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01-18 절망의 무덤가에 피어난 다정한 호명(呼名), 일상으로 번지는 부활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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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죽음과 절망이라는 닫힌 '모범답안'에 갇혀 울고 있는 우리의 텅 빈 삶 한복판으로 찾아오시어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기대어, 비로소 참된 나를 발견하고 모든 일상(식의주)을 은총으로 엮어내는 '생활 신앙(묵상)'으로 일어서는 눈부신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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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미명(未明)의 시간, 적막을 깨고 하루를 여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부활하신 주님의 다사로운 빛이 스며들기를 기도합니다.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 잎들이 필멸의 운명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그 지는 꽃잎 너머로 기어코 푸른 잎사귀를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우리를 에워싸는 2026년 4월의 봄날입니다. 끝 모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힘겹게 건너고 계신 분들, 그리고 짙은 안개 같은 현실 앞에서 회의하며 참된 진리를 더듬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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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종종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경제적 빈곤, 그리고 내면의 깊은 우울은 우리를 캄캄한 돌문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20장의 부활의 아침 풍경 역시, 생명의 주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 울고 있는 한 인간의 애처로운 실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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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후 첫날 일찍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요 20:1).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한 그녀는 무덤 밖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요 20:11). 송민원 교수는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진리를 대할 때, 자기 욕망이나 한계로 빚어낸 얄팍한 ‘모범답안’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통찰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죽음은 끝'이라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은 이제 서늘한 시신으로만 존재한다'는 인간적인 모범답안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절망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에, 그녀는 등 뒤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보면서도 그분이 동산 지기인 줄로만 착각했던 것입니다(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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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캄캄한 슬픔의 늪에 빠져 있는 마리아를 향해, 예수님은 복잡한 신학적 설명이나 믿음 없음에 대한 책망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부드럽고도 묵직한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요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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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호명(呼名)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언어였습니다. 이기주 작가는 언어의 본질을 살피며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성찰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통곡하던 마리아의 눈물은 영혼마저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죽음의 온도였지만, 그녀의 고유한 존재를 불러주신 주님의 음성은 벼랑 끝에 선 영혼을 단숨에 살려내는 가장 맹렬하고 뜨거운 생명의 온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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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은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빌려, 예수님이 사람의 이름을 부르실 때 일어나는 기적을 이렇게 묵상하셨습니다. 주님이 '시몬'을 '베드로(반석)'라 부르시고,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호명하셨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참된 운명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신 것은 그녀의 어두웠던 과거(일곱 귀신 들렸던 고통)나 현재의 나약함을 들추어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절망에 갇혀 울다 끝날 존재가 아니라, 내 사랑받는 자녀요 부활의 첫 증인이다"라며 그녀 내면의 가장 선하고 빛나는 가능성을 끌어내신 압도적인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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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의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의 영안이 열리며 "랍보니(선생님이여)!"(요 20:16) 하고 엎드립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성경을 강독하며, 우리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낮 동안의 허세를 벗고 가장 솔직한 자신의 민낯을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 백부장의 고백인 "도미네, 논 숨 디뉴스 우트 인트레스 숩 텍툼 메움(Domine, non sum dignus ut intres sub tectum meum. 주님,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이라는 절절한 기도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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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역시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시신을 찾아 울고만 있었던 자신의 얄팍한 믿음 때문에 스스로 모실 자격이 없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시선은 늘 자격과 조건을 따지며 우리를 정죄하지만, 다가와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마치 소설 속의 주교가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이나 거리의 여인을 바라볼 때 도덕적 판단의 잣대가 아닌 온전한 긍휼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그 영혼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심어주었듯, 예수님의 그 다정한 시선은 마리아의 모든 불신과 부끄러움을 덮어버리고 그녀를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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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벅찬 부활의 은총을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모셔 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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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 김주련 대표는 묵상을 가리켜 "식의주(食衣住)"라고 명명합니다. 묵상은 교회라는 특정한 공간이나 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고상한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살아가기 위해 매일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집에서 잠을 자듯, 우리의 가장 비루하고 평범한 일상 영역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의 전환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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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에서 통곡하던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달려가 "내가 주를 보았다"(요 20:18)고 외치며 일상으로 뛰어든 것처럼, 묵상은 부활하신 주님의 호명을 가슴에 품고 나의 일터와 가정,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척박한 땅을 은총의 자리로 바꾸어 내는 치열한 생활 신앙의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빈 무덤가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짙은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져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에는 왜 도무지 기쁨이 없고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 자책하며 회의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번듯한 종교적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내보여야 한다는 율법적인 강박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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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무언가를 찾아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 무거운 짐을 빈 무덤 앞에 살며시 내려놓으십시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완벽한 교리적 지식을 갖추고 울음을 그친 강인한 상태일 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와 슬픔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웅크려 있는 가장 초라한 바로 그 자리에, 친히 다가오시어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가장 다정하게 불러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의 수고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며 찾아오시는 주님의 맹렬한 은혜에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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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우리를 짓누르는 세상의 죽음의 논리와 모범답안을 과감히 찢어버리십시오. 내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오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묵상으로 달게 마시고, 그 은혜의 힘으로 우리의 일상(식의주) 곳곳에 부활의 기쁨을 심으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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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곤고한 신앙 여정은 춥고 긴 겨울을 지나며 단단하게 얼어붙은 '언 강(Frozen River)'과 같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세상의 시련과 실패) 속에 강은 모든 생명력을 잃고 숨을 죽인 채 갇혀 있습니다. 얼어붙은 강은 스스로의 힘이나 의지로는 결단코 그 두꺼운 얼음을 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러 하늘로부터 다사로운 '봄바람(부활하신 주님의 호명)'이 불어오고 따스한 햇살(은총)이 비추기 시작할 때, 강은 아무런 수고 없이도 그토록 자신을 옥죄던 단단한 얼음을 녹여내고 마침내 자유롭게 흐르며 대지를 적시는 생명의 물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슬픔의 얼음을 깨려 허둥대는 헛된 뜀박질을 멈추고,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따스한 은총의 바람 앞에 우리 영혼을 온전히 내어맡길 때(묵상),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살리는 찬란한 부활의 강물로 힘차게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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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