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1-35-51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와서 보라" 초청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는 참된 만남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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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언("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을 듣고 그의 두 제자(안드레와 다른 한 명)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청하시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이 메시아임을 깨닫습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튿날 예수님은 빌립을 찾아 "나를 따르라" 부르시고,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편견을 가진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그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주십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며, 예수님은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인자로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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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속에서 구원자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랍비'는 존경받는 선생을 뜻하며, 제자들은 랍비와 함께 생활하며 배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묵상하고 기도하던 장소를 상징합니다. '나사렛'은 당시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나올 만한 곳으로 여겨지지 않던 멸시받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 신학적 배경 : 본문은 야곱의 벧엘 꿈(창세기 28:12)을 배경으로 합니다. 야곱이 꿈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보았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 자신이 그 사다리가 되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심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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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42절 "와서 보라" - 만남과 변화 :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고 함께 거하며, '메시아'를 만난 기쁨으로 형제를 인도하여 존재의 변화(게바)를 입게 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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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자,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시고, 그들이 거처를 묻자 "와서 보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들은 그날 함께 거하며 예수님을 깊이 만납니다. 두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는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장차 '게바(반석)'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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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구하느냐?" :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마디입니다.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인생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목적을 묻는 질문입니다.

"와서 보라" : 예수님은 교리적인 설명 대신 인격적인 교제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거하다(meno)'는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로,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생명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묾'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증언의 확산 : 세례 요한의 증언은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떠나보내는 겸손한 증언이었고, 안드레는 형제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중매쟁이' 역할을 합니다.

이름의 변화 : 예수님은 시몬의 현재 모습뿐만 아니라, 장차 교회의 반석(게바)이 될 미래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아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루실 영광스러운 미래를 빚어 가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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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안정입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신앙은 '카더라' 통신이 아닙니다. "와서 보라"는 초청에 응답하여, 말씀 묵상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meno)'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번 한 주,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 곁에 머무는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그때 우리 자녀들과 배우자를 향한 주님의 시선(미래의 가능성)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안드레처럼 내가 만난 예수님을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거창한 설득이 아니라 "와서 보라"는 단순한 초청이면 충분합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를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주님이 빚어가실 '게바'로서의 미래를 축복하며 격려하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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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51절 : "하늘이 열리리라" - 중심을 보시는 주님 :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중심을 아시며, 편견을 넘어 '와서 보라'는 초청을 통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인자'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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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빌립을 직접 찾아가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을 만났다고 전하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놀라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묻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십니다. 이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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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서는 만남 :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지역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빌립의 끈질긴 권유("와서 보라")와 예수님의 전지하심(All-knowing) 앞에 무너집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 : '무화과나무 아래'는 유대인들이 묵상하고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며 고민하던 그 은밀한 시간과 마음을 이미 다 보고 계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야곱(속이는 자)과 대조되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야곱의 사다리 (성취) : 51절은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꿈을 성취하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돌베개 위로 사다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인자(예수님)' 자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를 잇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전 그 자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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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흘리는 눈물과 기도가 헛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아무도 너를 주목하지 않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직장에서의 정직한 몸부림, 가정에서의 남모르는 수고를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 사회는 학연, 지연, 출신 성분(나사렛)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사람을 외모나 조건으로 판단하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라는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우리 안에 계신 보배로우신 예수님으로 인해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됩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꽉 막힌 현실의 문제 앞에서도, 하늘과 땅을 연결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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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우리의 깊은 중심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섬세한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거하며 메시아를 발견했던 것처럼, 우리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분주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주님 안에 머무는 기쁨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와서 보라"는 주님의 초청에 날마다 응답하여, 말씀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옵소서.

때로는 나사렛 같은 초라한 현실과 세상의 편견 앞에 위축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아래 홀로 있던 나다나엘을 지켜보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남모르는 눈물과 기도와 수고를 다 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위로를 얻게 하시고, 사람들의 평가가 아닌 주님의 인정하심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 자신이 세상에 나아가 "와서 보라"고 외치는 빌립과 안드레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이웃에게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막힌 담을 허물고 생명을 연결하는 복음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보이실 주님을 기대하며,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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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절 도움 자료 <<같은 동네 사람 가지고 뭘>>

요한복음 1장을 읽다 보면 꽤나 흥미로운,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빌립이라는 친구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나다나엘에게 달려와 “우리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에서 보았던 그분을 찾았다!”라며 호들갑을 떱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인물의 출신지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네요. 이때 나다나엘이 던진 한마디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역드립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Ἐκ Ναζαρὲτ δύναταί τι ἀγαθὸν εἶναι;)

여기서 나사렛(Ναζαρέτ)은 지명이고, 아가돈(ἀγαθὸν)은 ‘선한 것’ 혹은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점잖게 번역되어 있어서 그렇지, 요즘 말로 하면 “거기 완전 깡촌인데,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 정도의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이 발언의 진짜 맛을 느끼려면 나다나엘의 호적 등본을 좀 확인해 봅시다. 요한복음 21장 2절은 나다나엘을 갈릴리 가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가나, 익숙하시죠?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그 혼인 잔치의 동네입니다. 재미있는 건 가나와 나사렛의 거리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다르지만, 두 마을은 대략 6km에서 1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이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그 친밀도는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만 봐도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거기서 일을 거들고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초청을 받습니다. 옆 동네 잔치에 온 가족이 동원될 만큼, 두 마을은 사실상 하나의 생활권이었다는 뜻이죠.

이 지점에서 나다나엘의 비아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만약 그가 저 멀리 예루살렘의 고위 관료였다면, 이것은 중앙이 지방을 무시하는 엘리트주의적 발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나 역시 나사렛만큼이나 성경 이전에는 이름 한번 제대로 나오지 않던,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의 시골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의 반응은 낯선 촌동네에 대한 무지가 아닙니다. 너무 잘 알아서 생긴 편견입니다. 그는 아마 나사렛 장터의 먼지 날리는 풍경이나, 그 동네 사람들의 투박한 사투리, 별 볼 일 없는 경제 사정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흔히 옆 동네 고등학교를 두고 “거기? 알지, 별거 없어”라고 깎아내리는 그 미묘한 지역 라이벌 의식과 서열 본능이 이 짧은 문장에 농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화용론적으로 봐도 이 문장은 절묘합니다. “나사렛이 어디냐?”라는 정보 확인형 질문이 아닙니다. “거기서?”라는 반문은 대상을 이미 평가하고 분류를 끝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빌립이 “그분을 찾았다”라며 거창한 메시아 담론을 꺼냈을 때, 나다나엘은 가장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감각으로 찬물을 끼얹습니다. “야, 내가 거기 잘 아는데, 거긴 아니야.”

이것은 일종의 ‘근거리 로컬 반응’입니다. 위대한 것은 항상 저 멀리, 구름 위에 있거나 최소한 폼 나는 대도시 예루살렘 쯤에서 나와야 하는데, 내가 뻔히 아는 저 아랫동네에서 나왔다니 기가 찰 노릇인 거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다나엘의 이 편협한 확신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집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며 칭찬하십니다. 옆 동네 출신이라고 무시하던 사람에게, 됨됨이를 꿰뚫어 보는 통찰로 응수하신 겁니다.

결국 나다나엘의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성찰을 던집니다. 우리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혹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 주변의 가치를 너무 쉽게 깎아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진리는 꼭 근사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에 담겨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촌스럽고, 너무 가까워서 시시해 보이는 일상 속에, 혹은 내가 무시했던 그 ‘옆 동네’ 같은 관계 속에 기적의 포도주가 익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다나엘이 자신의 편견을 깨고 제자가 되었듯, 우리도 콧대 높은 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주변을 다시 둘러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우리가 “거기서 뭘?”이라고 무시했던 그곳이, 우리 인생의 가장 ‘선한 것(ἀγαθὸν)’이 시작되는 곳일지.

# 한원노트_이 글은 김한원 목사님의 헬라어 원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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