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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9:9-15 폐허 위에 깃든 은혜

삶의 폐허 더미 위에서조차 우리를 '남은 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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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때로 거대한 폐허 더미처럼 느껴집니다. 선한 의지로 쌓아 올린 탑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신실함을 다짐했던 마음 밭에는 어느새 세속의 욕망이라는 잡초가 무성합니다. 우리는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혹은 그 폐허 위에 다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거룩한 씨앗'을 세상과 뒤섞어버린(스 9:2) 그들처럼, 어쩌면 단 한 순간도 순결한 적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에스라가 마주한 현실이었고, 오늘 우리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할 실존입니다.

에스라는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깊은 부끄러움과 참담함 속에서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스 9:6). 승리와 영광이 아닌, 반복되는 죄악의 현실 앞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처절하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 앞에 있사오나... 한 사람도 감히 주 앞에 서지 못하겠나이다"(스 9:15). 신앙은 종종 우리의 열심과 결단, 성취를 내세우려 하지만, 진정한 기도의 자리는 이처럼 자신의 무력함과 죄성을 인정하는 '낯선'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짙은 절망의 고백 속에서 역설적인 은혜의 빛이 스며듭니다. 에스라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서 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스 9:9). 또한 "주께서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스 9:13)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인과응보'이지만, 하나님의 논리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공로와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남은 자'(Remnant)가 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심판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그루터기'입니다. 그들은 강하거나 깨끗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 그 질펀한 삶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폐허 속에서 '새 생명'을 주어(스 9:9) 다시금 그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희망은 '더 나은 나'가 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나음'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신앙이란 완벽한 성을 쌓아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무너진 삶의 성터에 '보호의 울타리'(스 9:9)를 둘러치시는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무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여전히 죄와 실패로 얼룩져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바로 그 부끄러움의 자리에서 우리를 '남겨 두신' 하나님의 아슬아슬하고도 강력한 은혜를 붙드시길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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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9:9-15 무너진 터 위에 새긴 ‘인애(仁愛)’의 지평

하나님은 우리의 반복된 죄악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인애(헤세드)'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이 절박한 고백의 자리가 곧 우리가 뿌리내릴 영원한 성소임을 알게 하십니다.

*

우리의 삶은 종종 짙은 안갯속을 걷는 것 같습니다. 영적 순례의 길을 걷는다 자처하지만, 정작 발밑을 딛고 있는 것이 견고한 땅인지, 아니면 꺼져가는 허무의 모래밭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지혜(지혜, 힘, 재산)를 과신하며 쌓아 올린 삶의 구조물은, 작은 바람 앞에서도 위태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은 구매력에 따라 평가되고, 우리는 본래의 자리(하나님 앞)를 잊은 채 욕망의 거리를 배회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 우리 자신의 초상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고통의 땅(애굽/포로)에서 건져 주셨건만, 그들은 또다시 이방 민족의 가증한 일에 섞여 들었습니다 (스 9:10-12). 그들이 직면한 것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의 현실, 곧 거룩해야 할 삶의 터전이 세속적 가치로 얼룩진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이 참담한 고백의 자리에서 에스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인애(헤세드)'를 선포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로 우리 하나님 성전 안에 박힌 못과 같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스 9:9).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울타리’(혹은 성벽)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불러온 심판 앞에서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피난처, 곧 무조건적인 은혜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빼앗기지 않을 생명의 공간 속에 두셨습니다. 마치 사막의 황량한 벌판에서 싯딤나무나 에셀나무의 그늘을 만나는 것처럼, 이 울타리는 우리가 잠시 쉬며 영혼을 다독일 수 있는 '쉼'의 장소입니다.

더욱이 에스라는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이는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큰 허물로 말미암음이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심이 우리 죄악보다 덜하오니" (스 9:13).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쳐올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에스라의 고백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겪은 고난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보다 가볍다는, 불편하지만 정직한 진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깊이입니다. 우리가 죄의 수렁에서 몸을 뒤챌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보다 덜 징벌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돌이킬 수 있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진정한 회심(回心)은 우리가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미 박혀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못(스 9:8)에 우리의 연약한 삶을 굳게 묶는 것입니다. 이 값없는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자아의 늪에서 빠져나와,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며, 이 세상에서 '사랑의 연대'를 이루는 존재로 거듭날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헌신이나 도덕적 우월성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구원이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어디든,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향해 열린 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생명의 풍성함을 주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 은혜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인정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나침반을 들여다볼 때, 그 바늘이 쉼 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흔들리는 나침반의 바늘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하나님의 굳건한 울타리, 곧 영원한 '인애'입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배를 든든히 붙잡아주는 닻처럼 말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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