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09:01-07 흑암에 비친 큰 빛, 평강의 왕으로 오신 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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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시받고 흑암에 짓눌리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 이방의 갈릴리가 후에는 도리어 영화롭게 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빛이 비칩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고 즐거움을 더하시니, 추수하는 기쁨과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 같은 환희가 임합니다(1-3절). 그 기쁨의 첫째 이유는 정치적 해방입니다. 주께서 그들이 멘 무거운 멍에와 압제자의 막대기를 '미디안의 날' 같이 꺾으시고, 둘째로 전쟁을 폐지하사 군화와 피 묻은 옷을 불사르십니다(4-5절). 셋째이자 절정의 이유는 한 아기의 탄생입니다. 어깨에 정사를 메고 오시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그의 정사와 평강이 무궁하며, 다윗의 보좌를 굳게 세워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시니, 이 모든 일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십니다(6-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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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9:1-7은 8장 끝의 짙은 흑암("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8:22) 바로 다음에 놓여, 그 어둠을 뚫고 터지는 새벽의 빛입니다. 1절에 언급된 스불론과 납달리, 갈릴리 지역은 열왕기하 15:29에 따라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병합한 바로 그 땅입니다. 주전 8세기, 북쪽 국경의 이 지방은 다메섹의 하사엘·벤하닷과 앗수르의 연이은 침략으로 가장 먼저, 가장 참혹하게 짓밟힌 '멸시받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가장 어두웠던 자리를 빛이 가장 먼저 비치는 자리로 뒤집으십니다.
# 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의 시점이 역사적인지 종말론적인지 물으며, 1-5절은 앗수르 억압이라는 당대의 정치사를 배경으로 하되, 6-7절의 아기에게 주어진 네 칭호와 그 통치는 지상의 어떤 왕으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종말론적 지평을 연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읽으면 히스기야가 후보가 될 수 있으나, 이사야가 한 인간 왕의 출생에 이토록 큰 소망을 걸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앗수르에게 빼앗긴 북방 영토는 다윗 왕조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 예언의 구원과 회복은 구약 시대에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성취되었습니다. 신약의 기자들은 이 예언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마태복음 4:15-16은 9:1-2를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며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서 이루어졌다 선포하고, 사가랴는 누가복음 1:79에서 9:2를 노래하며,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9:7의 예언("그 나라가 무궁하리라")이 그녀의 아들에게서 성취될 것을 고지합니다(눅 1:32-33).
# 네 칭호는 원래 대부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기묘자(놀라운 일을 계획하시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원칙상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며, '평강의 왕(사르 샬롬)'만이 지상 통치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네 이름이 한 아기에게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은, 이 아기가 하나님과 내밀히 하나이신 분, 곧 성육하신 하나님이심을 예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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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흑암에 큰 빛을 비추어 기쁨을 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와 압제의 짙은 어둠에 짓눌린 백성에게 친히 큰 빛으로 임하사, 사망의 땅을 추수와 승리의 기쁨으로 뒤바꾸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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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멸시받던 스불론과 납달리, 이방의 갈릴리가 후에는 영화롭게 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칩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즐거움을 더하시니,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기를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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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끝은 온통 흑암이었습니다. 말씀을 버린 백성이 신접한 자를 찾다가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8:22) 속으로 쫓겨 들어가는 절망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장을 넘기자마자 첫 마디가 "흑암이 있으나 그처럼 흑암하지 아니하리로다"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김필회 교수가 짚듯, 빛이 가장 먼저 비치는 곳은 뜻밖에도 가장 먼저 짓밟혔던 변방, 앗수르에게 제일 먼저 빼앗긴 스불론과 납달리입니다. 세상의 셈법이라면 회복은 중심부 예루살렘부터여야 할 텐데,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낮고 어두운 변두리에서 동틉니다. 훗날 그 갈릴리에서 나사렛 예수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외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빛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라 행복과 구원의 상징이며(암 5:20; 시 27:1), 동시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동반되는 임재의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을 떠나 얼굴을 가리셨던(8:17) 여호와께서 빛 가운데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골 1:13)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빛에는 환희가 따릅니다. 이사야는 그 기쁨을 두 이미지로 그립니다. 뼈 빠지게 수고한 뒤 곳간이 가득 차는 추수의 기쁨,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전쟁에서 이기고 전리품을 나누는 승리의 기쁨. 고대인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두 기쁨을 겹쳐 놓은 것은, 구원의 기쁨이 그만큼 크고 실제적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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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도, 우리 교회에도 스불론과 납달리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지고 가장 오래 어두웠던 자리, 남들은 다 회복되는 것 같은데 나만 그늘에 남겨진 것 같은 자리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변방에서 빛이 먼저 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궁전이 아니라 구유에서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가장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있다면, 그 어둠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빛을 받은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둠을 원망하며 웅크리는 대신, 받은 빛을 이웃의 어둠으로 옮기는 빛의 전달자로 살아가는 것 — 그것이 큰 빛을 본 백성의 마땅한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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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압제의 멍에를 꺾고 전쟁을 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미디안의 날' 같이 친히 개입하사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고, 군화와 피 묻은 옷을 불사르사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여시는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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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미디안의 날"과 같이 꺾으십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은 불에 던져져 소각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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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첫째 이유가 정치적 해방입니다.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 6-7장, 기드온의 삼백 용사 사건을 가리킵니다. 미디안의 억압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삼만 이천 명 중 삼백 명만 남기시고, 사람의 눈에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사야가 굳이 이 날을 불러온 것은, 해방이 인간의 군사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이루어짐을 못 박기 위함입니다. 백성이 스스로 멍에를 벗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 멍에를 "꺾으신다"는 수동태가 핵심입니다.
둘째 이유는 전쟁의 폐지입니다. 승리의 상징인 군화와 전투복을 전리품으로 자랑하는 대신 불에 태워 없앤다는 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것은 다음 전쟁을 위한 무장 해제가 아니라, 전쟁 자체의 종식을 뜻합니다. 이사야는 이미 2:4에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는 종말의 평화를, 11:6-9에서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샬롬의 시대를 내다보았습니다. 여기서도 해방 뒤에 오는 것은 또 다른 정복이 아니라 무기가 불타 사라지는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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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우리 삶의 왕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의 종노릇하며 짓눌리던 데서, 자유와 평화를 주시는 주의 나라 백성으로 옮겨지는 해방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멍에는 무엇입니까. 끊지 못하는 죄의 습관, 채워지지 않는 탐욕, 남과의 비교와 인정욕구, 미래에 대한 불안 — 그 막대기는 우리 힘으로 부러지지 않습니다. '미디안의 날'의 복음은, 내 삼백 명으로도 안 되는 그 싸움을 주께서 대신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평화의 시대를 여신 주님은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마 5:9)로 부르십니다. 여전히 관계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사회 속에서 스스로 전쟁을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이 해방의 자리에 온전히 서지 못한 것입니다. 무기를 불사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손에 쥔 칼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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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절 한 아기로 오신 평강의 왕,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나라
하나님은 어깨에 정사를 멘 한 아기, 곧 기묘자·전능하신 하나님·영존하시는 아버지·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를 영원한 정의와 공의로 세우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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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합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실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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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절정, 셋째 이유는 한 아기의 탄생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압제자를 꺾으시는 방식이 거대한 군대나 천사의 군단이 아니라 "한 아기"라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으로 가장 강한 것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그 아기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며, 왕위 계승자의 출생은 다윗에게 주신 나단 신탁(삼하 7:16)의 성취를 알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 아기에게 주어진 네 이름은 그가 어떤 통치자인지를 압축합니다. 첫째, '기묘자·모사'는 원문상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는 이'로, 계획을 세우고 반드시 이루시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는 원래 하나님의 일입니다(사 29:14).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은 문자 그대로 이 아기를 '하나님-용사'라 부릅니다. 지상의 왕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로, 이 아기가 단순한 인간 왕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백성을 영원히 보호하고 돌보는 아버지 같은 통치를 뜻하며, 이 역시 원칙상 하나님께 속한 표현입니다. 넷째, '평강의 왕(사르 샬롬)'은 법과 정의로 공적 질서를 세워 백성이 평화롭게 살게 하는 통치자입니다. 처음 세 이름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이 아기가 곧 우리 가운데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 자신임을 예표합니다. 7장의 임마누엘 예언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아기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본문은 마지막에 결정적인 한 마디를 못 박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김필회 교수가 강조하듯, 이스라엘의 해방도 전쟁의 폐지도 메시아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평화의 시대가 가능하도록 모든 전제를 다 충족시켜 주시고, 그 위에 아기가 나라를 영원히 다스립니다. '열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질투'와 같은 단어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겁고 끈질긴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 밀어붙여 이루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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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전히 힘으로, 세력으로, 목소리로 왕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 왕은 군림하지 않고 섬기며, 짓밟지 않고 짊어지며, 칼이 아니라 십자가로 다스립니다. 오늘 우리가 붙든 '평화'가 힘의 균형이나 굴복 위에 세운 거짓 평화인지, 정의와 공의 위에 세운 참 샬롬인지 물어야 합니다. 평강의 왕 아래 사는 교회라면,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도로, 소외된 이를 사랑으로 품고 정의를 세우는 공동체로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자기 희생과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직 손에서 놓지 못한 다른 왕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지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나라를 세우는 힘도, 나를 끝까지 붙드는 힘도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 열심 위에 서서, 지금 잠시 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이미 주어진 평화를 누리며 장차 완성될 그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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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흑암에 행하던 우리에게 큰 빛으로 임하신 하나님,
사망의 그늘진 땅에 앉았던 우리를
주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짓밟힌 변방에 먼저 빛을 비추시듯,
오늘 가장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 심령 위에도
새벽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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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힘으로 부러지지 않는 멍에와 압제의 막대기를
'미디안의 날' 같이 친히 꺾어 주시고,
우리 손에 쥔 칼과 미움과 다툼을 불사르사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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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로 오신 평강의 왕,
기묘자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힘과 세력으로 왕 되려는 이 시대에
섬김과 십자가로 다스리시는 주의 통치에 온전히 순복하게 하시고,
광양사랑의교회를 평화와 정의의 사도로 세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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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것이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임을 믿습니다.
그 열심 위에 서서, 잠시 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이미 주신 평화를 누리며 완성될 그 나라를 소망하게 하소서.
평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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