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25-40 이슬로 대답하시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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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의심이 다 걷힌 뒤에야 겨우 시작되는 무엇이 아니라, 더딘 사람 곁에 밤마다 이슬을 내려 주시는 분을 조금씩 알아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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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집에서는 밭두렁 끝에까지 콩을 심었습니다. 그 콩을 벨 때는 반드시 이슬이 있을 때 베었습니다. 바짝 마른 뒤에 낫을 대면 꼬투리가 툭툭 터져 알맹이가 사방으로 달아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슬은 일을 더디게 하는 물기 같지만, 실은 거둘 것을 지켜 주는 물기였습니다. 베어 낸 콩대를 마당에 널어 말린 다음 도리깨로 두드리면, 어른들의 도리깨는 반원을 그리며 정확히 떨어졌고 저는 사방으로 튀어 나간 콩알을 줍느라 땅을 기어 다녔습니다. 거두는 일에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시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저는 그 밭두렁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이 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하루 위에도 그렇게 조용한 물기가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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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타작 마당이 하나 나옵니다. 기드온이 양털 한 뭉치를 가져다 놓은 자리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삿 6:36). 그런데 이 장면의 시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군대는 이미 모였고 지파들은 올라왔으며 전쟁 준비는 다 끝난 참이었습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그 자리에서 그는 양털을 꺼냅니다. 준비가 모자라서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다 끝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두려워진 것입니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도 한참을 서 있어 본 사람은 이 마음을 알 것입니다. 저도 그 자리에 여러 번 서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남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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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도 이미 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앞 단락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 하셨습니다. 집안의 신당이자 성읍의 밥줄이었던 제단입니다.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다만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삿 6:27). 성경은 그의 두려움을 감싸 주지도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적어 둡니다. 두려워하면서도 하였다고. 밤에 한 일이라고 해서 순종이 반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담대해진 다음에 오라 하지 않으시고 떨리는 손을 그대로 쓰십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내가 충분히 담대한가가 아니라, 떨면서라도 오늘 한 걸음을 옮겼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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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이제 양털을 놓습니다. 첫 번째 요구는 사실 자연으로도 설명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양털은 본래 물기를 잘 머금으니 이슬이 고르게 내려도 땅만 먼저 마를 수 있습니다. 기드온도 그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뒤집습니다. 양털만 마르고 온 땅이 젖는 일은 어떤 자연 현상으로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삿 6:39) 하고 조심스레 청합니다. 이번만이라는 말을 거듭하는 그 말투에 그의 속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자기 요구가 지나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례를 알면서도 청할 수밖에 없는 자리, 그것이 사람의 정직한 밑바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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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에는 말이 없습니다. 훈계도 책망도 없이 "그대로 된지라"(삿 6:38) 한 줄이 놓일 뿐입니다. 양털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다는 묘사는, 의심할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밤에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대로 행하셨습니다(삿 6:40). 마른 양털 하나를 남겨 두시려고 온 마당을 적시신 것입니다. 이슬은 소리 없이, 밤에, 조금씩 내립니다. 더딘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꼭 그렇습니다. 묵상이란 이 조용한 물기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큰 소리로 오는 응답만 응답이라 여기면, 밤새 내린 것을 아침에 놓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그쳐서 자라게 하지 않으시고, 밤새 스며들어 젖어 드는 방식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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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대목에서 도마를 떠올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만져 보아야 믿겠다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손을 내미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이를 다그치는 대신 만져 보라 하시는 손, 그 손이 사사 시대의 타작 마당에 이미 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금지하는 자리에서는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만 자랍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양털을 적셔 주셨습니다.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되묻지 않으시고, 두 번째 밤에도 잠자코 이슬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잠잠함이 제게는 어떤 웅변보다 크게 들립니다. 사랑은 대개 말을 줄이는 쪽으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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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지신다면 그것을 버려졌다는 신호로 읽지 마십시오. 지금 내 마음 위에 이슬이 내리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곁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양털을 놓고 밤새 뒤척이는 이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래 앓아 오신 분, 기도가 끊긴 지 오래인 분, 교회를 떠날까 망설이는 젊은이가 그렇습니다. 그에게 믿으라고 다그치는 대신 곁에 앉아 그 밤을 함께 지내 주십시오. 굳이 설득하려 들지 않아도 됩니다. 옳은 말 한마디보다 함께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더 멀리 갑니다. 그 밤을 함께 건너 준 사람 하나가 있으면 사람은 다시 아침을 맞을 힘을 얻습니다. 묵상은 나 혼자 깊어지는 일이 아니라, 함께 밤을 건너는 힘을 얻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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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있을 때 베어야 알곡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밤에 내려 주시는 물기도 그렇습니다. 일을 더디게 하는 것 같아도 실은 우리를 지켜 흩어지지 않게 하는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 도리깨질 같은 일들이 여러분을 두드릴 것입니다. 마른 채로 두드려 맞으면 알맹이가 흩어지지만, 밤사이 내린 것을 품은 사람은 두드려 맞아도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 마당을 먼저 살피십시오. 어젯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내려 두셨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하루를 여는 가장 좋은 순서입니다. 무엇이 내렸는지 알아보는 묵상의 눈으로, 서두르지 않고 하루를 건너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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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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