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10-20 생존의 본능이 만든 비겁한 침묵, 그리고 세상의 책망을 통한 하나님의 역설적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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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10절). 그는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생존 전략’을 짭니다(11-13절). 이로 인해 사래는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고 아브람은 많은 재물을 얻지만(14-16절),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개입하십니다(17절). 바로는 아브람을 책망하며 사래를 돌려보내고(18-19절), 그들을 호위하여 애굽에서 떠나보냅니다(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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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지리적 배경 : 가나안은 비에 의존하는 천수답 농경지인 반면, 애굽은 나일강의 풍부한 수원을 가진 제국입니다. 기근 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고대 근동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 신학적·문학적 배경 : 이 사건은 소명(12:1-3) 직후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시련입니다. ‘아내-누이’ 모티프는 창세기 20장(아브라함-아비멜렉), 26장(이삭-아비멜렉)에서도 반복되는데, 이는 족장들의 도덕적 연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 본문은 아브람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는 ‘관계의 파괴자’로서의 아브람과, 영문도 모른 채 재앙을 당하고 오히려 도덕적 훈계를 하는 이방 왕 바로를 대조시킴으로써, 신앙인의 윤리와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날카롭게 질문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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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절 약속의 땅에 찾아온 기근과 수평적 이동 : 현실의 결핍 앞에서 약속의 땅을 등지고 풍요의 제국으로 향하는 인간의 연약함.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도 기근을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풍요(애굽)와 보이지 않는 약속(가나안) 중 무엇을 신뢰하는지 질문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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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람은 그 기근이 심하였기에 애굽에 ‘거류’(잠시 머뭄)하려고 그리로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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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갔다’(야라드)는 표현은 단순히 지리적 고도의 하강뿐 아니라, 신앙적·영적 침체를 암시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자주 쓰입니다. 송민원 박사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람의 이동은 ‘수직적 부르심’(하나님의 명령)보다 ‘수평적 현실’(먹고사는 문제)이 더 크게 다가왔음을 보여줍니다. 기근은 약속의 성취를 위협하는 현실적 장벽입니다. 아브람은 이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인간적인 계산과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는 믿음의 조상조차도 생존의 공포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임을 드러내며, 성경이 인간을 미화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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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경제적 불황과 고용 불안은 우리에게 ‘기근’과 같습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적 가치보다 ‘애굽’(안정된 직장, 부동산, 스펙)으로 내려가는 선택을 합니다. 생존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가치와 소명)를 떠나게 만든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떡을 위해 사명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직장에서의 어려움이나 사업의 위기 앞에서 쉬운 길, 세상의 방식(애굽)을 택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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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 대상화된 관계와 타인의 희생 :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가장 가까운 관계(아내)를 수단으로 전락시킨 비겁한 타협.
하나님은 우리가 타인을 '나의 안위'를 위한 도구로 삼을 때, 그 관계가 어떻게 왜곡되고 비참해지는지를 묵묵히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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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며, 애굽 사람들이 자기는 죽이고 그대는 살릴 터이니 누이동생이라 하라고 시킵니다. 그 결과 바로는 사래를 궁으로 데려가고, 아브람은 그 대가로 양과 소와 노비와 낙타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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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원의 수평적 읽기는 이 장면에서 아브람의 잔혹성에 주목합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를 동반자가 아닌 ‘자신의 생명 보호를 위한 방패’이자 ‘부의 획득 수단’으로 대상화(Objectification)했습니다. 13절의 “그대 덕분에(나의 목숨이 보존되고)”라는 말은 관계의 파탄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수직적(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자 수평적(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윤리를 상실했습니다. 그가 얻은 재물(16절)은 아내를 팔아넘긴 ‘침묵의 대가’였습니다. 이는 훗날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얻을 재물과 대조되는, 부끄러운 부(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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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가족’이나 ‘동료’를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유혹에 빠집니다. 가장의 권위로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직장에서 부하 직원의 공을 가로채 나의 안위를 챙기는 모습이 현대판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산다”는 말은 사랑의 고백이어야지, 희생의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얻은 성취나 이익이 혹시 누군가의 눈물이나 희생을 담보로 한 ‘부끄러운 소득’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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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절 하나님의 개입과 주권적 탈출 :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약속을 폐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른 실수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셔서, 엉킨 실타래를 끊으시고 당신의 언약 백성을 강권적으로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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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후 바로의 책망이 있고) 바로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아브람과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를 보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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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은 이 드라마의 주어가 ‘아브람’에서 ‘여호와’로 바뀌는 전환점입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나(혹은 못했으나), 하나님은 언약의 당사자인 사래(장차 열국의 어미가 될 여인)를 보호하기 위해 바로를 치십니다. 송민원 박사는 이를 인간의 도덕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20절에서 바로가 그들을 ‘보내다’(샬라흐)는 표현은 훗날 출애굽 때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는 아브람의 이집트 체류가 출애굽 사건의 예표임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아브람의 지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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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우리의 실수와 죄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보다 크십니다. 내가 망쳐놓은 가정, 일터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상황을 정리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를 신뢰하며, 자책감에 머물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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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절 세상의 책망과 침묵하는 선지자 : 세상의 윤리보다 못한 성도의 도덕적 해이를 고발하는 이방인의 입.
하나님은 때로 세상 사람(바로)의 입을 통해 믿는 자의 위선과 비겁함을 꾸짖으시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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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 아브람을 불러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라고 세 번이나 추궁하며 아내를 데리고 떠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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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은 ‘아브람의 침묵’입니다. 바로의 논리정연하고 도덕적인 책망 앞에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합니다. 송민원 박사의 ‘수평적 읽기’는 이 지점에서 이방 왕 바로가 아브람보다 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입을 빌려 당신의 백성을 훈계하십니다. 이는 선민사상에 젖어 윤리적 책임을 방기하는 종교인들에 대한 통렬한 고발입니다. 아브람은 재물과 아내는 돌려받았으나, 명예와 도덕적 권위는 상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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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듣는 비판은 바로가 아브람에게 던진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질책과 같습니다. 세상의 법과 상식보다 못한 교회의 윤리 의식, 직장 내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책망할 때, 우리는 변명하기보다 아브람처럼 입을 다물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비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정직과 윤리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세상 속에서 ‘상식’을 넘어서는 ‘거룩’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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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실패의 자리까지 찾아오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브람의 비겁한 모습 속에서,
생존이라는 핑계로 소중한 관계를 수단으로 삼고
세상과 타협했던 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기근이라는 현실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나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며,
세상의 상식보다 못한 윤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죄를 회개합니다.
주님,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책망을 겸허히 듣게 하옵소서.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떡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약속을 붙들고 척박한 가나안을 기경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수치를 덮으시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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