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1-17 대야와 수건에 담긴 영원, 우리의 남루함을 씻어내는 가장 낮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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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끝없이 높아지려 탑을 쌓는 세상의 허영을 버리고, 가장 냄새나고 더러운 우리 삶의 밑바닥으로 내려와 기꺼이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묵상) 수용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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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었던 대지의 빗장을 풀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마다 생명의 수맥이 차올라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2026년 3월의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진리의 빛을 갈망하며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언제나 ‘높은 곳’을 지향합니다.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안심하고, 더 많은 권력을 가져야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 여깁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조차 남들보다 더 번듯한 헌신과 도덕적 성취를 이루어내어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3장의 다락방 풍경 속 제자들 역시, 누가 더 크냐는 무언의 암투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안고 앉아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코앞에 둔 그 무거운 밤, 예수님은 참으로 뜻밖의 행동을 하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주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십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십니다(요 13:4-5).
김기석 목사님은 일찍이 이 장면을 묵상하며 “수건과 대야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상징”이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을 대할 때 수직적인 신학의 앙상한 교리적 틀에만 갇혀서는 안 되며,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즉 수평적 시선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고 통찰합니다. 제자들은 수직적인 권력의 사다리만 쳐다보느라 서로의 발을 씻어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엎드리시어 수평적인, 아니 그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냄새나는 발을 어루만지심으로 하나님의 진짜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기막힌 사랑의 낮아짐 앞에서 베드로는 당황하여 소리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 13:8). 베드로의 거절은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아’라는 틀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회의와 좌절도 종종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내 흠결과 연약함을 주님께 들키고 싶지 않아 합니다. 내 삶의 더러운 발을 내어밀기엔 내 믿음이 너무 초라하다고 스스로 자책합니다. 더 깨끗해지고 완벽해진 후에야 주님 앞에 서야 한다고 율법적인 강박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이기주 작가는 언어의 본질을 살피며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온도가 있는 것은 비단 말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행위야말로 영혼을 녹이는 뜨거운 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경쟁심과 불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대야에 담긴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두 손은, 우리의 수치와 죄책감을 단숨에 녹여버리는 펄펄 끓는 생명의 온도였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성경을 강독하며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훗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비석(비문)에 어떤 문구를 남기고 싶은지를 물으며, 삶의 마지막을 기억할 때 비로소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쌓아 올린 화려한 스펙이나 종교적 업적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신발을 벗고 나의 가장 남루한 발을 내밀어 씻음 받았던 그 처절한 은혜의 기억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 압도적인 주님의 은혜를 우리 삶에 모셔 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에서 김주련 대표는 묵상을 가리켜 “식의주(食衣住)”라고 정의합니다. 묵상은 신앙생활을 고상하게 꾸며주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먹고 입고 자는 문제처럼 우리 영혼이 생존하기 위해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또한 박대영 목사님은 묵상은 머리로 활자를 읽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모든 촉수를 곤두세워 “온몸으로 이행하는 사랑의 사건”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그 비장한 밤에 내 앞에 무릎을 꿇으신 주님께 나의 더러운 발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수용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이 그러하셨듯 나 역시 이웃의 상처 나고 지친 발을 향해 기꺼이 엎드리는 ‘온몸의 실천’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혹시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나는 왜 이리 열매가 없을까?”, “나는 왜 남들처럼 훌륭한 헌신을 하지 못할까?” 자책하며 뒤로 물러서 계신 분이 있습니까? 세상의 잣대에 치여 마음이 무너져 내린 분이 계십니까?
이제 무언가를 더 해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먼지 묻고 피곤한 여러분의 두 발을 사랑의 주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훌륭하게 봉사했느냐가 아니라,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주님의 맹렬하고도 한없는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나를 씻기시는 그 끝없는 사랑 안에서 영혼의 긴장을 풀고 안식하며, 이웃을 향해 수건을 건네는 따스한 묵상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메마르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흙이 ‘봄비’를 머금는 과정과 같습니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고 쩍쩍 갈라진 흙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틔울 수 없습니다. 그 위로 내리는 보슬보슬한 봄비는 요란하게 소리치지 않지만,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들어 굳은 흙을 부드럽게 녹여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수고를 멈추고, 대야의 물을 적셔 우리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은총(봄비)을 잠잠히 받아들일 때, 우리의 척박한 영혼은 마침내 누군가를 살려내는 푸른 생명의 꽃밭으로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