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9:1-23 텅 빈 공명통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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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살아남는 세상의 폭력 앞에서, 감옥의 밑바닥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은혜에 삶을 잇댈 때 비로소 우리의 텅 빈 일상은 세상을 위로하는 가장 깊은 공명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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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발의 집 안에 서 있는 요셉을 상상해 본다. 그는 애굽 친위대장의 집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의 손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그의 눈은 집안의 질서를 살피며, 그의 발은 주인의 명령이 닿는 곳 어디든 향한다. 성경은 이 장면을 두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들여다보면 이 '형통함'은 요셉 자신의 번영이 아니다. 그는 주인의 이익을 위해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눈부신 계절의 빛 아래서도 그 청년의 눈빛에는 무언가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있었을 것이다. 인격이 아닌 기능으로만 평가받는 자의, 말할 수 없는 고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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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효율적입니까, 당신은 이 조직에 어떤 가치를 더합니까.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상대를 고유한 인격으로 대하는 '나와 너'의 만남, 그리고 상대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은 이 두 번째 관계의 가장 적나라한 얼굴이다. 그녀에게 요셉은 '너'가 아니었다. 그저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그것'이었을 뿐이다. 요셉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며 단호히 돌아선 것은, 단순한 도덕적 결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도구로 환원시키는 세상의 질서를 향한 거룩한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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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은 그 저항에 더 큰 폭력으로 응답했다. 억울한 누명, 빼앗긴 겉옷,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감옥. 함석헌은 고난을 두고 "씨알은 껍질이 깨어져야 싹이 난다"고 했지만, 그 말은 껍질이 깨지는 순간의 아픔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요셉의 감옥은 단순한 물리적 감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올곧게 살려다 세상으로부터 내동댕이쳐진 자의 실존적 밑바닥이었다. 세상의 모든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완벽한 파산이었다. 자크 엘륄이 말했듯, 기술과 효율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은 그 논리에 저항하는 자를 가차없이 탈락시킨다. 요셉이 던져진 감옥은 그 탈락의 냉혹한 종착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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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이 짧은 문장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하나님은 감옥 문을 부수지 않으셨다. 억울함을 당장 해소해 주지도 않으셨다. 대신 그 캄캄하고 서늘한 밑바닥으로 친히 내려오시어 요셉의 곁에 가만히 앉으셨다. 쓸모가 있을 때만 환대하는 제국의 논리와 달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리, 아무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 자리를 찾아오신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본래 얼굴이다. 우리를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 올리시는 분이 아니라, 실패와 억울함의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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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동행을 감각하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 묵상이다. 묵상을 박대영은 '악보를 연주하는 행위'에 빗댄다. 위대한 작곡가가 악보를 건네는 것은 연주자가 그것을 기계적으로 재생산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연주자 자신의 숨결과 감각이 악보 안으로 들어와, 그 음표들이 지금 이 순간의 살아있는 소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렉시오 디비나의 전통이 말하는 말씀 읽기도 다르지 않다.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내 삶을 가져다 놓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내 숨결에 닿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헤시카즘의 고요함은 바로 그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와 자유의 악보 앞에 내 영혼을 열어두는 것. 그 고요한 개방 속에서 혼돈은 샬롬으로, 절망은 생명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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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이야기는 한 가지 오래된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첼로의 공명통. 악기의 안쪽은 캄캄하고 텅 비어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쓸모없는 빈 나무통일 뿐이다. 그러나 연주자가 활을 들어 현을 그을 때, 바로 그 텅 빈 안쪽이 소리를 품고 키워 세상으로 내보낸다. 가득 채워진 곳에서는 나올 수 없는 깊고 풍성한 울림이, 비어있었기에 가능해진다. 당신의 일상이 지금 감옥처럼 캄캄하고,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에 지쳐 있다면, 혹 그 텅 빔이 도리어 은혜의 공명통이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내가 무언가를 채워 넣어 스스로 증명해 보이려는 수고를 멈추고, 감옥 바닥까지 찾아오시는 주님의 활 앞에 내 삶을 조용히 내어드릴 때, 우리의 캄캄한 일상은 마침내 가장 깊은 자리에서 세상을 위로하는 선율을 품어 안게 될 것이다. 그 연주에, 오늘도 당신을 조용히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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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