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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7:21-38 아래로 뿌리, 위로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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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위로 높아지려는 안간힘을 내려놓고, 먼저 아래로 깊어지는 것을 택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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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끝자락, 들녘이 조용히 무거워지는 계절입니다. 처서를 지난 바람은 한결 순해졌고, 논마다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습니다. 곡식이 여무는 것은 잎이 무성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가 여름내 제 일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고개 숙인 이삭을 보고 감탄하지만, 정작 그 이삭을 채운 것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길을 더듬던 잔뿌리들이었습니다. 보이는 성취는 더디고 보이지 않는 수고만 쌓여 가는 것 같은 나날을 견디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애쓴 만큼 열매가 잡히지 않아 마음이 조려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늦여름의 문턱에서 저마다의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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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어제 함께 읽었던 그 기도, 협박의 편지를 성전 바닥에 펴 놓았던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응답은 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사 37:21). 기도가 하늘에 접수되었다는 통지서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의 한복판에 뜻밖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천군만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농사 이야기, 곡식과 포도나무와 뿌리의 이야기입니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밤에 하나님은 왜 하필 밭의 언어로 말씀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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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가 유다의 성읍들을 거의 다 삼키고 예루살렘을 새장에 갇힌 새처럼 에워싼 때였습니다. 당대의 문서들조차 그렇게 기록할 만큼, 작은 도성 하나가 세계 제국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 있던 형국이었습니다. 세상의 셈법으로는 이미 끝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세상의 셈법을 위에서부터 뒤집습니다. 포위된 성이 도리어 정복자를 향해 머리를 흔들며 웃으리라는 것입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리라, 네가 능욕한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라는 선언이 제국의 왕에게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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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산헤립의 화려한 정복사를 한 장의 풀 그림으로 요약하십니다. 그가 무너뜨린 성읍의 주민들이 "지붕의 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사 37:27). 지붕 위의 풀은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자라지만, 흙이 얕아 해가 뜨면 제일 먼저 마릅니다. 높이 올라갔다는 사실이 곧 뿌리 없음의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정복자 자신에게는 이런 판결이 내려집니다.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사 37:29). 포로들의 코에 쇠고리를 꿰어 끌고 다니던 제국의 왕이, 이제 짐승처럼 꿰여 왔던 길로 끌려 돌아갑니다. 스스로 높아진 것은 끝내 이렇게 낮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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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심판의 선언 다음에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얼굴을 돌려 작은 징조 하나를 건네십니다.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사 37:30). 전쟁으로 파종을 놓친 땅에서 두 해 동안은 심지 않은 곡식이 저절로 자라 백성을 먹이고, 셋째 해부터 다시 농사가 시작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래 멈추어 섰습니다. 하늘의 불이나 기이한 표적이 아니라, 심지 않은 해의 양식이 징조라는 것. 사람의 수고가 끊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차려 주시는 두 해의 식탁으로,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임을 몸으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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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본문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이어집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사 37:31).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신 생존의 문법이 나무의 문법입니다. 먼저 위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자라는 풀이 가장 깊은 뿌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어두운 땅속을 더듬어 내려가는 그 보이지 않는 안간힘이 사막의 생명을 지탱합니다. 지붕 위의 풀과 사막의 풀, 같은 풀이어도 운명이 갈리는 것은 높이가 아니라 깊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회복의 주어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그분의 열심이 열매를 맺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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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에서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노래했습니다. 진창 같은 이 땅일망정 도망가지 않고 여기에 거대한 뿌리를 박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남은 자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폐허가 된 땅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 다시 뿌리를 내리는 사람. 전쟁이 할퀴고 간 그 흙이 부끄럽고 아파도, 하나님의 약속이 그 흙 아래 수맥처럼 흐르고 있음을 믿는 사람. 우리의 믿음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편이 나아지면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흙에, 이 상처 많은 교회와 이 어지러운 시대의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는 것 말입니다. 옮겨 심을 좋은 화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에는 어떤 나무도 자라지 못합니다. 뿌리는 언제나 지금 서 있는 그 흙에서만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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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그 밤으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이 성에 화살 하나 쏘지 못한 채 돌아갔고, 여호와의 사자가 하룻밤에 십팔만 오천의 군대를 쳤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사 37:35).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은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하다가 아들들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왕은 살고, 신전에서 경배하던 왕은 죽었습니다. 어디에 엎드리는가, 무엇에 뿌리를 대고 있는가가 끝내 생사를 갈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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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는 수치가 줄어드는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자리가 비어 가고 다음 세대가 얇아진다는 소식 앞에서, 우리는 자꾸 지붕 위의 풀의 방식, 곧 더 높이 더 화려하게 보이려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기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처방은 반대입니다. 심지 못하는 두 해를 은혜의 식탁으로 받아들이고, 그 시간에 아래로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새벽의 묵상, 골방의 기도, 이름 없는 섬김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뿌리의 일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성취가 멈춘 것 같은 시간, 병상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이 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뿌리의 계절인지 모릅니다. 그 계절에 우리가 할 일은 자책이 아니라, 심지 않은 자리에서도 먹이시는 그 손을 세어 보며 더 깊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우리 역시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둔 양식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은혜를 세어 보는 사람만이 조급함을 이기고 다시 아래로 내려갈 용기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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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들녘의 이삭들은 남은 볕을 받아 마저 여물어 갈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여름내 해 온 일을, 가을은 열매로 증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 오르라는 세상의 재촉 속에서도 먼저 아래로 깊어지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리는 눈물의 뿌리 위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반드시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아래로는 더 깊은 신뢰에 닿고 위로는 더 넉넉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 가을 문턱의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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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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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WtAPvsmIz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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