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9:16-20:6 벗은 발로 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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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을 붙드느냐의 문제이기 전에, 무엇을 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손에 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붙들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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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를 하루 앞둔 아침입니다. 달력은 가을의 문턱을 가리키는데 볕은 여전히 정수리를 두드립니다. 광양 들녘의 벼는 이제 막 이삭을 배기 시작했고, 담장 너머 배롱나무는 백일을 채우겠다는 듯 붉은 꽃을 매달고 있습니다. 매미 소리는 한낮의 절정을 지나 어딘가 조금 쉰 듯합니다. 이 늦더위를 지나며 몸도 마음도 지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밤에도 식지 않는 방에서 뒤척이신 분들, 여름 내내 붙들고 있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마음이 무거우신 분들, 그리고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손을 이리저리 옮기시는 분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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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신을 벗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고, 그는 그대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삼 년을 걸어 다녔습니다. 뜨거운 돌길과 가시밭 위를, 사람들의 시선 위를 맨발로 걸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 말이 아니라 몸을 쓰셨을까요. 왜 하필 벗기는 방식이었을까요. 말은 흘려들을 수 있지만 몸은 흘려볼 수 없습니다. 예언자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신고 있는가, 이 신발은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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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다는 앗수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었습니다. 살길을 찾던 유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애굽이었습니다. 병거와 마병이 많은 나라, 지혜로 이름을 떨치던 오래된 제국. 블레셋의 아스돗이 앞장서서 반앗수르 동맹을 꾸렸고 유다에게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주전 711년, 앗수르 왕 사르곤이 보낸 군대 장관이 아스돗을 함락시키면서 그 동맹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이사야가 맨발로 걷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의 맨발은 국제 정세의 한복판에 놓인 몸의 설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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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랍게도 이사야는 이 냉정한 현실을 말하기 직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꿈부터 이야기합니다. 먼저 애굽이 떱니다.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사 19:16). 애굽을 떨게 한 것은 앗수르의 병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지혜로 이름난 나라가 정작 하나님의 계획 하나를 읽어 내지 못해 무너집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의 뜻을 셈에 넣지 않은 계산은 결국 틀린 답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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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떨림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의 시선은 두려움 너머로 건너갑니다.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생긴다고 합니다. 태양신을 섬기던 도시가 이름을 잃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부르는 입술이 들어섭니다. 우상의 도시가 예배의 도시로 바뀌는 데 필요한 것은 정복이 아니라 회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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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애굽 땅 한가운데 제단이 서고, 변경에는 기둥이 섭니다. 압제자 때문에 부르짖는 애굽에게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 건지십니다. 한때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당하던 일을 애굽이 당하고, 한때 이스라엘이 받았던 구원을 이제 애굽이 받습니다. 그리고 이 단락의 심장 같은 한 구절이 놓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9:22). 하나님의 매는 부수기 위한 매가 아니라 돌아오게 하려는 매였습니다. 이 한 문장 앞에서 저는 제가 심판이라고 불렀던 많은 순간들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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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더 멀리 나아갑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사 19:23). 본래 그 길은 군대가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병거 바퀴 자국과 포로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새겨진 길, 약탈하러 갔다가 약탈당하러 오던 길입니다. 그 길이 예배하러 가는 길이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두 원수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사 19:25). 이스라엘이 두 제국을 정복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이에 서서 둘을 잇는 자리가 되어 세계 중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황당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현실적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꿈까지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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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20장은 우리를 다시 땅으로 내려놓습니다. 예언자가 맨발로 걷습니다. 그 벗은 몸은 훗날 애굽과 구스의 포로들이 볼기까지 드러낸 채 끌려갈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믿었던 이들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사 20:6). 미래의 애굽을 축복하는 것과 오늘의 애굽에 기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미래를 축복하실 수 있지만, 그 원수를 나의 구원자로 삼는 일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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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사람의 마음에 뚫린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 변하지 않는 대상, 곧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팡세』에 적었습니다. 우리는 그 심연을 병거로, 통장으로, 사람의 이름으로 메우려 합니다. 잠시 채워진 듯하다가 이내 더 큰 소리로 비어 갑니다. 이사야가 벗은 것은 옷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다가 붙들고 있던 헛된 지팡이를 자기 몸으로 미리 벗어 보인 것입니다. 언젠가 벗겨질 것이라면,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내려놓는 편이 낫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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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잃은 자리도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무엇에 의지하는지를 봅니다.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에 기대는 모습이 드러날 때, 우리의 설교는 이미 벌거벗겨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벗어야 합니다. 벗은 발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정직입니다. 신을 신고는 밟을 수 없는 땅이 있습니다. 모세도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거룩한 땅은 언제나 맨발로만 밟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다시 신뢰를 얻는 길도 더 좋은 신발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신을 벗고 그 땅에 서는 데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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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애굽 목록'을 한번 적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무너져도 내 신앙은 무너지지 않는지 정직하게 물어보시고, 그중 하나쯤은 실제로 손에서 놓아 보십시오. 자녀의 성적일 수도 있고, 오래 붙들어 온 인정 욕구일 수도 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손이 비어야 그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비운 손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손을 잡게 됩니다.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길이 아니었습니다. 서로를 원수라 부르던 이들이 한 분 하나님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으면서 생긴 길이었습니다. 대로는 그런 손과 손 사이로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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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물러가면 이 들녘의 벼는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가장 알찬 이삭이 가장 깊이 숙이는 법입니다. 우리의 여름도 그렇게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손에 쥔 것이 하나씩 줄어들수록 마음은 오히려 넓어지고, 신을 벗을수록 걸음은 더 멀리 가는 그런 가을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벗은 발로 낸 길 위에서, 언젠가 원수라 불렀던 이와 나란히 걸어가는 은혜를 누리시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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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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