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1-17 채색옷을 벗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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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이란 나를 돋보이게 하던 채색옷의 허상을 벗고, 찢긴 관계 한복판으로 비집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자비를 새롭게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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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의 햇살이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짙어가는 녹음 사이로 바람이 지나고, 만물은 제 자리에서 생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그 눈부신 풍경 아래, 누군가는 남모를 갈등의 밤을 지새우며 예배당 문을 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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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장의 장막도 그렇게 시작된다. 야곱은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에게만 특별한 채색옷을 입힌다. 아버지의 편애가 빚어낸 그 옷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차별의 선언이었다. 형들은 요셉에게 편안히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낯선 타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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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현대인의 비극은 세상을 '나와 너'로 보지 않고 '나와 그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고. 열일곱 살 요셉은 형들을 '그것'으로 취급했다. 아버지에게 고자질할 대상, 꿈속에서 자신에게 절할 존재들. 믿음의 가문이라 불리던 야곱의 집은, 그렇게 이기심과 특권 의식이 서로를 증오하게 만드는 장소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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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도 끊임없이 속삭인다. 더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빛날 수 있다고. 본회퍼가 경고했던 그 '값싼 은혜'처럼, 우리는 종종 신앙마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채색옷으로 두른다. 요셉의 꿈이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형들 앞에서 과시하는 순간 그 꿈은 은혜가 아니라 상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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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엉망이 된 가족을 외면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자끄 엘륄이 기술 문명의 효율성 논리가 인간의 약함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때,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논리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의 교만과 형들의 살의가 뒤엉킨 그 비루한 바닥으로 침묵 속에 들어오신다. 그 어긋난 관계의 틈새를 통해, 훗날 온 가족과 뭇 생명을 기근에서 건져낼 구원의 이야기를 엮어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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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묵상이 우리를 데려가야 할 자리다. 묵상이란 나와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는 일이다. 성경에서 성공의 공식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교만의 채색옷을 아프게 내려다보는 것이다. 타인을 '그것'으로 취급했던 차가운 시선을 성찰하고, 그 시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했는지를 천천히 마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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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자기 자리의 샘을 파는 일처럼. 세상의 화려한 갈증 해소제를 찾아 헤매는 방황을 멈추고, 내가 딛고 선 남루한 일상의 자리에서 말씀의 삽을 깊이 밀어 넣을 때, 그 척박한 바닥에서 은총의 샘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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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길에서 길을 잃고 들판을 방황하던 요셉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찾습니까. 우리도 그 질문 앞에 선다. 채색옷을 벗은 자리에서, 찢긴 관계를 그대로 안은 채,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삶을 어떻게 꿰매고 있는지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 그 묵상의 자리로 당신을 초대한다.심부름 길에서 길을 잃고 들판을 방황하던 요셉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찾습니까. 우리도 그 질문 앞에 선다. 채색옷을 벗은 자리에서, 찢긴 관계를 그대로 안은 채,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삶을 어떻게 꿰매고 있는지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 그 묵상의 자리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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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고 흠결이 없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율법의 무게를 내려놓아도 좋다. 하나님은 우리가 채색옷을 입었을 때가 아니라, 그 옷이 벗겨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더 깊이 우리를 찾아오신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으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은혜의 옷이다. 세상의 채색옷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오직 그분의 옷만이 우리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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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봄날, 곁에 있는 이를 다시 보라. '그것'이 아니라 '너'로.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광야를 걷는 순례자로. 묵상은 결국 그 시선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나를 새롭게 보고, 하나님을 새롭게 보고, 관계를 새롭게 보는 그 고요한 자리에서, 찢긴 것들이 꿰매어지고 어긋난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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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옷을 벗는 일은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옷을 입기 위한 준비다. 완벽하고 흠결이 없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율법의 무게를 내려놓아도 좋다. 하나님은 우리가 채색옷을 입었을 때가 아니라, 그 옷이 벗겨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더 깊이 우리를 찾아오신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으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은혜의 옷이다. 세상의 채색옷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오직 그분의 옷만이 우리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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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에게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무엇인가. 당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낸 옷은 아닌가. 그 옷이 무거워 지쳐 있다면, 이제 그 자리에 잠시 앉아도 좋다. 말씀 앞에 고요히 머물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오래 잘못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는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이 묵상이다. 그것이 기도다. 그것이 은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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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