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01:01-10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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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며 서신을 시작한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모습을 감사하며 격려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자신들을 본받는 자 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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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서의 배경 이해
사도행전 17장에는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당한 고난과 이후 베뢰아로 피신하였는데도 거기까지 집요하게 쫓아와서 박해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고린도로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 환난 가운데서도 바르게 서 있는 소식도 듣고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격려하고, 다른 한편 신비종교(디오니소스 - 음란한 신, 카비루스 - 부활 컬트 등)등의 영향으로 생긴 재림에 대한 오해 등은 바른 권면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급히 떠난 바울 일행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는 해명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 뿐 아니라 바른 권면과 자신들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려고 이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서신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지 점검하면서 혹여 왜곡된 신앙적 요소와 극단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바른 신앙을 정립해 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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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위로와 격려와 권면의 마음을 담아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전제하고 먼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발신자 바울 일행과 수신자 데살로니가 교회 모두를 통해서 보여지는 교회는 건물과 잘못된 전통과 교리 안에 갇힌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회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섬기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되었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이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인도와 보호 그리고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교회이며, 세상에 있으나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이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들을 포함합니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애정을 담은 위로와 격려와 권면의 마음을 글에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의 권위는 이들이 먼저 복음으로 말미암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며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며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삶을 보여준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그 어떤 설교와 말보다 더 묵직하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달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기원한 은혜와 평강은 교회가 누리며 살아갈 복음의 핵심과 내용을 잘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런 은혜의 복음이 여전한 로마의 지배하에서 다가오는 내 외적 핍박과 환난의 상황 속에서도 거룩한 교회로 살아가게 하는 하늘로서 주어진 참된 평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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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의 서두에 나오는 '은혜와 평강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신 구원의 선물이며, '평강'은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얻는 내면적, 외면적 평화입니다. 이는 히브리적 개념인 '샬롬'(Shalom)의 풍성함과 헬라적 개념인 '에이레네'(eireˉneˉ)의 안정을 모두 포괄합니다. 로마 시대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로마 황제를 '세상의 구원자'(Soter)로 칭하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누렸지만, 그것은 힘에 의해 강요된 억압적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포하는 참된 '평강'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근본적인 화해와 안식입니다.
이진섭 교수님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에 주목하며,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이 바로 이 '안에'(en)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안에 살고 나무가 땅 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듯이,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자유로운 주체'를 강조하는 근대 서구 사상과 대조적입니다.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autonomy)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가 '누구 안에' 놓여 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거룩한 충격이자 새로운 정체성의 발견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 안의 삶'(Vitain Christo)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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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건물의 크기, 교인의 수, 재정 규모로 교회를 정의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는 진정한 교회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팬데믹 이후 교회가 건물이 아닌 '흩어진 회중'(diaspora)으로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의 본질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와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은혜와 평강을 삶 속에서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가 혼란과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 우리는 단순히 위로의 말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와 평강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이 편지의 권위가 바울의 삶에서 비롯되었듯이, 우리의 삶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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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절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감사의 이유 곧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믿음의 역사(행위)와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늘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2)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칭찬한 내용이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도 동일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_첫 번째는 믿음의 역사 곧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행위)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살아간 이들의 삶의 내용들을 기억해 보면 삶의 동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선택하고 결단하는 언행심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드러납니다.
_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 곧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수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와 내용과 최고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희생이 수반되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누고 베풀며, 때로 손해도 감수하고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감수하는 것들을 수고라고 표현하고 있고 지금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런 참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_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의 상황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8-10절에서는 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아 택하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확신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면서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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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믿음, 사랑, 소망의 삼중주를 완벽하게 제시합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3장과 함께 바울 신학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 가지가 단순히 '믿음, 사랑, 소망'으로 언급되지 않고, 각각 '역사(ergon)', '수고(kopos)', '인내(hypomoneˉ)'라는 역동적인 행위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_’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단순한 관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반드시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 철학에서 이데아(Idea)가 현실 세계에 구현되듯이, 우리의 믿음은 현실의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받은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동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_’사랑의 수고’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결코 낭만적 감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수고'(kopos)는 고된 노동이나 희생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호의를 넘어선 자기 부인의 흔적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땀과 눈물로 헌신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_’소망의 인내’는 종말론적 소망이 이 땅의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인내'는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상황을 견뎌내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한 환난이 궁극적 현실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디오니소스 신비 종교의 쾌락주의와 부활 컬트의 잘못된 재림관 속에서 혼란스러웠지만, 그들의 소망은 이 땅의 현실이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에 있었습니다. '안도감'의 개념처럼, 우리의 구원은 이미 확보되었기에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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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를 향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역사'를 동반하고 있는가? 우리의 사랑은 '수고'를 감수하고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인내'를 낳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있어서도 '균형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만 강조하며 행위를 경시하거나, 사랑을 말하지만 희생을 회피하거나, 소망을 잊은 채 현실의 안일함에 안주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와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 생활을 넘어, 사회적 불의와 고난 속에서도 거룩한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수고를 실천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우리의 인내는 더욱 의미 있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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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절 교회는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주를 본받으며 살아갑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사랑)과 성령(소망)과 큰 확신(믿음)으로 전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렇게 온 몸으로 살아낸 복음을 듣고 알았기 때문에 교회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복음)을 받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온 몸으로 살아내고 증거된 복음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금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복음은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사랑)과 성령(의 적용케 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롬 3:21-31). 그래서 바울 일행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사도가 되어서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해진 복음이 또한 데살로니가에 있는 이들이 성령의 기쁨 곧 능력으로 이 복음(말씀)을 받아 바울처럼 믿는 자가 되었으며, 주 예수를 본 받는 자 곧 따르고 믿고 순종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전수된 복음은 다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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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복음 전파의 역동성을 묘사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능력'(dynamis)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그 능력을 구현하며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이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입니다.
'큰 확신'은 인간의 논리나 지식이 아닌,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 얻게 되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역설입니다. 고통과 기쁨은 상충되는 감정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됩니다. 이 기쁨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는 '행복'(happiness)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joy)입니다. 이는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가 말한 '행복'(beatitudo)이 내면의 신적 지식에서 온다고 본 것과 유사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세상의 고난이 잠시임을 깨닫고, 영원한 복음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고통을 초월하는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추상적인 교리를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메시스'(mimesis)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메시스'는 예술가가 현실을 모방하는 행위를 의미했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미메시스'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충실한 증인들의 삶을 모범 삼아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영적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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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지식으로만, 또는 감성적 경험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는 복음이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지식'이 아니라 '확신'으로 전달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갈등, 그리고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증표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주변의 이웃과 다른 공동체에 '본'이 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퍼져나갔듯이, 우리의 거룩한 삶의 이야기가 이 시대의 복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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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교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흘러 보내는 복음(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이제 마게도냐와 아가야 뿐 아니라 각처에 퍼져서 바울 일행이 더 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표현합니다. 데살로니가에 대한 소문의 내용은
_첫째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이른 상황,
_둘째 데살로니가 교회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 일,
_셋째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복음 곧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향기이며, 증인으로서 복음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이 환난 속에서도 전파되어서 사신(死神) 우상가운데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게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소망을 하늘에 두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침내 하늘로부터 다시 강림하실 것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로 증인되어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새 생명을 가진 새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헛된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하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곧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며 살아가고, 삶의 이유와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모든 삶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때에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구원하실 예수님이 바로 복음의 시작이고 완성이며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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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세 가지 결정적인 전환점을 포함합니다.
_첫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다양한 우상과 신비 종교가 성행하던 도시였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신(神)을 바꾸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삶을 통제하던 모든 거짓된 권위와 가치로부터 해방되는 철학적 결단이었습니다. 그들이 버린 '우상'은 오늘날의 물질주의, 성공주의,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신격화하는 합리주의와 맥을 같이합니다.
_둘째,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을 버린 공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적극적인 행위로 채워졌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단어는 '종노릇한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주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참된 자유가 참된 주인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우리 영혼은 쉬지 못합니다"라는 고백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섬길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만족을 얻게 됩니다.
_셋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 곧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정의하는 종말론적 소망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과거의 회개와 현재의 섬김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수동적인 방관이 아니라, 확신에 찬 능동적인 기대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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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도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은 '소문'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우상의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닌, 성공과 돈, 명예와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우상에 우리의 시간과 재능, 삶의 방향을 바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의 정점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종말론적 메시지는 결코 현실 도피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림의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윤리적 동기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그날에 심판받을 것이기에, 더욱 성실하게 일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는 그분만을 섬기며, 그분을 기다리는 충성된 종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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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교회로 은혜와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불어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따라
온 몸으로 살아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증거
곧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로 교회되게 택하시고 세워주심 또한 감사드립니다.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교회로 살아
우리도 믿음의 본이 되게 하옵소서.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의 모든 삶이
주의 능력과 사랑과 확신으로 가득한 복음의 편지 되게 하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교회로 서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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