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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31-24:09 바울의 죄목 속에 드러난 진실


바울은 가이사랴로 무사히 호송되어 벨릭스 총독에게 인계되고, 헤롯궁에 갇힌 후 5일 만에 고발자들이 당도하여 바울의 죄목들을 고발하고 유대인들은 이에 동조한다.


31-35절 뜻하지 않은 일상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470여명의 로마군은 바울을 호송하여 안디바드리에 당도한 후 기병 70명만을 남기고 모두 귀대 합니다. 마침내 가이사랴에 당도하여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를 벨릭스에게 전하자 총독은 바울의 신분을 확인한 후에 심문을 미루고 헤롯궁에 감금합니다.

*

유대인들의 소요로 부당하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로마의 공권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울을 안전하게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합니다. 비록 미결수의 몸이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여 바울을 지키신 것입니다. 또한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도 벨릭스 총독에게 무사히 전달되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달리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과 연관한 것 외에는 로마를 향하여서는 무죄하다는 내용의 서신이기에 총독이 바울에 대해 판결하는 데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공문서였습니다. 이러한 보고서의 제작과 전달의 절차들이 천부장에게는 귀찮은 일이었겠지만 하나님은 역시나 이마저도 세밀하게 역사하사 바울을 변호하고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의 신분이 길리기아 출신의 로마인임을 확인한 후에 고발자들이 와야 재판이 성립될 수 있다고 심문을 미루고 바울을 헤롯궁에 감금하게 됩니다. 헤롯이 지은 궁이지만 로마의 총독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궁전의 감옥에 바울이 갇힌 것으로 보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비록 감옥에 갇힌 신세이지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서 왕궁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 상황입니다. 이 모든 역사와 사건들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여정들을 세밀하게 인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

때로 우리가 원치 않는 이끌림과 여정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주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여정과 만남과 길에는 주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그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깨닫고, 미처 깨닫지 못할 때라도 주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세밀한 부분까지 주님은 예비하시고 채우시고 진행하시며 역사하심을 또한 믿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기에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도 이곳 헤롯궁에서 앞으로 무려 2년정도 미결수로 있게 될 것인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이곳에 거하게 될 줄 모르는 상태입니다. 우리도 언제 지금의 일들이 다 마무리되고 해결되고 극복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매순간 매일 한걸음씩 우리의 갈 길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믿으며 갈 뿐입니다.


1-4절 탐욕에 눈이 멀면 역사를 보는 눈도 어두워집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은 더둘로 변호사와 더불어 총독을 찾아와 바울을 고발합니다. 더둘로가 벨릭스를 향하여 인사 치레로 평한 내용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고발이 총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심초사하지만 그런 모습 속에는 오히려 거짓됨을 숨길 수 없게 됩니다.

*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가진 신앙적, 신학적인 문제를 공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로마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제압하기 위해서 헬라파 유대인인 더둘로 변호사까지 고용합니다. 이는 그만큼 자신들의 신학적 기반이 한계가 있으며, 전통가운데 분명히 뭔가를 지켜오긴 했지만 그것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왜곡된 처지에서 바울의 주장과 복음의 능력을 제어할 수 없다는 판단하게 이렇게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도, 계시된 말씀에 대해서도,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보니 참복음을 알아보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급기야 영접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죽였고, 이제 그 복음의 증인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한계를 깨닫지 못한 무지함이 이제 고집스럽게 억지 찬양을 이끌어 냅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벨릭스는 여기 더둘로가 말한 것과 정 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훗날 피의 대학살을 자행하며 잔인하게 유대인 폭동을 진압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지도자들은 벨릭스를 통해 태평을 누리고, 유대 민족이 벨릭스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개선된 것을 감사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역사에 대한 심각한 배반입니다. 또 벨릭스를 더 귀찮게 하지 않게 하려고 대강 여쭙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죽고사는 문제를 신앙에 관한 진위 여부를, 민족의 종교와 앞날이 걸린 심각한 문제를 ‘대강’ 고발합니다. 물론 벨릭스의 심문 통해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의 자세가 너무도 불성실합니다.
*

일제 강점기 기간에 오히려 우리나라가 근대화 되었다고 하는 ‘근대화론’ 역사 인식을 가진 이들이 근자에도 우리나라에 있고, 그런 무리들의 선봉에는 뉴라이트라고 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개한 조선을 개화해주고 근대화 시켜서 여러가지고 도움을 얻었다고 하는 류의 주장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민족 수탈과 참상들 그리고 수많은 양민들의 강제 징용과 꽃다운 소녀들을 성노예로 끌고갔던 사실들까지 천인공노할 수많은 만행들을 버젓히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을 향해 근대화의 주역이라 칭송하는 역사관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죽어 갔는데 한편으로 친일 행각을 하면서 부화 권세를 누리며 수탈과 착취에 앞장 선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채 오늘까지 이르렀고 그 사이에 친일파들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분야에까지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가리기 위하여 멸공에 앞장서고 근대화론같은 왜곡된 역사관으로 진실을 가리려 하고 있으며, 이러한 진실을 밝히려 하는 이들을 빨갱이 좌파로 매도하여 여전히 우민정책과 선동으로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부정한 기득권 그리고 잘못된 율법관과 왜곡된 전통에 고착된 것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메시아 주님을 십자가에 달린 것도 모자라 그를 따르는 증인들마저 이토록 핍박하면서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과 탐욕에 눈이 멀면 이토록 역사를 왜곡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무엇보다 진리와 진실을 직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돈과 권력이 더 커보이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입니다(3.1절날 광화문에 모여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일장기를 들고서 집회를 하고 있는 무리들 가운데는 공교롭게도 많은 교인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선동하고 있는 자칭 지도자라 하는 이들 가운데는 이토록 역사인식에 무지하고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성경에 대해서도 편향된 시각을 갖고 성도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통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우리 교회의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까지 가지 않도록 신앙과 신학의 성숙함이 있어야 하며, 진리를 바로 알고 진실을 추구하며, 바른 신앙 위에서 바른 하나님나라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배우고 채워서 우리 신앙의 수준들을 더 바르게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정치에 고나심을 갖지 못하게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며, 그러면서도 권력에 빌붙어서 종교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것도 문제고, 정치적인 현실을 외면한체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모습도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민족 복음화를 외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의 목표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이 땅과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고 처신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우리는 부단히 말씀 앞에서 듣고 배우고 깨닫고 믿는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삶의 자리에 열매 맺기까지는 아직 배워야 할 것도 가야 할 길도 세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인내로 경주해 가야 할 우리 믿음의 여정입니다.


5-9절 타락한 성전신앙은 진리를 외면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발하고, 성전을 더럽게 한다고 고발합니다. 6b-8a는 현재 본문에 없는데 ‘그래서 우리의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햇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 그리고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하였나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심문하면 이 고발 내용을 알수 있다고 하고 이에 함께 온 유대인들이 동조하는 발언을 합니다.

*

사도행전의 저자는 유대인들의 고발 내용을 기록하면서 역설적이게도 바울의 사역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전염병처럼 번졌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에까지도 이 복음이 전해졌고, 흩어진 유대인들도 핍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 그래서 마침내 고대하던 그 말씀들이 성취된 역사를 경험하고 깨닫게 되어서 유대인들이 소요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진실을 대면하고도 전통과 고착된 신앙을 고수하느라 소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당대 이들이 고발하는 것처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 소요한 것은 아닙니다. 터무니 없는 선동적 고발입니다. 또한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합니다. 듣도 보도 못한 나사렛 시골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데 그곳에서 나온 예수님의 복음을 이들은 이단으로 보고, 그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을 이단의 우두머리라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편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단이지만 그 기준이 잘못되었기에 역설적이게도 지금 스스로 주님과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벨릭스 총독의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기에 고발자들은 최대한 바울을 정치적인 반란자로 고발하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기껏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했고, 오히려 자신들이 지금 전염병처럼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다고 고발합니다. 이는 예수님도 스데반도 동일하게 고발당한 죄목입니다. 당대 성전은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진즉에 떠났고, 강도의 소굴로서 예수님이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며 성전의 기능이 다했기에 척결한 상태인데도, 그 성전을 기반으로 부와 권세와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은 성전을 통해서 백성들을 기만하고 주도하면서 통제하고 미혹하고 선동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문제들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자신들이 성전을 더럽혔으면서도 예수님과 스데반과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한 이들은 이러한 선동에 옳다하며 따라갑니다.

*

신앙은 왕(주권)이 바뀌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복음을 알고 믿고 사는 자라면 우리의 삶은 전폭적으로 전환되고 소요되고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은 당연히 공동체와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주님을 신앙한다 하면서도 언행심사의 변화와 영향력이 없다면 참으로 나의 신앙이 바른 것을 믿고 사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를 영접한 우리들을 주님의 몸된 성전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며,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우리 몸을 거룩한 전으로 잘 유지하고 지켜가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몸된 성전을 더럽히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세우신 성전을 거룩하게 세워가지 못하고, 또다시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거대하게 지어서 성전이라 하면서 그것을 유지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다시금 생겨난 종교 기득권 세력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건물을 유지하고 기득권 세력들의 탐욕을 채우는데 이용당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성령이 거하시는 전,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되도록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주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의 삶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성도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 신앙의 내용들을 건강하게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의 거짓된 선동에 생각없이 따라가는 무지한 자로 갈아 가게 됩니다. 부디 깨어 일어나서 바른 말씀 위에 온전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의 일상을 늘 지켜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날마다 잘 깨닫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인도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거짓과 탐욕에 물든 신앙으로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어리석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게 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역사관을 바르게 세워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부르신 그 사명을 따라

주님의 몸된 성전으로서의 사명과

바른 교회관을 갖고 살게 하옵소서.

이 땅에 세워진 건물을 성전이라 하며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에

미혹되지 않게 하옵시고

그리스도인들의 다시 주의 말씀위에

바르게 신앙을 세워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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