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02:17-3:13 굳건하고 흠이없게 세워져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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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교회를 향한 애끓는 마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여러 번 돌아가려 했으나 사탄의 방해로 길이 막혔다고 설명하며, 데살로니가교회야말로 자신들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합니다(2:17-20). 이 간절함에 참다못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 디모데를 파송하여,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믿음 안에서 굳건하게 세우고 위로하고자 합니다(3:1-5). 디모데를 통해 교회가 믿음과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겪는 궁핍과 환난 중에도 큰 위로와 생명을 얻는 기쁨을 누립니다(3:6-9). 이 감사에 그치지 않고, 바울은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 교회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져서 마침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서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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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20 교회를 향한 열망과 사역자의 기쁨 ;
하나님은 사역자의 수고를 통해 세워진 교회를 마지막 날 자신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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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은 잠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것은 얼굴, 즉 몸일 뿐 마음은 아니라고 말하며, 그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바울 자신은 한두 번 그들에게 가고자 했으나, 사탄이 길을 막았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그들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인지 묻고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서 있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재차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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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 바울의 표현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을 넘어섭니다. 고대 사회에서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인격적인 깊은 교제를 의미했습니다. 바울은 물리적 부재가 결코 관계의 단절이나 무관심이 아님을 강력하게 피력하며, 목회자로서 성도를 향한 깊은 애착과 그리움을 드러냅니다. 이는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와 현상의 관계처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연결이 보이는 육체의 부재보다 더 본질적임을 시사합니다.
_"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 바울은 자신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단순히 상황적 어려움으로 돌리지 않고, 영적 실체인 '사탄'의 방해로 인식합니다. 이는 그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사탄의 방해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훼방, 로마 당국의 정치적 압박, 여행의 물리적 위험 등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삶과 사역의 여정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의 싸움이 존재함을 상기시킵니다.
_"자랑의 면류관(στέφανος καυχήσεως)" : 여기서 '면류관'은 왕이 쓰는 왕관(διαδήμα)이 아니라,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수여되던 월계관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복음을 위한 고독한 경주로 보았고, 그 경주의 최종적인 승리의 증표이자 상급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바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데살로니가 성도들 그 자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사역의 성공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역의 열매는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서 온전히 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입니다.
_결론 : 사역자의 가장 큰 보람과 영광은 자신이 섬긴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역자의 존재 이유이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함께 누릴 영원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이 관계는 단순한 직무를 넘어선, 영적인 부모와 자녀와 같은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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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때로는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성도를 자신의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는 진심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또한 성도로서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사역에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굳건한 믿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교회학교 교사가 학생을, 구역장이 구역원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여기며 사랑과 열정으로 섬기는지, 그리고 그들의 영적 성장을 나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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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교회를 굳건하게 하는 일꾼의 파송 ;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동역자를 통해 구체적인 위로와 격려를 보내시어 믿음 위에 굳게 세우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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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그리움과 염려를 '참다못하여' 자신들만 아덴에 머물기로 하고,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냅니다. 디모데를 보낸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둘째, 그들의 믿음에 대해 위로하며, 셋째, 여러 환난 중에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환난을 당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을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미리 말했다고 상기시킵니다. 그가 디모데를 보낸 궁극적인 이유는 시험하는 자(사탄)가 교회를 시험하여 자신들의 수고가 헛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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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참다못하여 (μηκέτι στέγοντες)" : 이 표현은 바울의 애타는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는 마치 자녀를 불길 속에 두고 나온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결코 냉철한 전략이나 의무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타는 사랑과 열정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_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 : 바울은 자신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를 매우 권위 있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표현은 그가 단순히 바울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역자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바울이 다음 세대 사역자를 얼마나 신뢰하고 세워주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_ 환난의 신학 : 바울은 환난을 우연한 불행이나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보지 않고,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εἰς τοῦτο κείμεθα)", 즉 성도의 삶에 필연적으로 예정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고난을 피해야 할 악이 아니라,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연단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환난을 이겨낼 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형통해야 복이라는 기복신앙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 역할을 합니다.
_예방 목회 : 바울은 문제가 발생한 뒤에 수습하는 '소방수 목회'가 아니라,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예측하고 성도들이 미리 대비하도록 돕는 '예방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난을 미리 예고했고, 시험에 들 가능성을 염려하여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성도들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이 넘어질 수 있는 지점을 미리 살펴 보호하고 세워주는 세심한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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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동체는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개인의 믿음 부족으로 치부하며 방관하지는 않습니까? 바울처럼, 공동체는 고난받는 지체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때로는 직접 찾아가 함께 울어주고, 때로는 디모데와 같은 신실한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격려하며, 무엇보다 고난의 의미를 복음 안에서 해석해주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성도들에게 세상의 성공과 평안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고난의 필연성과 영광을 가르침으로써, 어떤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는 강한 영적 군사로 훈련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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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9 교회의 굳건함이 주는 위로와 기쁨 ;
하나님은 성도들의 굳건한 믿음을 통해, 환난 중에 있는 사역자에게 다시 살아갈 힘과 넘치는 기쁨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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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가 돌아와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또한, 교회가 항상 바울 일행을 좋게 생각하며, 바울 일행이 교회를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도 함께 전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겪고 있던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교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감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이 모든 기쁨으로 인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를 정도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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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εὐαγγελισαμένου)" : 디모데가 전한 소식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모습 그 자체가 복음이 살아 역사하는 생생한 증거이며, 또 하나의 '복음'과도 같은 기쁜 소식이었음을 의미합니다.
_"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 이 표현은 바울의 목회 철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의 생명력, 삶의 의미와 활력은 자신의 안위나 성공이 아니라, 오직 성도들이 주님 안에 굳게 서는 것에 달려 있었습니다. 성도의 영적 건강이 목회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이 고백은, 둘 사이의 깊은 영적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을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 철학에서 말하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즉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가 구성된다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바울에게 '나'는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관계적 자아'였습니다.
_위로의 순환 : 바울이 보낸 디모데가 교회를 위로했고(3:2), 이제 그 교회의 소식이 다시 바울을 위로합니다(3:7). 이는 교회 안에 흐르는 위로와 격려의 선순환을 보여줍니다. 목회자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존재가 아니라,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통해 위로받고 새 힘을 얻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며 위로와 기쁨, 힘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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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어떤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까? 비판과 불평의 소식입니까, 아니면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입니까? 나의 믿음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살겠다"고 말할 만큼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지지하고 기도하는 선교사나 목회자에게 우리의 신앙 간증과 감사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들의 고된 사역에 큰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도들의 작은 믿음의 소식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통해 위로와 기쁨을 얻는 겸손함이 지도자들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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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13 흠 없는 교회를 향한 간구 ;
하나님은 교회가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서도록 친히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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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은 큰 기쁨과 감사 속에서, 이제 주야로 더욱 심히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기도의 제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온전하게 채워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그리고 주께서 그들의 사랑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하여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어 주 예수께서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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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너희 믿음의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 바울은 교회의 현재 모습에 감사하고 만족하면서도,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표는 항상 '온전함(καταρτίσαι)'입니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자라가야 함을 알았기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다시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의미의 '거룩한 불만족'이며, 모든 영적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_사랑의 확장성 : 바울은 사랑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아가페)은 결코 우리끼리의 닫힌 사랑에 머물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의 사랑을 넘어, 모든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도 품는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선교적 본질을 암시합니다.
_종말론적 목표 : 바울의 모든 사역과 기도는 궁극적으로 '주의 강림(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이라는 종말론적 지평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굳건해지고 사랑이 넘쳐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잠시 평안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ἀμέμπτους ἐν ἁγιωσύνῃ)' 서기 위함입니다. 현재의 윤리적 삶과 미래의 종말론적 소망이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설 것을 전제할 때 그 의미와 무게가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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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봅시다. 나의 기도는 주로 나의 필요와 안위를 구하는 데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공동체의 영적 성숙과 온전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기도를 따라 우리 교회가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되기를, 그리고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게' 서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나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이나 행복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그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합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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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로 경주하며 믿음으로 행하여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으로, 그리고 영광과 기쁨으로
합당하게 살고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로 믿음위에 굳건한 교회로 설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믿음의 여정 속에 필수적인 환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시험을 이기는 믿음도 더불어 허락하여 능히 이기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살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를 가르치고 중보하는 이들의 보람이며
우리 주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이 모든 여정이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음을 알고
항상 기쁨으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야로 기도하되 몸된 교회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위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자라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삶이 가장 온전하고 완전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사랑을 받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사랑의교회로 굳건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워지는
주님이 꿈꾸시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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