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6:01-14 쫓겨난 자를 숨기는 대낮의 그늘로 부르시는 하나님과 헛된 자랑 끝에 무너지는 모압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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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무너져 내리는 모압을 향하여 살 길을 일러 줍니다. 먼저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어린 양들을 보내어 이 땅 통치자에게 복종을 표하라고 권합니다(1절). 아르논 나루에 몰려든 모압의 딸들은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은 처지입니다(2절). 이어서 예언자는 두 번째 길을 제시합니다. 방도를 베풀고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은 그늘을 지어 쫓겨난 자들을 숨기고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3-4절). 그렇게 할 때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서고, 그 위에 앉을 이가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고 공의를 신속히 행할 것입니다(5절). 그러나 모압은 그 권고를 듣지 않습니다. 심히 교만하고 거만하며 분노하는 그 자랑이 헛되이 무너집니다(6절).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통곡하고(7절),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마르며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습니다(8절). 예언자는 그 폐허 앞에서 자기 눈물로 헤스본과 엘르알레를 적시며(9절), 기름진 밭에서 즐거움과 기쁨이 떠나고 포도 틀에서 노랫소리가 그친 것을 애곡합니다(10절). 그의 마음은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합니다(11절).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성소에 나아가 기도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12절).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하신 말씀에 기한을 매기십니다.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하고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되리라는 것입니다(13-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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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3-23장은 열방을 향한 신탁의 묶음입니다. 바벨론(13:1-14:23), 앗수르(14:24-27), 블레셋(14:28-32)에 이어 네 번째로 모압을 향한 말씀이 15-16장에 놓여 있습니다. 15장이 모압의 급작스러운 패망과 그 백성의 통곡을 그렸다면, 16장은 그 패망을 면할 두 가지 방도를 제시하고(1-5절) 다시 그 방도를 거부한 교만의 결말을 선언합니다(6-14절). 심판 선언 – 구원의 길 제시 – 다시 심판 선언이라는 이 구조 자체가 이미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예고하시면서도 그 한복판에 살 길을 내어 두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본문의 짜임새가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 모압은 롯의 후예입니다(창 19:37). 아브라함과 함께 떠났으나 소돔 들녘의 풍요를 택한 롯, 그 딸에게서 난 아들이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압은 남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광야 시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압을 괴롭히지 말고 그 땅을 빼앗지 말라 명하셨습니다(신 2:9). 그러나 모압은 이스라엘의 진로를 막았고(민 22장), 다윗 시대에는 속국이 되었다가 아합 사후 독립하여 유다를 향해 적대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모압은 사해 동편의 고원 지대로, 아르논 강과 헤스본 일대의 비옥한 평지에서 목축과 포도 농사로 부를 쌓았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에게 해마다 십만 마리의 양털을 조공으로 바칠 정도의 목축 국가였고(왕하 3:4), 십마의 포도나무는 사해 건너까지 이름을 떨쳤습니다. 본문이 고발하는 교만은 바로 이 풍요 위에 세워진 교만이었습니다.
# 역사적 정황은 아마도 앗수르 제국의 남진기입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 이후 앗수르의 압력 아래 모압은 반역과 조공 사이를 오갔고, 산헤립의 토판에는 모압 왕 캄무쉬나브디가 조공을 바치고 그 발에 입 맞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4절의 '삼 년 내에'라는 기한은 예언에 못을 박는 표현입니다.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라는 수식은 하루 품삯을 받고 사는 일꾼이 계약 기한을 한 날도 늘리거나 줄일 수 없듯이, 이 기한도 조금의 에누리 없이 채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 문학적으로 16장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역설이 놓여 있습니다. 도망자를 숨겨 주라는 명령(3-4절)이 심판 신탁의 한복판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쫓겨난 자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받아 흩어진 유다 백성을 여전히 '나의'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품는 일을 잠시 모압에게 맡기십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모압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품는 영광스러운 직무를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살 길은 조공의 양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쫓겨난 자를 향해 그늘을 만드는 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환대의 요청은 정경 전체에서 놀라운 울림을 갖습니다. 흉년에 유다로 건너간 나오미를 따라온 모압 여인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고(룻 4:17), 그 다윗의 장막이 바로 5절에서 모압의 피난처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환대는 언제나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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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대낮에 밤 같은 그늘을 지으라
하나님은 심판의 한복판에서도 도망자에게 그늘을 마련해 두시고, 그 그늘을 만드는 일에 우리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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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무너지는 모압에게 두 가지를 권합니다. 첫째는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어린 양들을 보내라는 것입니다(1절). 둘째는 쫓겨난 자를 숨기라는 것입니다.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사 16:3). 하나님은 그 도망자들을 "나의 쫓겨난 자들"이라 부르시며, 모압이 그들에게 "피할 곳"이 되라고 하십니다(4절). 그 이유로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토색하는 자와 멸절하는 자와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그칠 것이며(4절),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5절). 그 왕위에 앉을 이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고 공의를 신속히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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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이 땅 통치자'는 표면적으로 다윗 왕위를 계승한 유다의 왕입니다. 어린 양을 보내는 것은 복속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이 권고의 속뜻은 물질의 공여가 아닙니다. 유다의 왕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곧 유다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모압의 살 길은 그모스의 산당이 아니라 시온 산에 있다는 것, 이것이 예언자가 우회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셀라는 '바위'라는 뜻으로 에돔 땅의 험준한 요새를 가리킵니다. 모압의 피난민들은 그 바위 요새로 도망쳤지만, 예언자는 바위가 아니라 시온을 바라보라고 손짓합니다. 사람이 만든 가장 단단한 요새도 하나님의 산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3절의 명령은 더욱 놀랍습니다. '대낮'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초호라임'은 '갑절의 빛'을 뜻하는 쌍수형으로, 하루 중 햇볕이 가장 사납게 내리쬐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밤 같은 그늘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커다란 바위 그늘은 짐승의 습격과 뙤약볕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압에게 그 바위가 되라고 하십니다. 앞서 이사야는 여호와를 두고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라고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시는 것, 이것이 소명입니다. '방도'로 번역된 '에차'는 형사 판결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자를 어떻게 도울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는 지혜를 뜻합니다. 환대는 감정이 아니라 지혜와 설계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나의 쫓겨난 자들'(4절)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고 이방 땅을 떠도는 백성을 여전히 '나의'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이 마음이 오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넘어져 밖으로 밀려난 지체를 주님은 여전히 '나의 사람'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4절 하반절에서 상황은 역전됩니다. 토색하는 자와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할 것이므로, 모압이 베푸는 피난처는 영원한 부담이 아니라 한시적인 체류입니다. '있게 하되'에 해당하는 '꾸르'는 나그네가 잠시 머무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5절은 이 단락의 절정이자 이사야서 전체의 메시아 예언과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사 16:5). '굳게 설 것이요'의 어근은 나단 언약의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와 같은 단어입니다. 주목할 것은 '집'이나 '궁전'이 아니라 가장 초라한 거처를 뜻하는 '오헬', 곧 '장막'이 쓰였다는 점입니다. 이 왕위는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장막에서 시작됩니다. 왕위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힘이 아니라 '헤세드'(인자)와 '에메트'(충실), 곧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여호와 자신의 성품으로 선포된 그 두 단어입니다. 이사야 9장 7절과 11장 1-5절에서 예고된 그 왕, 곧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돋은 한 싹이 여기서 다시 등장합니다. 신약은 이 장막의 회복을 명시적으로 인용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으며"(행 15:16)라는 말씀으로 이방인의 구원을 변호했습니다. 모압의 피난처가 될 다윗의 장막은, 결국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는 문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언은 베들레헴 시골 마을의 구유에서, 강보에 싸여, 사람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한 아기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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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대낮에 밤 같은 그늘을 지으라'는 명령보다 절실한 말씀이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늘이 사라진 대낮 같습니다. 청년들은 스펙이라는 뙤약볕 아래 자신을 증명하느라 타들어 가고, 중년은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자리에서 하루를 버티며, 노년은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율이라는 숫자 뒤에서 조용히 늙어 갑니다. 이주 노동자와 난민, 가정 밖으로 밀려난 청소년, 병원비 앞에서 치료를 포기하는 이들이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 교회는 이들에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압에게조차 그늘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을 눈앞에 둔 나라에게도 마지막으로 맡기신 일이 환대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련된 예배나 늘어난 숫자가 아니라, 대낮에 밤 같은 그늘을 만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3절은 그 그늘이 감상이 아니라 설계임을 알려 줍니다. '방도를 베풀며'라는 말씀대로, 누가 지금 우리 지역에서 볕에 서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어떻게 그늘을 지을지 함께 궁리해야 합니다. 광양은 산업 도시입니다. 하청과 파견의 자리에서 일하는 이들, 타지에서 온 노동자와 그 가정, 조용히 무너지는 소상공인이 우리 이웃입니다. 그들에게 잠시 쉴 자리를 내어 주는 일, 밥 한 끼와 말 한마디로 뙤약볕을 가려 주는 일이 왕위를 굳게 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4절은 우리에게 '나의 쫓겨난 자들'이라는 시선을 요구합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 상처받고 밀려난 지체를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가 그 공동체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실패한 자를 '탈락자'라 부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사람'이라 부르십니다. 우리 입술에 그 호칭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쳐 돌아온 배우자와 자녀에게 우리 집이 대낮의 그늘인지, 또 하나의 평가석인지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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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헛된 자랑 위에 세운 나라
하나님은 풍요 위에 세워진 인간의 자랑을 헛것으로 드러내시고, 오직 당신만이 참된 풍요의 근원이심을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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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화자를 '우리'로 바꾸어 말합니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사 16:6).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고,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슬퍼하며 심히 근심합니다(7절). 그 이유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치고 광야에 이르렀으며 그 싹이 자라 바다를 건넜으나,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습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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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는 교만을 뜻하는 단어가 연달아 세 번 등장합니다. '게온', '가아와', '게오노'는 모두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라는 동사 '가아'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어근에서 나온 명사들이 성경에서는 본래 여호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위엄과 영화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출 15:7; 사 2:10). 곧 교만이란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사람이 넘보는 일입니다. 모압이 여호와처럼 되려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풍요에 도취되어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교만은 대개 신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조용한 확신의 형태로 옵니다.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를 직역하면 '그의 허풍들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지금의 풍요를 근거로 앞날도 이러하리라 떠들던 그 계산이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결정권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가 '우리가 들었나니'라고 말한 것도 뼈아픕니다. 모압의 교만은 영적으로 예민한 선지자의 눈에만 보인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릴 만큼 시끄러웠습니다. 정작 본인만 모르는 소리, 그것이 교만입니다.
7-8절은 그 교만의 근거였던 것이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길하레셋'은 '옹기 조각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모압의 요새 성읍이었습니다. 그 지방의 자랑이던 건포도 떡은 잔칫상에 오르는 별미였습니다(삼하 6:19; 호 3:1). 헤스본과 십마는 포도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8절의 묘사는 애처롭도록 아름답습니다. 그 포도 덩굴은 북쪽 야셀까지 뻗고 동쪽 광야에 이르렀으며 그 싹이 자라 사해를 건넜습니다. 한 나라의 자랑이 국경 밖까지 뻗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랐음이라'에 해당하는 '우믈랄'은 '병들다, 시들어 말라 비틀어지다'라는 뜻의 수동형입니다.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말려진 것입니다. 수동형은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암시합니다. 열국의 주권자들이 가지를 꺾었다고 하지만, 그 손 뒤에 계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앗수르가 진노의 막대기였듯이(사 10:5), 여기서도 제국은 도구일 뿐입니다.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 백성을 향한 은유였습니다.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은 극상품 포도를 기대하셨으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모압의 포도나무 이야기는 그 노래의 이방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옥한 땅과 풍성한 소출을 자기 것이라 여기는 순간, 그 포도원은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하시며, 열매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영원히 못 박으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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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이 대목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지난 세기 우리는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드문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 소출은 놀라웠고, 그 가지는 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로 뻗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아니라 우리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건물의 크기와 교인 수와 예산 규모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목회의 성공이 숫자로 환산되는 동안, 세상은 교회의 자랑을 우리보다 먼저 들었습니다. '우리가 들었나니'라는 6절의 말씀이 오늘 한국 사회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말이 되어 있지 않은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절망이 아니라 출구를 가리킵니다. 마르는 포도나무는 심판인 동시에 초청입니다. 우리가 붙들던 버팀목이 무너질 때 비로소 참된 반석을 붙들 기회가 열립니다. 교회의 규모가 줄고 영향력이 약해지는 이 시기가, 우리를 다시 참포도나무께 접붙이는 시간이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자랑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이 우리 공동체의 실제 언어가 되도록, 자랑의 목록을 정직하게 점검할 일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십마의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자녀의 성적, 직장의 자리, 통장의 잔고, 건강한 몸처럼 나를 지탱한다고 믿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자랑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마르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성껏 심고 가꾸는 일들 가운데 주님의 주권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 열매의 근원을 누구라고 고백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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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2절 예언자의 눈물과 산당의 침묵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심판받는 자를 위하여 함께 우시는 분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눈물을 끝까지 우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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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폐허 앞에서 웁니다.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사 16:9). 여름 실과와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고, 기름진 밭에서 즐거움과 기쁨이 떠났으며, 포도원에는 노래가 없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충격적으로 밝혀집니다.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10절). 예언자의 마음은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고 그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합니다(11절). 그러나 모압은 여전히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성소에 나아가 기도하고,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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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과 11절은 예언 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판을 선포하는 입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는 직역하면 '내 눈물로 너를 흠뻑 적시겠다'입니다. 포도밭에 내려야 할 가을비 대신 예언자의 눈물이 그 땅을 적십니다. 11절의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는 창자가 뒤틀렸다가 풀리며 나는 소리를 시적으로 묘사한 표현입니다. '창자'로 번역된 '메아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속을, 곧 감정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예언자의 몸 전체가 하나의 울림통이 되어 원수의 나라를 위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이 눈물을 예언자 개인의 감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 느끼는 자입니다. 10절에서 심판의 주체가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고 1인칭으로 밝혀지는 것과 11절의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가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결정적입니다. 심판하시는 그 입과 우시는 그 마음이 하나입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하나님의 심판에는 언제나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이 눈물은 신약에서 얼굴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심판을 선언하시는 그 입술이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은 우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심판받는 자리에 친히 들어가셨습니다. 예언자는 모압을 위해 울 수 있었지만 모압을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우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12절은 이 단락을 서늘하게 닫습니다. 모압은 여전히 산당으로 올라갑니다. '피곤하도록 봉사하며'라는 표현은 그들이 게을렀던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성실했습니다. 지칠 만큼 열심이었습니다. 다만 그 열심의 방향이 그모스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소용없으리로다', 곧 '할 수 없을 것이다'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부르짖고 몸을 상하게 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었던 장면(왕상 18:26-29)이 여기서 반복됩니다. 문제는 열심의 양이 아니라 열심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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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눈물의 방향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판단의 말은 많이 하지만 눈물은 적습니다.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신앙은 있으나, 대상을 위해 창자가 뒤틀리도록 우는 신앙은 드뭅니다. 진실한 신앙은 죄를 엄중히 여기면서도 상처 입은 이들 앞에서 둔감해지지 않습니다. 이 둘을 동시에 붙드는 것이 예언자적 영성입니다. 우리가 옳다고 확신하는 일이 있을 때, 그 확신의 끝에 눈물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눈물 없는 정죄는 예언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12절은 우리 자신을 겨눕니다. 우리도 피곤하도록 봉사할 수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몸이 상하도록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의를 쌓는 산당을 향한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봉사,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종교 활동,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헌금과 기도는 모두 우리 시대의 산당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모든 봉사가 지친 노동이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 되기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흥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여는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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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4절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하나님은 오래 전에 하신 말씀을 정하신 때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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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두 절은 앞의 신탁 전체에 도장을 찍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거니와"(13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되리라 하시도다"(사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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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의 '오래 전부터'와 14절의 '이제'가 짝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 전에 주어졌고, 이제 그 말씀에 기한이 매겨집니다.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라는 비유가 절묘합니다. 품꾼은 하루 일하고 하루 삯을 받는 사람이라 계약 기한에 예민합니다. 하루라도 더 일하지 않고 하루라도 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도 그러합니다. 늦어지는 듯 보여도 늦지 않고, 그 기한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하박국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모압의 영화'는 그들이 자랑하던 모든 것입니다. 비옥한 평지와 포도원과 목축과 요새 성읍입니다. '그 큰 무리'는 인구와 군사력입니다. 그 모든 것이 '능욕을 당하고',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됩니다. 여기서 '남은 수'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이사야서에서 '남은 자'는 대개 은혜의 명맥을 뜻하는 소망의 언어입니다(사 10:20-22). 그러나 모압에게 남은 수는 소망이 아니라 잔해입니다. 같은 '남음'이라도 하나님께 붙들린 남음과 심판 뒤에 흩어진 남음은 전혀 다릅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듭니까. 16장 1-5절에서 제시된 그 길, 곧 시온을 향해 어린 양을 보내고 쫓겨난 자에게 그늘이 되는 그 길을 걸었느냐 아니냐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결론이 모압에 관한 성경의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같은 모압 신탁을 전하면서도 이렇게 닫습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 날에 모압의 포로를 돌려보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8:47). 그리고 모압 여인 룻은 이미 다윗의 족보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마 1:5). 심판의 신탁 한복판에 놓인 다윗의 장막(5절)은 결국 모압에게도 열린 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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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줍니다. 하나는 경고이고 하나는 위로입니다. 경고로는, 우리가 미루고 있는 회개에 기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아직 괜찮아 보이고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계는 정확합니다. 오늘 들은 말씀에 오늘 응답해야 합니다.
위로로는, 우리가 견디고 있는 이 시간에도 기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는 자리,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자리, 병상과 실직과 관계의 단절 속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은 품꾼의 계약 기한을 세듯 정확히 날을 세고 계십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경제도 정치도 국제 정세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믿음은 환경의 소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란 위에서 자기 경영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양사랑의교회는 두 가지를 함께 붙들 일입니다. 하나는 오늘 순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오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닙니다. 정한 때를 아시는 분을 신뢰하기에 오늘 순종할 수 있고, 오늘 순종하기에 오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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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무너지는 모압을 향해서도
살 길을 일러 주신 주님의 자비 앞에 엎드립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그 한가운데 피할 곳을 마련해 두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새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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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에 밤 같은 그늘을 지으라 하신 주님,
우리 교회가 뙤약볕 아래 서 있는 이웃에게
바위 그늘이 되게 하옵소서.
쫓겨난 자를 숨기고
도망한 자를 발각되게 하지 않는
환대의 손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넘어진 지체를 향하여
주님께서 '나의 사람'이라 부르시는 그 음성을
우리 입술에도 담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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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를 자랑으로 바꾸어 버린 모압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주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여긴 적이 많았습니다.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라 가듯
우리의 자랑이 시들 때
그것이 절망이 아니라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다시 접붙여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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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나라를 위하여 창자가 뒤틀리도록 우신 주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던 그 눈물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옵소서.
정죄는 쉽고 눈물은 어려운 우리에게
아파하는 세상을 향한 긍휼을 주옵소서.
피곤하도록 봉사하고도 헛된 산당의 열심이 아니라
사랑의 응답으로 드리는 섬김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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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정하신 때를 한 치도 어기지 않으시는 주님,
오늘 들은 말씀에 오늘 순종하게 하시고
응답이 더딘 자리에서도
주님의 시계를 신뢰하며 기다리게 하옵소서.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굳게 선 그 왕위,
충실함으로 판결하시고 공의를 신속히 행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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