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11 좋은 땅이라 불린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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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크기만큼 나를 재지 않고, 밀려난 자리에서도 나를 먼저 불러 주신 분 앞에 내 말을 다 내어 놓는 데서 단단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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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지도를 펴 보면 한가운데는 또렷하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흐릿해집니다. 큰 성읍의 이름은 굵은 글씨로 박혀 있지만 변두리의 마을들은 작은 점 하나로 남거나 아예 빠져 있습니다. 지도를 만든 사람의 눈이 가운데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삶은 대개 그 흐릿한 가장자리에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땅이 하나 나옵니다. 요단 동편 길르앗에서도 한참 북쪽, 이방 부족들과 맞닿은 경계의 땅입니다. 그 땅의 이름은 돕입니다. 히브리 말로 좋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지 않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좋은 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아침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께도, 스스로 가장자리에 서 있다고 느끼는 자리마다 그 이름이 조용히 들려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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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에 한 사람이 쫓겨 와 삽니다. 입다입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삿 11:1). 한 문장 안에 가장 높은 칭호와 가장 낮은 출신이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낳았지만 형제들은 그를 형제로 받지 않았습니다.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삿 11:2). 우리와 너 사이에 선을 긋고 그 선 밖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입다는 돕 땅으로 갔고, 그에게 잡류가 모여들었습니다. 비어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에서 빠진 땅에 이름에서 빠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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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뒤 길르앗 장로들이 그 가장자리를 찾아옵니다. 암몬이 쳐들어왔고 앞장설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먼저 내민 말은 우리의 장관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관으로 옮긴 카친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만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입니다. 싸움은 맡기되 공동체의 윗자리는 내주지 않겠다는 셈이었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입다라는 사람이 아니라 입다의 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돕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자리를 먼저 내민 것입니다. 한때 등을 떠밀어 문을 닫았던 손이 이제 그 사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은 사과를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들고 왔을 뿐입니다. 가운데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자리를 기억하지 않다가 필요할 때에만 지도를 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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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가 되묻습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삿 11:7). 필요 없을 때는 내쫓고 필요할 때는 부르는 셈법을 그는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장로들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값을 올립니다. 장관 대신 머리, 곧 싸움이 끝난 뒤에도 공동체를 이끄는 자리를 약속합니다. 잘못은 끝내 입에 오르지 않고 조건만 바뀝니다. 이 흥정 속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누구도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사기 첫 장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하고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이제 그 물음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오갑니다. 사람이 사람을 쓰임으로 재는 곳에서는 사과마저 거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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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쓸쓸한 흥정 뒤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삿 10:16)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값을 매기는 동안에도 그분은 그 백성을 놓지 않으셨고, 사람들이 자기 셈으로 찾아 나선 길을 당신의 긍휼이 흘러갈 길로 삼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노래했습니다. 가운데에서 버림받은 돌이 가장자리에서 다시 들려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는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도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흐릿한 가장자리에서부터 번져 옵니다. 묵상이 우리에게 길러 주는 것은 그 가장자리를 알아보는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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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입다의 이야기를 가벼운 역전극으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삿 11:11). 아뢴 것은 기도라기보다 방금 맺은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봉인해 둔 일에 가까웠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확약받고 싶어 합니다. 다만 그는 자기 말을 다 아뢰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여쭙지는 않았습니다. 그 빈자리가 몇 절 뒤 그의 집에 깊은 그늘을 드리웁니다. 쫓겨난 설움이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기도 하지만, 그 설움이 하나님을 내 편 증인으로만 앉히게 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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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은 환대를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일이라고 풀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에게 머물 자리를 인정해 준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인재를 모셔 오는 데는 부지런했지만 그 사람을 식구로 앉히는 데는 서툴렀습니다. 봉사할 자리가 비면 그제야 오래 잊었던 이름을 떠올리고, 안부보다 부탁을 먼저 꺼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누군가를 부르실 일이 있거든 필요를 말하기 전에 안부를 먼저 물어 주십시오. 지난날 우리가 밀어낸 사람이 있다면 자리를 내밀기 전에 사과를 먼저 건네 주십시오. 그리고 쓰임으로만 불려 본 기억에 마음이 시린 분이 계시다면, 그분 앞에서 오늘 아침의 묵상을 이렇게 시작해 보십시오. 주님, 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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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오래된 지도를 생각합니다. 한가운데는 또렷하고 가장자리는 흐릿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도에는 흐릿한 땅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점 하나로 남겨 둔 돕 땅에도 그분은 좋은 땅이라는 이름을 붙여 두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 계신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가장자리로 보일지 모릅니다. 사람의 지도는 크기를 그리지만 하나님의 지도는 이름을 그립니다. 그래도 그곳은 하나님이 이미 이름을 부르신 땅입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앉는 묵상의 시간은 그 이름을 다시 듣는 자리입니다. 밀려난 자리에서도 불러 주신 분 앞에 내 말을 다 내어 놓고,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서 계신 그 가장자리가 좋은 땅이라 불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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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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