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12-31 절뚝거리는 몸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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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쓸모와 능력을 저울질하여 타인을 배제하고 획일화하려는 세상의 매정한 우월주의를 거부하고, 내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타자의 슬픔과 고통이라는 다양한 삶의 차원 속으로 나를 던져 넣는 영적 연대를 통해, 아무런 자격 없고 상처 입은 우리의 비루한 모습조차 기어코 그리스도의 몸을 살려내는 가장 요긴한 통로로 덮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눈부신 은혜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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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장마를 앞두고 온 대지가 짙고 깊은 녹음 속으로 고요히 침잠해 들어가는 날입니다. 비바람을 견뎌내는 거대한 숲은 결코 키가 크고 곧게 뻗은 잘난 나무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발치에서 이름 없이 엎드린 이끼와 뒤틀린 덩굴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각자의 연약함을 품고 다정하게 얽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숲은 온전한 생명을 호흡합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쓸모와 능력을 증명해 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팍팍한 세상의 강박에 지쳐 남몰래 한숨짓는 이들, 그리고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내 모습 때문에 깊은 회의와 소외감을 안고 진리의 길을 묻는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약함조차 가장 고귀한 것으로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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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의 능력에 등급을 매기고, 효율성과 쓸모를 잣대 삼아 사람을 줄 세웁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12장의 풍경은, 십자가의 은혜로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마저 세속의 성공 논리에 물들어 어떻게 서로를 차별하고 배제했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참 많은 영적 선물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사를 공동체를 섬기는 도구로 쓰지 않고,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계급장으로 변질시켰습니다. 화려한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스스로를 교회의 눈이나 머리라 자부하며 교만해졌고,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향해 "나는 네가 쓸데가 없다"(고전 12:21)며 서늘한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획일주의와 우월주의를 빼닮은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유행하는 단 하나의 성공 방식, 교회 안에서 박수받는 특정한 헌신의 모습만을 정답으로 세워놓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폭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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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이 차가운 효율성의 논리를 단호히 전복시킵니다.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그것이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 12:22-23). 이 선포를 이해하는 데 엄지발가락의 비유만큼 생생한 것이 없습니다. 길을 걷다 돌부리에 엄지발가락을 심하게 부딪혔을 때, 우리는 결코 그 아픈 발가락을 쓸모없다며 함부로 땅에 내딛지 않습니다. 온몸이 그 작은 발가락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절뚝거리며 걷는 불편을 감수합니다.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 것(고전 12:26), 가장 연약한 지체의 아픔이 온몸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지닌 숭고하고도 눈물겨운 신비입니다. 세상은 약한 것을 도태시키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약하고 볼품없는 지체를 공동체의 중심에 모십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가진 직분이나 종교적 성취, 세상의 스펙을 은근히 과시하며 곁에 있는 이들에게 "나는 당신이 필요 없어"라는 무언의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내세울 만한 능력이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이 몸에 붙어 있을 자격이 없는 초라한 사람이야"라며 짙은 자괴감 속에 홀로 웅크려 있는 분이 계십니까? 더 탁월하고 무결점의 쓸모를 증명해 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율법의 무거운 짐에 지쳐 있지는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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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능력을 과시하여 타인을 누르려는 세속의 낡은 관성을 꺾고, 기꺼이 절뚝거리는 연약한 몸의 신비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갈파합니다. "기독교는 우리를 삶의 다양한 차원으로 던져 넣는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다." 참된 묵상이란 조용한 골방에 앉아 나 혼자만의 내면적 평안이나 영적 엘리트주의를 획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술적이고 매정한 획일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여, 이웃의 상처와 고통이라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차원 속으로 내 존재를 기꺼이 투신하는 치열한 영적 몸부림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쓸모없는 자들을 잘라내고 나 홀로 우월해지려는 이기적인 질주를 멈추고, 상처 입고 우는 형제를 위해 기꺼이 내 삶의 보폭을 줄여 함께 절뚝거리는 위대한 사랑의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이제 내 힘으로 인생의 화려함을 입증하고 자격을 증명하려던 그 피곤하고 서늘한 칼날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모든 영광과 지혜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가장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지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찢기고 상처 입은 우리의 비루함을 남김없이 끌어안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뛰어난 효율성과 능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흠집 많고 아름답지 못한 우리의 적나라한 일상조차 너른 품으로 덮어 안으시어, 기어코 당신의 거룩한 몸을 세우는 가장 요긴하고 귀중한 존재로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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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제주도의 들판을 구불구불 이어가는 밭담을 쌓아 올리는 과정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획일주의와 우월감은 규격에 맞게 반듯하게 깎인 벽돌만을 최고로 여기며, 조금이라도 모나고 울퉁불퉁한 돌은 가차 없이 내다 버린 후 시멘트로 빈틈없이 발라버려야 완벽한 담이 된다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나 위대한 건축자이신 성령님은 시멘트라는 강제의 틀을 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제각기 다르게 생기고 모난 우리의 그 연약하고 볼품없는 돌멩이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얼기설기 기대어 쌓아 올리십니다. 세상의 눈에는 돌과 돌 사이의 숭숭 뚫린 빈틈이 치명적인 결함처럼 보이지만, 거센 태풍이 몰아칠 때 반듯한 시멘트 담장은 꺾여 무너져도 제주의 밭담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 볼품없는 빈틈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유연하게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잘남을 과시하려는 헛된 시도를 멈추고 서로의 연약함에 기꺼이 몸을 기댈 때, 비로소 우리의 그 텅 빈 상처와 부족함은 세상을 휩쓰는 절망의 광풍을 넉넉히 흘려보내며 전체를 살려내는 가장 경이롭고 견고한 은혜의 성벽으로 눈부시게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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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운이 무르익는 이 눈부신 유월, 능력을 척도 삼아 사람을 차별하고 획일화하려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우는 자들의 고통 속으로 나를 던져 넣는 거룩한 투신의 묵상 자리에 엎드리며, 내 연약함을 덮어주신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약한 이들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고 함께 절뚝거려 주는 참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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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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