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2-16 헛된 열광을 덮는 사랑의 수건
참된 신앙이란, 영적인 해방감을 앞세워 타인의 수치심을 외면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함부로 허물어뜨리려던 이기적인 열광주의를 직시하고, 낯선 시공간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타자의 처지에 깊이 연결되는 공감으로서의 묵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될 우리의 허물을 십자가의 넉넉한 수건으로 덮어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은총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의탁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맹렬하게 쏟아지던 초여름의 뙤약볕을 짙은 구름이 살며시 덮어주며, 대지 위에 모처럼 서늘하고 다사로운 그늘을 내어주는 날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강렬한 빛보다, 때로는 무언가를 부드럽게 덮어주는 장막이 여린 생명들을 숨 쉬게 한다는 자연의 신비를 마주하게 됩니다. 내 허물이 세상에 발가벗겨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고 팍팍한 세상의 시선 앞에서 짙은 회의를 안고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남루함조차 그리스도의 의의 겉옷으로 덮어 안으시는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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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내가 획득한 지식이나 자유가 있다면 타인의 감정이야 어찌 되든 한계 없이 그것을 표출하고 과시하는 것을 당당한 능력이라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11장 전반부의 풍경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자칫 가부장적인 억압으로 오해받기 쉬운 여성의 수건 착용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린도 교회를 둘러싼 1세기 헬라 사회의 역사적 정황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후 일종의 열광주의에 빠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안에서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영적 해방감에 심취한 나머지, 공중 예배에서 기도나 예언을 할 때 여성들이 쓰던 수건을 벗어 던지는 파격적인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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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헬라 사회에서 여성이 머리에 수건, 곧 칼림마(κάλυμμα)를 쓴다는 것은 단지 억압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의 권세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질서이자 명예의 표시였습니다. 반면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이방 신전의 성창들과 같은 부도덕한 자들로 오인받거나, 깊은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자유를 과시하기 위해 수건을 벗어 던졌지만, 그 행동은 곁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충격을 주었고, 거룩해야 할 예배의 질서를 무너뜨려 공동체를 분열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라고 엄중하게 권면한 것은, 결코 여성을 억압하려는 폭력적 규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정서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알량한 영적 체험만을 절대화하여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거짓 자유에 대한 서늘한 경고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고 갈파했습니다. 참된 윤리는 나의 팽창하는 자유를 멈추고 타자의 취약함을 무한히 책임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지혜는 나의 영적 우월감을 뽐내기 위해 전통의 경계를 함부로 허물고 형제를 불편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어주기 위해,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파격적인 영적 자유조차 스스로 제한하며 기꺼이 사랑의 수건을 다시 머리에 쓰는 거룩한 자기 비움, 그것이 십자가의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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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자유만을 주장하는 이기적인 열광을 잠재우고, 타인의 마음을 다정하게 덮어주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참된 성경 묵상은 고대의 문자를 오늘날 나의 필요에 맞게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에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 요구됩니다. 성경 본문이 처음 기록되던 당시 형편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와 사람들의 세계관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는 일입니다. 열광적인 몇몇 사람들의 돌출 행동 때문에 깊은 수치심과 혼란을 느끼며 상처받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곤혹스러움, 그리고 그 공동체가 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편지를 썼던 바울의 애타는 심정에 깊이 진입해 들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공감으로서의 묵상입니다. 이 거룩한 공감의 묵상에 고요히 머물 때, 우리는 내 감정과 내 자유만이 중요하다는 옹졸한 울타리를 부수고, 비로소 내 곁의 연약한 이웃을 배려하고 덮어주는 넉넉한 샬롬의 백성으로 빚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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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영적인 체험이나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 누군가가 소중히 여기는 경계나 감정을 무례하게 침범하며 짙은 갈등과 피로감을 만들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세상의 날 선 평가와 시선 앞에서 나의 흠집과 부끄러운 과거가 발가벗겨질까 두려워, 깊은 회의와 위축감의 그늘에 홀로 앉아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자유롭고 완벽한 영적 경지에 도달하여 내 의로움을 입증해야만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실 것이라는 무거운 율법의 강박에 지쳐 계신가요? 이제 내 힘으로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려던 그 피곤하고 날카로운 해방의 몸짓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이기적인 열광에 취해 질서를 허물고 타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던 고린도 교인들의 그 얕은 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이 세상의 법정 앞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심판받아야 마땅한 순간에, 우리를 발가벗겨 꾸짖는 대신 당신의 찢기신 살과 보혈이라는 가장 고귀한 은총의 수건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남김없이 덮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참된 자유는 우리가 얼마나 거칠 것 없이 내 권리를 주장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남루하고 수치스러운 우리의 일상조차 정죄의 빛 아래 폭로하지 않으시고, 끝없는 자비의 장막으로 포근히 덮어 기어코 거룩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사랑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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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위태로운 지구를 둥글게 감싸 안고 있는 대기권의 포근한 장막과 같습니다. 대기권이라는 덮개가 없는 우주 공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극저온의 추위와 치명적인 우주 방사선이 적나라하게 쏟아지는 혹독한 죽음의 공간입니다. 세상은 거추장스러운 대기권, 곧 질서와 배려의 수건을 걷어내고 한계 없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능력이요 지혜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덮개 없는 위험한 진공 상태로 내몰지 않으십니다. 쏟아지는 자외선과 같은 정죄의 율법을 차단하고 날아오는 운석과 같은 세상의 폭력과 수치를 기어코 태워버려 생명을 지켜내는 저 얇지만 견고한 대기권처럼, 주님은 십자가라는 거룩하고 다사로운 은총의 수건으로 우리의 헐벗은 영혼을 완벽하게 덮어 주십니다. 우리가 알량한 내 자유를 뽐내려 덮개를 벗어 던지는 헛된 오만을 멈출 때, 타자의 처지에 공감하는 묵상 앞에 엎드릴 때, 마침내 우리는 형제의 수치와 연약함을 기꺼이 가려주며 온 공동체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숨 쉬게 하는 가장 눈부시고 경이로운 생명의 장막으로 새롭게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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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영적 지식으로 나의 우월함을 뽐내어 이웃을 찌르는 세상의 무례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낯선 이들의 아픔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공감의 묵상 자리에 엎드리며, 내 허물을 덮어주신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에 잇대어 곁에 있는 이들의 부끄러움을 다정하게 가려주는 참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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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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