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39-19:16 “보라, 이 사람이로다”
폭력의 바다를 잠재우는 값비싼 은혜, 그리고 거룩한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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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힘과 권력으로 타인을 짓누르는 세상의 위협 앞에 비겁하게 동화되는 대신, 가시관을 쓴 채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값비싼 은혜'에 나의 삶을 온전히 항복하며(묵상), 내면의 참된 평화를 누리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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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첫 날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를 뚫고 피어난 벚꽃 잎들이, 분주한 일상에 지친 우리의 어깨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으며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묵묵히 건너고 계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모호하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 짙은 회의를 안고 참된 진리를 묻고 계신 모든 분께 평화의 주님이 주시는 넉넉한 은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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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힘과 화려한 스펙만을 숭배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위기 앞에서는 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를 지켜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8장 후반부에서 19장에 이르는 법정의 풍경은, 인간의 얄팍한 욕망과 제국의 오만한 폭력이 어떻게 무죄한 생명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지를 가장 서늘하고도 뼈아프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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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들에게 참혹한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과 자색 옷을 입으신 예수님이 군중 앞에 섰을 때, 로마 총독 빌라도는 피투성이가 된 주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 빌라도는 예수님이 이토록 초라하고 무해한 존재임을 보여주어 군중의 광기를 달래려 했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핏대를 세우며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 19:6)라고 소리칩니다. 당황한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내게는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10)라고 주님을 위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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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두려움에 사로잡혀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은 칼을 쥔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자끄 엘룰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첫 번째 의무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갈파했습니다. 부당한 폭력과 억압 앞에서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저항해야 마땅하지만, 맹목적인 생존 본능에 사로잡힌 군중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버린 채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며 세상의 권력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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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참으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폭력의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야만적인 폭력에 똑같은 힘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끔찍한 십자가에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을 내시고, 절망을 빚어 희망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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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리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은혜는 값비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생명을 대가로 치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혜가 은혜인 이유는 그것이, 유일하게 참된 삶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강인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가이사를 왕이라 부르며 타협할 수 있는 우리의 비루한 연약함조차 고스란히 끌어안기 위해, 기꺼이 침 뱉음을 당하시고 가장 무력한 '이 사람'의 모습으로 서 계셨던 것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눈을 들어 타인의 외로움, 아픔을 보려는 그 순간부터 저의 외로움과 아픔의 방의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성찰했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으시고, 상처 입고 길 잃은 우리 인류의 아픔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셨기에 기어코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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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맹렬하고도 다정한 주님의 '값비싼 은혜'를 우리 영혼 깊숙이 모셔 들이는 거룩한 행위가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촛불을 켜고 조용히 눈을 감는 정적인 명상이나 문자를 분석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본회퍼의 통찰처럼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는 하나님께 항복한 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세상의 권력(가이사)이나 내 알량한 의지로 내 삶을 지켜내려던 허망한 무기를 모두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가시관을 쓰신 채 나를 위해 침묵하신 주님의 넉넉한 사랑 앞에 내 자아의 깃발을 꺾고 온전히 항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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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이 일깨워주듯,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만물을 붙드신다. 그런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은 우리를 지키고 붙든다. 묵상은 평화를 지키고 붙든다. 묵상은 화목케 한다"는 진리를 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살아내는 치열한 영적 모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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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세상 사람들은 다들 강한 무기를 쥐고 승승장구하는데, 나만 이토록 초라하고 무기력할까?" 하며 깊은 회의와 우울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대단한 헌신이나 종교적 실적을 증명해 내지 못해 주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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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어 스스로를 구원하겠다는 율법적인 강박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세상은 힘없는 우리를 향해 "보라, 이 쓸모없는 사람을"이라며 조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영웅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위협하는 세상의 소음 한가운데서, 당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며 우리를 사 내신 주님의 그 압도적인 은혜에 영혼의 닻을 내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훌륭하게 진리를 외쳤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재판정의 수모를 뚫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무한한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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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헛된 권력에 기대어 평안을 구하던 낡은 습관을 버리고, 우리를 참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값비싼 은혜에 온전히 항복(묵상)하며 하늘의 넉넉한 평화를 덧입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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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거친 바다와 항구 사이에 묵묵히 놓여 있는 거대한 ‘방파제(Breakwater)’의 보호를 받는 일과 같습니다. 세상의 폭력과 미움, 조롱이라는 매서운 파도는 쉴 새 없이 몰아치며 항구(우리의 영혼)를 집어삼키려 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치 온몸으로 그 흉포한 파도의 충격을 가장 먼저 맞고 부서지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는 방파제처럼 세상의 모든 진노를 당신의 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파도와 맞서 싸우려는 허둥댐을 멈추고, 우리를 위해 친히 거룩한 방파제가 되어주신 주님의 은총 뒤로 고요히 숨어 들어갈 때(묵상), 우리의 내면은 세상의 폭풍우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생명의 항구로 머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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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