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50-58 닻을 내리는 사람들
.
참된 신앙이란, 육체는 썩어 없어질 무가치한 것이라며 부활을 조롱하던 헬라 철학의 허무주의를 직시하고,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에 오늘 나의 삶을 단단히 묶어내는 거룩한 소망을 통해, 죽음 앞에 스러질 것 같은 우리의 남루한 수고조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헛되지 않은 영광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주님의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
온 대지를 흠뻑 적시는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지는 날이 있습니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언젠가 우리 인생도 이처럼 죽음과 세월의 거센 물결 앞에 형체 없이 씻겨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허무감이 밀려오곤 합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수고하면서도 "내 인생의 끝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라며 남몰래 한숨짓는 마음,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현실 속에서 짙은 회의를 안고 진리의 길을 묻는 물음, 그 모든 심령에 사망의 권세를 삼키시고 영원한 생명의 아침을 여신 부활하신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늘 눈에 보이는 성취만이 전부라며, 늙고 쇠락하여 결국 흙으로 돌아갈 육신과 이 땅의 수고는 죽음과 함께 완벽한 무(無)로 돌아갈 뿐이라고 속삭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장엄한 피날레는 바로 이 무서운 허무주의와 정면으로 맞섭니다. 1세기 고린도를 지배하던 헬라 철학은 영혼만을 고귀하게 여겼고 물질과 육체는 썩어버릴 악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이진섭 교수의 통찰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뼈대는 바로 이 이원론에 깊이 물들어 몸의 부활을 부인하거나 비웃던 교인들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바울의 복음은 그들에게 어리석은 농담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
이에 바울은 부인할 수 없는 명제를 먼저 던집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뼈아픈 인정입니다. 우리의 타락하고 쇠락해 가는 현재의 육신 그대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절망에 머물지 않고 찬란한 비밀의 문을 활짝 엽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을 가차 없이 내다 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볼품없는 씨앗이 땅에 묻혀 영광스러운 형체로 피어나듯, 우리의 비루하고 연약한 육신조차 창조주 하나님의 맹렬한 은총의 숨결 속에서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황홀하게 덧입혀진다는 경이로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 압도적인 은혜 앞에서 바울은 사망을 향해 당당히 호통을 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그런데 바울의 선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고백이 뒤따릅니다. 더 완벽한 도덕적 행위와 헌신의 실적을 쌓아야만 하나님이 사망을 이길 자격을 주실 것이라는 율법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지쳐 있는 이들에게,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망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켜내어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닙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맹렬하고도 다사로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조롱하며 방종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그 오만하고 비루한 바닥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망의 늪 한복판에 찾아오시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적나라한 일상조차 너른 품으로 덮어 안으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입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
그렇다면 이 승리의 선포는 우리의 오늘과 어떻게 이어집니까. 바울의 결론은 뜻밖에도 단단하고 실제적입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해를 감수하며 땀 흘린 모든 수고는 헛것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남루한 일상 속에서 행한 작은 사랑의 수고 하나조차 결코 증발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짓는 벽돌로 남게 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이라는 궁극적인 것이 성취되었기에, 비로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일상이라는 궁극 이전의 것이 무의미한 허무가 아니라 숭고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통찰했습니다. 부활이 오늘을 살리는 것입니다.
.
이 진리를 우리의 삶에 실제로 닿게 하는 영적 호흡이 바로 묵상입니다. 정성국 교수는 묵상을 가리켜 약속이라고 명명합니다. 참된 묵상이란 옛날의 성경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사변적 유희나 도덕적 교훈을 찾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그 영광스러운 미래의 약속에 오늘 나의 현실을 굳게 매어 두는 영적 닻 내리기입니다. 이 약속의 묵상에 고요히 엎드릴 때, 우리는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내 맘대로 살자는 쾌락과 허무의 유혹을 물리치고, 기어코 다시 일어서서 내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며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을 내미는 거룩한 흔들리지 않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
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작은 배가 깊은 바다 밑바닥에 던져 내리는 닻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허무주의는 눈앞에 몰아치는 시퍼런 사망의 파도와 비바람만을 바라보며 닻을 올리고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자고 부추깁니다. 풍랑이는 수면만 보면 우리의 수고는 참으로 헛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장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풍랑 속에 휩쓸려 사라질 가벼운 돛단배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다의 풍랑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원하고 견고한 바다 밑바닥,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승리의 반석을 이미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거두고 부활의 약속을 향해 믿음의 닻을 깊이 내려 꽂을 때, 겉으로는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낡아가는 듯 보이는 우리의 고단한 일상조차 결코 헛되이 떠내려가지 않으며, 마침내 폭풍우가 걷힌 부활의 아침,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눈부신 항구에 안전하고도 찬연하게 정박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눈에 보이는 성취와 육신만이 전부라며 영원을 지워버리려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내 힘으로 인생의 허무를 잊어보려던 그 피곤하고 서늘한 몸부림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미래의 약속에 나의 오늘을 묶어내는 깊은 묵상의 자리에 엎드리십시오. 부활의 닻을 깊이 내린 사람은 흔들리되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남루한 수고는, 세상이 아무리 헛되다 손가락질해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단단한 벽돌로 쌓여가고 있습니다.
.
내게 조건 없이 승리를 주신 그 십자가의 넉넉한 은혜에 잇대어, 곁에 있는 약하고 슬픈 이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헛되지 않은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로 듣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