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01-16 엇갈린 욕망의 시선, 그 사각지대를 찾아오시는 ‘살피시는 하나님’의 질문
*
가나안 거주 10년이 지나도록 약속된 자녀가 없자, 사래는 여종 하갈을 통해 대를 잇고자 하는 당시의 관습적 방법을 아브람에게 제안합니다. 아브람이 이를 수락하여 하갈이 임신하자, 하갈은 여주인을 멸시하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는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견디다 못한 하갈이 광야로 도망쳤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그녀의 고통을 들으시고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과 번성의 약속을 주십니다. 하갈은 자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엘 로이’라고 고백하며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
#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의 관습(누지 토판, 함무라비 법전 등)에 따르면, 불임인 아내가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는 것은 합법적이고 통용되는 사회적 안전장치였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행동은 당시 문화적 기준으로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신앙적 실패였습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창세기 16장은 15장의 횃불 언약(믿음)과 17장의 할례 언약(거룩) 사이에 위치합니다. 송민원 박사는 이 장이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막간의 위기’로 해석합니다.
# ‘수평적 읽기(Horizontal Reading)’는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을 포착하는 독법입니다.
*
# 1-6절 조급함이 낳은 비극 - 인간적 대안과 깨어진 관계 :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하갈)을 취하여 관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성취를 위해 세상의 ‘편리한 도구’를 사용할 때, 침묵하시며 그 선택이 가져올 갈등을 통해 우리를 훈육하시는 분입니다.
.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자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자녀를 얻게 합니다. 임신한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자, 사래는 아브람을 원망하고 아브람은 책임을 회피하며 사래에게 권한을 넘깁니다. 사래의 학대로 하갈은 도망칩니다.
.
수평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래에게 하갈은 인격체가 아니라 자녀 생산을 위한 ‘편리한 도구’였습니다. 약속의 별(15:5)을 바라보는 믿음의 인내 대신, 눈앞의 편리한 몸종(하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수평적 관계’의 파국을 초래했습니다. 아브람은 가장으로서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지 않고, 아담이 하와에게 동조했듯 사래의 말에 수동적으로 따릅니다. 이는 당시의 합법적 관습이었을지라도, 사람을 수단화하는 행위가 가정 내 ‘수평적 평화’를 어떻게 깨뜨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갈등이 생기자 아브람은 “당신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6절)며 방관하는데, 이는 사사기의 타락상(“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을 연상시키는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
‘빨리빨리’ 문화와 성과주의에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하갈’이라는 인간적 편법을 찾습니다. 직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부하 직원을 도구화하거나, 가정의 안정을 위해 불의한 방법과 타협하는 것이 우리의 ‘하갈’입니다. 그러나 편법으로 얻은 ‘이스마엘’은 결국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편리한 대안’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할 때, 그 관계는 반드시 깨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
# 7-8절 광야의 질문 -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 고통받는 자의 도피처까지 찾아오셔서 존재의 위치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개입.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 도망치는 자를 먼저 찾아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을 던지시는 인격적인 분입니다.
.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습니다. 하갈은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답합니다.
.
하나님은 하갈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시며(인격적 대우), 그녀의 정체성(“사래의 여종”)을 상기시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은 단순한 정보 확인이 아니라, 존재의 좌표와 방향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집에서 투명 인간 취급받거나 도구로 전락했던 하갈을 ‘대화의 상대’로 존중하시며 찾아오셨습니다. 하갈은 주인에게서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그 도망의 길목에서 그녀를 만나주십니다.
.
인생의 막다른 골목, 혹은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공동체를 떠나 광야를 헤매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질문을 들을 때입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너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도피의 현장까지 찾아오셔서 말을 거십니다. 교회 밖으로 밀려난 가나안 성도들, 사회적 안전망에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닮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이 있습니다. 그네들을 향해 수평적 환대의 안부를 여쭐 수 있길 기도합니다.
*
# 9-12 귀환 명령과 약속 - 듣으시는 하나님(이스마엘) : 현실로의 복귀를 명하시되, 약자의 고통을 들으시고 미래를 보장해주시는 은혜.
하나님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로 돌아가라 명하시지만, 결코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고통을 들으셨다’는 약속을 쥐어주시는 분입니다.
.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복종하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자손을 번성하게 하리라는 약속과 함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심)’이라 짓게 합니다. 그는 들나귀처럼 되어 모든 형제와 대항하며 살 것이라 예언됩니다.
.
“돌아가서 복종하라”는 명령은 가혹해 보이지만, 당시 광야에서 홀로 된 여인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동체로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보호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는 현실적 선택을 명하십니다. 그러나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신다)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고통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보증하는 증표입니다. 비록 약속의 자녀(이삭)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17:20).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된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현실, 나를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나 가족에게로 다시 보내실 때가 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변했기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고통을 듣고 계신다(이스마엘)”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굴욕적인 현실 속에서도 버틸 힘을 얻습니다. 지금 겪는 억울함과 눈물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 사명의 자리로 복귀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 13-16절 하갈의 신앙 고백 -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 : 비천한 자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이방 여인의 놀라운 신앙 고백.
하나님은 혈통이나 신분을 넘어, 당신을 ‘보는 자’에게 친히 ‘보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보편적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
하갈은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이라 불렀습니다. 그녀는 “나를 살피시는 이를 내가 어떻게 여기서 뵈었는고”라고 감격합니다. 그 우물은 ‘브엘라해로이’라 불렸고, 하갈은 아브람에게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
성경 역사상 하나님께 새로운 이름을 지어드린 최초의 인물은 족장이 아닌 이방 여인 하갈입니다. ‘엘 로이’(El Roi), 즉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투명 인간, 도구)로 취급받던 하갈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이는 존재’(인격)로 발견되었다는 전율에 찬 고백입니다. 수평적 읽기는 이 지점에서 약자와 소외된 자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재발견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래의 몸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한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다.
.
CCTV와 SNS로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시선이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는 정작 따뜻하게 ‘살펴주는’ 시선에 목말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나 스펙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상처와 형편을 ‘살피시는(See)’ 분입니다. 이 ‘엘 로이’의 하나님을 만날 때 자존감이 회복됩니다. 나아가 교회는 우리 사회의 ‘하갈’들(이주 노동자, 미혼모, 비정규직, 사회적 약자 등)을 투명 인간 취급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봐 주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라는 위로가 절망에 빠진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살림 받았으니 우리도 누군가를 살리는 자에게로 인도하는 살림 인도자가 될 수 있길 빕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 들으시고,
숨겨진 고통을 감찰하시는 엘 로이(El Roi)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과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여
‘하갈’을 취했던 저희의 조급함과 불신앙을 회개합니다.
나의 편의를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관계를 깨뜨리며, 책임을 회피했던 비겁한 모습이 아브람과 사래를 닮았습니다.
주님, 인생의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찾아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들으시는(이스마엘) 주님을 의지하여,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 견디어 낼 힘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는 것 같은 고독 속에서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도 주님의 시선으로 소외된 이웃을 바라보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작은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