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35-49 흙에서 하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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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육체는 무가치하다며 몸의 부활을 조롱하던 헬라 철학의 오만한 이원론을 직시하고, 내 익숙한 생각을 제쳐 두고 텍스트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삶을 새롭게 읽어내는 거룩한 영적 비움을 통해, 병들고 쇠락해 가는 우리의 남루한 육신조차 기어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으로 눈부시게 빚어 주시는 하나님의 광대한 은총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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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 설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 가는 육신의 흔적을 마주하며, 유한한 인생의 무게에 남몰래 한숨짓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질병이 찾아오면, 한때 단단했던 우리의 몸은 한없이 약해지고 결국 한 줌의 흙으로 스러져 버릴 것이라는 서늘한 두려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이렇듯 피할 수 없는 육체의 한계와 고통 앞에서 "과연 내 삶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라며 깊은 회의와 상실감을 앓는 우리 모두의 심령에,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욕됨을 영광으로 덧입혀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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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15장 35절부터 49절의 풍경은, 육체를 혐오하거나 오해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절정인 몸의 부활을 어떻게 의심했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 회의의 한복판에 어떻게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 질서와 부활의 은총을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사상적 배경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짙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영혼은 선하고 고귀하지만 육체는 무가치하고 악하다는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구원이란 이 썩어질 육체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혼만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니 어떤 이들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물었던 것은 순수한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흉측한 시신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냐며 바울이 전한 부활의 복음을 우스꽝스럽게 조롱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육신의 젊음과 건강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 부추기며, 늙고 병든 육체는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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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 어리석은 교만을 향해 씨앗의 비유를 꺼내 듭니다. 농부가 땅에 뿌리는 씨앗은 장차 피어날 화려한 꽃이나 탐스러운 열매의 형체를 띠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참외씨를 심는다고 해서 흙 속에서 참외씨가 그대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싹이 트고 자라나 맺히는 참외는 원래 심겼던 씨앗과는 전혀 다른 형체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땅의 육체와 장차 얻게 될 부활의 몸 사이에는 엄청난 불연속성이 존재함을 강조합니다. 장엄한 선언은 계속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우리의 현재 몸은 상처받기 쉽고 질병에 무너지며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날, 하나님은 이 남루하고 썩어질 알맹이를 취하시어, 슬픔도 아픔도 없는 눈부시고 영광스러운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으로 완전히 새롭게 입혀 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수양이나 도덕적 노력으로 도달하는 경지가 아닙니다. 흙먼지 같은 우리의 존재를 긍휼히 여기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압도적이고도 맹렬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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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육체의 겉모습만 보고 생명의 끝을 재단하려는 세상의 얄팍한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의 경이로운 부활의 질서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박대영 목사는 참된 묵상이란 내 생각을 제쳐 두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삶과 자연과 세상을 읽어내는 치열한 과정이라고 통찰합니다. 세상은 썩어가는 씨앗을 보며 죽음과 끝이라고 선고하지만, 묵상은 내 좁은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고요히 내려놓고 그 죽음 너머에서 새로운 형체를 입히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현실을 다시 읽어내는 위대한 항복의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적 건강과 세상의 성취만이 축복이라 여기며, 병들고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며 짙은 우울과 절망감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더 훌륭한 종교적 업적과 도덕적 완전함을 내 힘으로 쟁취해야만 장차 하늘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율법의 무거운 강박에 짓눌려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낡은 육신에 절망하던 우리가 이 시선의 교정으로서의 묵상 자리에 엎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몸을 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나의 남은 생을 온전히 맡기는 참된 안식과 소망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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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 땅의 지식에 갇혀 부활을 조롱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얄팍하고 오만한 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가차 없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질병과 슬픔으로 얼룩진 우리의 이 비루한 육신 한복판에 찾아오시어, 친히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의 신령한 몸을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상처 많고 쇠락해 가는 신앙 여정은 펄펄 끓는 용광로 앞의 유리공과 한 줌의 모래의 관계와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잣대는 바닥에 뒹구는 거칠고 투박한 모래알을 바라보며 저렇게 보잘것없는 흙가루가 어떻게 아름다운 예술품이 될 수 있느냐며 비웃습니다. 모래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빛나는 보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이신 유리공, 곧 하나님은 그 볼품없는 모래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거친 모래를 십자가라는 극렬한 죽음의 용광로 속에 기꺼이 던져 넣어 녹이시고, 그 위에 성령의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십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영광을 얻으려던 헛된 몸부림을 멈추고 주님의 숨결이 불어오는 대로 내 영혼의 관을 고요히 내어 맡길 때, 비로소 흙먼지에 불과했던 우리의 남루한 존재는 세상의 어떤 보석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찬연한 빛을 머금은 가장 영광스럽고 투명한 하늘의 유리그릇으로 경이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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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이성의 잣대로 생명의 한계를 긋고 절망하려던 그 피곤하고 서늘한 세속의 철학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그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삶을 다시 읽어내는 깊은 묵상의 자리에 엎드리며, 나를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입혀 주실 그 부활의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연약하고 병든 이웃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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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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