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16-34 골방의 눈물이 차려낸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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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을 두려워하는 거래의 논리를 허물고, 형제를 위해 남몰래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다정한 환대의 식탁에 기꺼이 둘러앉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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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오월의 바람이 얼어붙었던 대지를 녹이고 우리를 다정한 생명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듯한 2026년 5월 18일의 아침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만물이 조건 없이 내어주는 햇살과 비를 누리며 푸르게 피어나는 이 눈부신 계절 속에서도,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차가운 현실의 논리에 쫓겨 타인의 작은 호의 앞에서도 마음의 방어벽을 내리지 못하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막막한 생존의 두려움 앞에서 참된 은혜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영혼에 창조주 하나님의 다사로운 샬롬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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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이 온 땅을 삼키던 시절, 형제 열 명이 다시 애굽 땅에 들어섭니다. 이번에는 막내 베냐민도 함께입니다. 총리의 집으로 안내받는 그들의 발걸음이 보입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풍성한 만찬으로 초대받은 자들의 반응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잠시 그들의 속내로 들어가 보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십여 년 전, 그들은 동생 요셉을 은 이십 세겔에 팔아넘겼습니다. 사람을 값으로 환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손으로 이제 값없이 주어지는 환대를 받게 되었으니, 이 식탁이 덫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이 타인을 도구로 대했기에, 타인의 호의 속에서도 음모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가장 깊은 비극 하나를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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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가르쳐온 언어는 단순합니다. 무언가를 받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짜란 없으며, 조건 없는 사랑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우리 안에 너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앞에서도 우리는 지갑을 더 꽉 쥐고, 호의 앞에서도 의심의 눈을 먼저 뜹니다. 형들의 두려움은 낯선 고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안에서도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더 거룩해야, 더 헌신해야, 더 많이 기도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 은밀한 계산법 말입니다. 값없는 십자가의 은총마저 두려움의 덫으로 오해하며, 우리는 은혜의 식탁 문 앞에서 서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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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문은 이 두려움의 논리를 조용히 부숩니다. 청지기가 형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애굽 사람의 입을 통해 선포된 이 복음은 놀랍습니다. 구원은 너희가 준비한 값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선물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 성경은 요셉의 내면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 보여줍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곡할 곳을 찾으러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권력을 쥔 자가 복수 대신 골방을 택했습니다. 칼이 아니라 눈물을 선택했습니다. 그 숨죽인 울음이 식탁을 차려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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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눈물을 오래 바라봅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수많은 제물이 아니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거래의 제물 대신, 용서와 인애의 눈물로 형제들을 위한 구원의 식탁을 예비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우리를 위해 골방에서 피눈물을 흘리셨을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배신과 거래의 논리, 그 비루한 밑바닥까지 다 아시면서도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생명의 만찬으로 불러 앉히시는 분 말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치른 값에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을 뚫고 먼저 다가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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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 앞에 오래 머물다 보면, 묵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됩니다. 묵상은 내가 원하는 답을 성경에서 빠르게 추출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박대영 목사는 성경을 "간절하게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 자들에게는 삶을 온통 뒤흔드는 메시지가 쏟아지는 책"으로 설명합니다. 신비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때, 말씀은 우리 안의 계산기를 내려놓게 하고, 우리가 굳게 닫아두었던 문을 조용히 두드립니다. 함석헌 선생은 영성의 깊이를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이라 했습니다. 참된 묵상은 나의 두려움과 이익을 앞세우던 마음이, 형제를 살려내시려는 하나님의 넓고 다정한 뜻으로 조금씩 고쳐지는 과정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분노를 흘려보내고 골방에서 눈물로 식탁을 준비했듯이, 묵상은 나의 오래된 거래의 논리를 내려놓고 그 환대의 식탁 앞에 무방비로 앉는 거룩한 항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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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자루를 꼭 쥔 채 문 앞에 서 계신 분이 있다면, 잠시 그 자루를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준비한 자격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골방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이미 식탁을 차려놓으셨습니다. 그 식탁에는 우리 자리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값없이 차려진 밥상 앞의 형들처럼이 아니라, 마침내 고개를 들고 식탁에 둘러앉은 형제들처럼, 그 환대를 기꺼이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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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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