가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의 신실함이

한 시대를 살리는 씨앗이 되게 하옵소서.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사사가 없는 날에도

주의 도를 지켜 행하게 하시고

죽지 않으시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60 사사기 04:01-10 철 병거 스무 해, 종려나무 아래에서 일어선 사람 new 평화의길벗 2026.09.07 11
1259 사사기 03:12-31 오른손이 묶인 사람, 소 모는 막대기 평화의길벗 2026.09.06 24
» 사사기 03:01-11 남겨 두신 가나안, 세워 주신 구원자 평화의길벗 2026.09.05 20
1257 사사기 02:11-23 돌아서는 발, 돌이키시는 마음 평화의길벗 2026.09.04 28
1256 사사기 02:01-10 울고도 헐지 않은 제단, 물려주고도 잊힌 이름 평화의길벗 2026.09.03 29
1255 사사기 01:22-36 벧엘이라 부르고 루스를 남기다 평화의길벗 2026.09.02 33
1254 사사기 01:11-21 샘을 구한 손, 철 병거 앞에 멈춘 발 평화의길벗 2026.09.01 24
1253 사사기 01:01-10 먼저 여쭈운 입, 가나안을 닮은 손 평화의길벗 2026.08.31 33
1252 이사야 39:01-08 창고를 열어 보인 왕 평화의길벗 2026.08.30 40
1251 이사야 38:01-22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 평화의길벗 2026.08.29 56
1250 이사야 37:21-38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이다 평화의길벗 2026.08.28 52
1249 이사야 37:1-20 여호와 앞에 그 글을 펴 놓고 평화의길벗 2026.08.27 63
1248 이사야 36:01-22 잠잠함이 대답이 되는 자리 평화의길벗 2026.08.26 46
1247 이사야 35:01-10 광야에 난 거룩한 길 평화의길벗 2026.08.25 42
1246 이사야 34:01-17 여호와의 책에 적힌 대로 평화의길벗 2026.08.24 59
1245 이사야 33:01-24 소멸하는 불 곁에 사는 사람들 평화의길벗 2026.08.23 55
1244 이사야 32:01-20 정의와 공의가 거하는 땅 평화의길벗 2026.08.22 65
1243 이사야 31:01-9 내려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평화의길벗 2026.08.21 55
1242 이사야 30:18-33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뒤에서 들리는 음성 평화의길벗 2026.08.20 52
1241 이사야 30:1-17 내려가는 길과 돌이키는 길 평화의길벗 2026.08.19 7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63 Next
/ 6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