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34-43 사람의 영광이 쳐놓은 그늘을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해 걷는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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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욕망으로 빚어낸 얄팍한 신학적 모범답안과 타인의 시선이라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캄캄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급히 비추시는 주님의 빛에 온몸으로 응답하는 ‘공감과 약속의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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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로 생명의 수맥이 약동하고, 마침내 딱딱한 흙을 밀어 올리며 연둣빛 새싹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3월의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갈망하며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늘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 촘촘하게 엮여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무리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우리의 영혼을 옭아매는 무거운 사슬이 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2장 후반부의 예루살렘 풍경 역시, 진리이신 빛을 곁에 두고도 자기 욕망의 렌즈와 세상의 잣대에 갇혀 허둥대는 인간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 ‘들려야’ 할 것을 암시하시자, 무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요 12:34).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세속적인 영광과 권력을 누리는 강력한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을 대할 때 이미 자기 안에 확고하게 설정해 놓은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얄팍한 종교적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승리하는 메시아’라는 모범답안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 했기에,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참된 구원자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지고 눈이 멀어버린 것(요 12:40)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진리를 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완악한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마지막 애끓는 호소를 던지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5-36).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내뱉는 출교의 협박이나 율법의 정죄는 영혼을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곧 십자가의 고통을 앞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한 영혼이라도 어둠에서 건져내시려는 예수님의 이 간절한 당부에는 피 끓는 듯한 가장 뜨거운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빛을 보고도 주저앉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관리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으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출교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비극적인 영적 상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가슴도 서늘해지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더 목말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손해를 보거나 조롱받을까 두려워,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고 세상의 어둠 속에 슬그머니 동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뜨겁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비겁한 내 모습 때문에 깊은 자책과 회의에 빠진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자기 분열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은 묵상에 대해 새롭고도 깊은 통찰을 들려줍니다. 송인규 교수는 묵상을 가리켜 “공감(Empathy)”이라고 말합니다. 묵상은 그저 텍스트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어둠에서 건져내기 위해 다급하게 빛을 비추시는 주님의 그 애타는 심정에 나의 굳은 마음을 포개어 깊이 공감하는 일입니다. 또한 정성국 교수는 묵상을 “하나님을 향한 우리 몸의 약속(Promise)”이라고 정의합니다. 머리로만 진리에 동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숨어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빛을 향해 내 몸을 밀고 나가는 치열한 약속의 이행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요한복음 1장을 강독하며, 우리 존재의 근원은 비루한 절망이나 폭력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이상(理想)’이신 하나님께 맞닿아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또한 복잡하게 꼬여버린 매듭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삶의 주석자, 해석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권면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칭찬이라는 얄팍한 주석서로 내 삶을 해석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장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고 완벽한 영웅이 되기를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때로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숨으셨던 것(요 12:36)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이 빛을 갈망할 수 있도록 고요한 은총의 여백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사람의 영광을 초월할 만큼 강인해서가 아니라, 비겁하게 숨어 있던 우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빛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 다정한 사랑 덕분입니다.
이제 사람의 영광을 구하던 낡은 욕망의 그릇과,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의 짐을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세상의 평가라는 차가운 소음에는 귀를 닫고, “내가 너를 빛의 자녀로 불렀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온 영혼을 기울이십시오. 이번 한 주간, 두려움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를 비추시는 은총의 빛에 온전히 몸을 맡기며 걷는 넉넉하고 평안한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거친 자기장 속에서 길을 찾는 ‘나침반의 바늘(Compass Needle)’과 같습니다. 나침반의 바늘 주변에 자석이나 쇳덩이(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영광)가 놓이면, 바늘은 본래 가리켜야 할 북쪽을 잃고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며 요동칩니다. 그것은 바늘이 고장 났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묵상을 통해 세상의 자기장에서 벗어나 고요한 은총의 평원에 서게 될 때, 그토록 불안하게 흔들리던 바늘은 이내 평안을 찾고, 마침내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생명과 진리의 방향(하나님의 영광)을 단호하고도 묵묵히 가리키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