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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를 논하다] 7. 해체된 이념 대체할 '지구 윤리' 세워야 - 한스 큉

[21세기를논하다] 7. 한스 큉
해체된 이념 대체할 '지구 윤리' 세워야
(스위스 출신 독일 지구윤리재단 총재)
중앙일보·경희대 네오르네상스 문명원 공동기획
만난 사람=이동수 경희대 교수
  
한스 큉 교수(왼쪽)를 만난 곳은 7월 13일 그의 사무실 겸 거처인 독일 튀빙겐의 지구윤리재단이다. 그는 처음 만나는 서먹함이나 30년 넘는 나이 차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 자상하게 인간과 윤리에 대해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대 이후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발전 덕택에 자연을 정복하고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서로 주체라고 주장하는 개인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만 팽배해 있을 뿐이다. 한스 큉 교수는 이런 현대사회의 위기를 이기적 인간들의 정신적 가치 부재에서 찾는다. 그 해결책을 지구윤리의 정립에서 구하는 큉 교수로부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듣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한스 큉(77) 교수가 사는 튀빙겐으로 가는 길은 고즈넉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큉 교수는 면식이 없는 나와 연락할 때부터 동료라고 부를 정도로 자상한 사람이었다. 만나서도 원래 알고 지내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한 큉 교수'. 바로 이것이 지구윤리를 주장하는 큉 교수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인간을 '낯선 자(stranger)'로 규정하고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윤리로 풀어낸다.

사람은 처음에 누구나 개인으로 존재한다. 사회로 나가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사회적 인간이 된다. 동양에서도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리키지 않는가.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인간은 달라졌다. 근대인은 자연을 정복하고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인간은 누구나 주체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서양의 근대는 신에 의존하던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그것은 '자기중심적 휴머니즘'이라는 반쪽에 불과했다. 이것이 근대 이후 문명이 발전하고 더욱 편리한 세계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서로 칼날을 겨누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현대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자유민주주의를 달성한 듯이 보임에도 여전히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과학기술이 발달했지만 그 남용을 저지할 지혜는 부족하지요. 경제가 발전했지만 타인과 환경에 대한 배려가 없어요. 민주주의는 정착됐지만 윤리가 결여된 까닭이겠지요. 요컨대 지나치게 물질 문명에 경도됐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공산주의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통제뿐만 아니라 정신적 통제를 자행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을 고양된 존재로 만드는 데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동안 냉전시대를 지탱해 온 정신적 가치는 '이념'이었는데, 동구권이 몰락한 후 이를 대체할 만한 정신적 가치가 아직 정립되지 못한 상태이지요. 그래서 미국식 신자본주의나 일본식 경제주의가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겁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물질적이라는 점과 이념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는 정신적으로 다양한 현상이 공존하지 않나요.

"오늘날에는 너무나 다양한 가치와 생활방식, 임의적인 태도 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이 모든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하고 이질적인 삶의 설계, 행위의 규범, 언어의 놀이, 삶의 양식 속에서 더 적극적이고 인간적인 통합에 대한 기본 동의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지구 윤리입니다."

-윤리에 대한 강조는 고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윤리란 인간의 본능과 욕구의 억제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렇다면 예전의 금욕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닐까요.

"인간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공통으로 인정되는 것만 최소한 지키자는 겁니다. 두 가지로 집약한다면 '휴머니티'와 '상호성의 원칙'이라 할 수 있지요. '모든 사람은 인간적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것,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요가 철학, 유대교, 이슬람교, 유교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덕목입니다. 하지만 독일 나치나 소비에트 공산주의,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는 그러질 못 했지요."

-미국의 헌팅턴 교수는 오늘날 문명충돌의 원인으로 종교를 지적합니다. 오늘의 종교는 너무 경직되지 않았나요.

"어떤 종교는 자신의 교리에 집착하면서 증오를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종교는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지요. 그러나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중남미.필리핀에서는 종교가 화해의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진정한 종교라면 신자와 비신자 간의 협력도 구할 수 있어야지요."

-9.11 테러나 얼마 전 있었던 런던 테러에서 보듯이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은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테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이지요. 원래 빈 라덴이나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협력자였고 서방세계를 공격할 의사가 없었어요. 그런데 미국이 거짓말을 일삼으며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버렸지요. 그들의 테러공격 또한 미국의 악행에 대한 잘못된 대응입니다. 이에 대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요. 테러에 대처하는 방법이 전투기나 함대.폭탄을 동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피아나 하는 짓이지요."

-저도 지구윤리나 평화라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정말 모든 사람이 그런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의 폭력성이나 이기심을 제거할 수 없다면 그것을 관리하는 국가의 공인된 폭력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간은 모호하고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상적인 국가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도 하고 휴머니즘을 침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따라서 자유로이 '더 나은 세상''비교적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는 일은 가능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폭력적이지 않고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먼저 유엔과 같은 세계기구에서 논의를 시작, 점차 각국으로 확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이와 동시에 아래로부터, 즉 가정이나 학교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예전에도 윤리와 대화에 대한 강조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윤리를 되풀이 얘기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가 아닌가요.

"윤리를 강조하고 교육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기나긴 여정이 필요하지요.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고요. 한국에서도 30년 전만 하더라도 환경이나 생태 문제엔 관심이 없다가 꾸준한 홍보와 교육 덕분에 지금은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나요? 오늘날 청소년은 TV나 다른 대중매체를 통해 더욱더 폭력과 잔인함에 길들여져 가는 데 비해 윤리교육은 점점 퇴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젊은이들은 아예 윤리성을 잃어갈 겁니다. 포기하지 말고 그들에게 윤리를 교육하고 널리 알려서 적어도 균형감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대담을 마치고 길을 나서는 나에게 큉 교수는 지구윤리재단에서 사용하는 교육자료를 듬뿍 안겨주었다. 큉 교수와 나는'낯선 자'로 만나 세상을 함께 건너는 인간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지구윤리를 위한 목소리로 메아리치기를 빈다.

신학자 한스 큉은

20세기 최고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가톨릭 사제로서 교황청 개혁에 앞장서고 교리를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로마 교황청 부설 그레고리안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32세에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한 이래 은퇴한 지금까지 튀빙겐에서 살고 있다. 62년부터 3년에 걸쳐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자문교수로 활동할 정도로 가톨릭에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교황 무오류설을 비판하고 여성사제 인정과 사제들의 결혼을 주장해 교황청과 대립했다.

이런 진보적 교리해석 때문에 교리 강의자격을 박탈당했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와는 여러 기묘한 인연이 있다.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했으며, 튀빙겐 대학 재임 시 동료 교수가 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큉 교수의 교리강의 자격을 박탈한 장본인이다. 큉 교수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 일반과 윤리에 관심이 많다. 현재 지구윤리재단 총재직을 맡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교회개혁' '지구적 책임성' 등의 저서가 있다. 올해 일본 '니와노 평화상'을 받았다.

이동수 교수는

경희대 NGO대학원 소속이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와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치와 한국정치''이상국가론: 동양과 서양' 등의 공저, '하이데거의 프락시스 해석'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정치의 이중성'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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