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28-49 낯선 식탁 위에 차려진 진실, 일상을 관통하는 은혜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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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배부름과 안위라는 세속의 식탁을 잠시 물리고, 낯선 이들에게 내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진실하게 나누며 서로의 영혼 깊은 곳으로 '시간 여행(묵상)'을 떠남으로써, 폭력과 계산이 난무하는 세상을 '수평적 연대'로 잇는 거룩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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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수액을 맹렬히 길어 올리는 나무들의 고요한 수고가 온 산빛을 짙푸른 생기로 물들이는 주일 아침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내리며 저마다의 혹독한 계절을 맨몸으로 견뎌내고 이 자리에 오신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내 믿음이 이토록 초라해도 괜찮은 것일까 짙은 회의를 안고 진리의 빛을 더듬고 계신 모든 분들의 일상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다사로운 은총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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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늘 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계산하라고 다그칩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면 그 사람이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부터 저울질하며, 수직적인 힘의 논리로 타인을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구약성경 창세기 24장 후반부의 풍경은, 그토록 철저히 계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고대 세계의 한복판에서, 낯선 이들이 만나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수평적 연대'의 자리로 나아가는지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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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만난 리브가는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녀의 오라비 라반이 달려 나와 종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라반이 달려 나온 결정적인 동기 중 하나를 슬그머니 내비칩니다. "그가 그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달려가서"(창 24:30). 라반의 환대 이면에는 금붙이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계산과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한동일 변호사가 인류의 비루한 실존을 성찰하며 "태초에 질문과 폭력이 있었습니다"라고 갈파했듯, 고대 세계의 낯선 만남은 늘 약탈의 폭력이거나 이익을 위한 철저한 거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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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종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라반의 가족은 지친 그를 위해 음식을 베풉니다. 그런데 극도로 시장했을 이 늙은 종은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창 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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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이 단호한 거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성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수직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이웃과 타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얽힘에 주목하는 '수평적 관점'으로 읽어낼 것을 권면합니다. 종의 이 행동을 주인의 엄격한 수직적 명령에 짓눌린 노예의 강박으로만 읽는다면 본문의 참맛을 잃게 됩니다.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종의 이 선언은 낯선 타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거룩한 의지입니다. 내 배부름이라는 육신의 본능적 욕망을 뒤로 미루고,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오신 하나님의 그 맹렬한 은혜의 서사를 나누는 것이 그에게는 더 절박한 영혼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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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입을 열어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과, 자신이 우물가에서 드렸던 떨리는 기도, 그리고 그 기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응답하신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정직하게 쏟아냅니다. 그는 으름장을 놓으며 권력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막막한 사막을 건너며 자신이 겪었던 두려움과 기도의 응답을 진실하게 고백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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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변호사는 "저 역시 제 외로움과 고통에서 눈을 들어 타인의 외로움, 아픔을 보려는 그 순간부터 저의 외로움과 아픔의 방의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털어놓은 고단한 기도의 이야기는, 라반과 브두엘의 닫힌 마음을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늙은 종의 진실한 고백을 통해 아브라함 가문의 간절함과 리브가 가문의 일상이 수평적으로 연결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可否)를 말할 수 없노라"(창 24:50)며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게 됩니다. 금붙이로 시작되었던 세속적인 만남이, 은총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영적인 친교로 빚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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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얄팍한 계산을 멈추고 타인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에서 성경 교사들은 묵상이 단순한 지적 활동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그들은 묵상이란 성경 본문에 처음 접근하던 그 사람들의 처지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여행"이며 깊은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묵상은 그저 책상머리에서 활자를 쪼개는 것이 아닙니다. 낯선 땅에 홀로 버려진 듯 두려웠을 늙은 종의 그 떨리던 심장 속으로, 그리고 그의 진실한 이야기를 숨죽여 듣고 있던 리브가 가족의 경이로움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깊이 공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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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신약학자인 권연경 교수는 묵상을 가리켜 "걷기"라고 정의합니다. 문자와 지식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 가나안에서 아람까지 묵묵히 걸어갔듯,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이웃의 차가운 마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 우리만의 생생한 신앙의 언어로 대화하는 실천적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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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성경 지식도 부족하고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대단한 기적을 체험한 적도 없어"라며 주눅 들고 회의감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화려한 금붙이(성공의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사람들이 내 신앙을 인정해 줄 것이라는 무거운 강박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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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증명의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송민원 교수의 통찰처럼, "성경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늙은 종은 완벽한 정답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인도하셨는지 솔직하게 나눈 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창 24:49)라며 그들의 자유로운 결단을 묻는 다정한 질문을 던졌을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논리로 세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비루한 일상 속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친히 인도해 내신 하나님의 작고 다정한 은혜들을, 이웃의 식탁에서 진실하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번듯하게 성공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상처 많고 흔들리는 우리 삶의 이야기조차 누군가를 살리는 위대한 구원의 서사로 편입시켜 주시는 주님의 넉넉한 긍휼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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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내 배를 불리기 위해 이웃을 수단으로 삼으려던 세속의 낡은 관행을 거절하십시오. 그저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묵상(시간 여행과 걷기)으로 깊이 호흡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힘이 아닌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로 다가가 척박한 세상을 잇는 다정한 수평적 순례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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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거친 계곡 사이에 놓여 있는 소박한 '징검다리(Stepping Stones)'와 같습니다. 징검다리는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교각(수직적 교만)이 아닙니다. 그저 물의 흐름에 순응하며, 끊임없이 부딪히는 차가운 물살(세상의 폭력과 시련)을 맨몸으로 견뎌내면서 수면과 가장 가까운 높이에서 고요히 엎드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우월해지려는 수고를 멈추고 징검다리처럼 자세를 낮추어, 나를 밟고 지나가는 이웃의 발걸음에 깊이 공감할 때(묵상), 비로소 단절되어 있던 두 세계는 우리의 진실한 삶을 통해 수평적으로 만나 생명이 오가는 거룩하고 평화로운 은총의 길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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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