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5:1-18 내려가는 사람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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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내려오신 그 골짜기로 나도 내려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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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아침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광양 들녘에는 벼가 익어 가는 냄새가 번지고,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는 서늘한 결이 섞였습니다. 여름내 높은 데서 울던 매미 소리가 그치고, 이제는 땅으로 내려앉는 소리들의 계절입니다. 그 낮아지는 계절 앞에 앉으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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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야엘의 장막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같은 사건을 다시 읽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산문이 아니라 노래입니다.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삿 5:1). 사사기는 굳이 같은 일을 두 번 적습니다. 산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한다면, 노래는 그 일을 누가 하셨는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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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는 승리한 바로 그 날 노래를 지었습니다. 기억이 식기 전에 해석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은 오래 기억하고 은혜는 쉽게 잊습니다. 그래서 찬양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망각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노래하지 않으면 승리는 곧 사람의 공로가 되고, 은혜는 지난 이야기가 됩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비로소 그 일은 우리 안에 신앙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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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래의 첫 소절은 병거도 칼도 아닌 하늘을 향합니다.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삿 5:4). 세일과 에돔은 출애굽 백성이 지나온 땅입니다. 애굽을 치신 그분이 지금 비구름을 몰고 기손 강으로 달려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전쟁의 주인공은 바락도 드보라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세운 전략보다 먼저 하늘이 움직였고, 마른 강바닥에 비가 쏟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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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노래는 시제를 돌려 캄캄한 시절을 회상합니다. 대로가 비었고 사람들은 오솔길로 숨어 다녔으며, 마을 사람들이 그쳤습니다. 큰길이 막히자 상인의 왕래가 끊기고 마을과 마을이 갈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비참함의 뿌리를 노래는 한 마디로 짚습니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무너짐은 언제나 바깥에서 오는 것 같지만, 노래는 그 시작이 예배가 옮겨 간 자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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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일어섭니다.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삿 5:7). 구약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이곳에만 나옵니다. 정서적인 비유가 아니라 직무의 이름입니다. 자녀가 위험에 빠졌을 때 몸으로 막아서는 자리, 드보라는 스스로 그 자리에 섰습니다. 지도자가 없다고 한탄하던 시대에, 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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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그를 이렇게 깨웁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번이나 되풀이되는 이 말은 위험에 처한 아이가 잠든 어머니를 흔드는 소리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귀인이 내려오고 백성이 내려오고, 그다음에 놀라운 한 줄이 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삿 5:13). 하나님은 사람이 다 내려온 뒤 맨 마지막에 내려오십니다. 사람의 걸음을 기다려 그 걸음을 당신의 전쟁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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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도 그런 기다림 위에 서 있습니다. 성경을 편다고 곧바로 하늘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어떤 아침에는 한 절이 그저 활자로만 보이고, 마음은 끝내 미지근한 채로 하루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오늘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의 걸음을 하나님은 헛되이 두지 않으십니다.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씹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 그 작은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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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두가 내려간 것은 아닙니다. 노래는 명단을 남깁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잇사갈은 바락을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반면 르우벤은 시냇가에서 큰 결심만 했습니다. 개역개정의 이 말은 원문으로 보면 결심이 아니라 끝없는 망설임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단은 배 위에, 아셀은 해변 항만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붙은 동사는 하나같이 앉다와 거주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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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비난받을 일도 칭찬받을 일도 하지 않은 채 살다 간 무리를 지옥의 문 앞에 세워 둡니다. 자비도 정의도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악을 행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거기 있다는 점입니다. 르우벤은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회의를 오래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형제들은 이미 진창으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서 중립이라는 자리는 없습니다. 형제의 고통이 내 고통이 아닐 때, 믿음은 조용히 사적인 안위로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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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교회도 저마다의 항만에 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의 사정과 우리 세대의 관심만으로도 하루가 벅찹니다. 그러는 동안 이웃의 신음은 요단 강 저쪽 일이 됩니다. 그러나 방관은 중립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반대했는지가 아니라, 형제가 골짜기로 내려갈 때 우리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기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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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도 지금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병상에 누운 성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이웃, 말없이 무너져 가는 가정입니다. 그 이름을 오늘 아침 성경 여백에 한 줄로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 안에 전화 한 통이나 밥 한 끼로 그 골짜기에 함께 내려가 보십시오. 묵상이 손끝에 닿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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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으로 내려앉는 소리들의 계절에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하루 이 물음 하나만 들고 걸어가 보십시오. 나는 앉아 있는 사람인가, 내려가는 사람인가. 먼저 내려오신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낮은 데로 걸어가는, 그런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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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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