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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01-22 세겜의 우상을 묻고 벧엘로 올라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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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의 비극(34장) 이후 두려움에 빠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 명하시고, 야곱은 가족의 우상과 귀고리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순종의 길을 나섭니다. 벧엘에 이르러 '엘벧엘'이라 이름 짓고 제단을 쌓으니 하나님이 나타나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재확인하시며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절정 직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 길 위에서 숨을 거두고, 장남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지릅니다. 야곱은 이를 듣고도 침묵합니다. 신앙적 절정과 수평적 파국이 한 호흡 안에 교차하는 이 본문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진흙탕 속에서도 언약을 끝내 완성해 내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은혜를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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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학적 배경으로 보면, 고대 근동에서 이방 신상(드라빔)과 귀고리를 매장하는 행위는 단순한 물건의 처분이 아니라 과거의 세계관 및 의지처와 결별하는 엄숙한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는다는 것은 그것들을 땅 아래, 죽음 너머로 영구히 추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행위 또한 단순한 성적 타락이 아니라 고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의 권위와 가문의 통치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정치적 찬탈 행위였습니다(삼하 16:21-22; 왕상 2:22 참조).

# 신학·정경적 배경으로는, 창세기 35장이 야곱의 개인적 신앙 여정이 마무리되고 열두 아들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태동하는 과도기적 장면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30년 전 도망자로 돌베개를 베고 벧엘의 하늘 사다리를 보았던 야곱이 이제 그 자리에 돌아와 제단을 쌓음으로써 인생의 전반부가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마무리를 영웅의 개선가가 아니라, 처참하게 일그러진 역기능 가정의 민낯과 함께 기록합니다. 

# 송민원 박사가 말하는 '수평적 읽기'의 관점이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빛납니다. 족장들의 삶은 무결점의 영웅담이 아니라 지독한 이기심과 우상 숭배와 권력 투쟁이 뒤엉킨 역기능 가정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추악한 수평적 진실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이스라엘을 빚어내십니다. 이 수직적 은혜야말로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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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세겜의 안주를 깨우는 부르심과 우상의 매장 : 파국 앞에서 들려오는 귀환의 음성

하나님은 우리의 세속적 파국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처음 언약의 자리로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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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딸 디나의 능욕과 아들들의 살륙(34장)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제단을 쌓으라(קוּם עֲלֵה בֵית-אֵל, 쿰 알레 베이트-엘)." 야곱은 집안의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모아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온 가족이 정결하게 한 후 길을 나섭니다. 하나님이 주변 고을들에 크게 두려움을 주사 아무도 야곱 일행을 추격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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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단락 안에는 뼈아픈 영적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전 "나를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고 서원했습니다(창 28:20-22). 그러나 위기가 지나자 그는 영적 본향인 벧엘로 가지 않고 문명이 발달한 세겜에 땅을 사고 안주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수평적 타협의 고질적인 패턴입니다. 위기 앞에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위기가 지나면 세상의 세겜에 천막을 치는 것. 그 안주의 대가가 딸의 강간과 아들들의 학살이라는 가문의 파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장 수치스러운 파국의 자리에서 야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일어나라(קוּם, 쿰)." 이 한 마디는 명령이자 초대입니다. 절망에 주저앉은 자를 향해 다시 일어서라고, 처음 만남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야곱이 순종하여 우상들을 파묻고 길을 나서자, 하나님이 원수들의 마음에 공포를 주사 보호하십니다. 인간이 우상을 묻고 한 걸음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길을 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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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삶에도 세겜의 위기가 닥쳐왔습니까? 그것은 당신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잊고 있던 벧엘의 서원을 기억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알람일 수 있습니다. 가족 안에 은밀히 들어온 세속의 가치관들,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탐욕의 부적들,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허망한 의지처들을 십자가의 상수리나무 아래 파묻는 결단이 없이는 결코 벧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세속과의 단호한 단절이 하나님의 보호를 향한 첫 걸음입니다. 당신의 세겜을 떠나 벧엘을 향해 일어서십시오. 그 순종의 발걸음 앞에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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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절 엘벧엘의 제단과 재확인된 '이스라엘'의 언약 : 장소에서 인격으로, 서원에서 임재로

하나님은 인간의 수평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권적으로 언약을 갱신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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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일행이 벧엘(루스)에 도착해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אֵל בֵּית-אֵל)'이라 부릅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그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되고, 그곳이 '알론바구스(통곡의 상수리나무)'라 불립니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너의 이름이 야곱이지만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라"고 재확인하시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אֵל שַׁדַּי, 엘 샤다이)이라"며 생육·번성·열국과 왕들의 조상이 될 것,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줄 것을 선언하십니다. 야곱은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와 기름을 부어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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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도망자 야곱은 이 장소를 '벧엘(בֵּית-אֵל,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온갖 수욕과 배신과 슬픔을 겪고 돌아온 야곱은 그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이 미묘한 이름의 전치가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장소와 형식에 집착하던 미숙한 신앙에서, 그 장소를 채우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 자체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이 예배의 절정 위에 뜻밖에도 유모 드보라의 죽음이 겹칩니다. 드보라는 야곱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어머니 리브가의 팔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야곱이 어머니의 치맛폭에 숨어 속임수를 썼던 과거의 자아와 완전히 작별하는 문학적 신호입니다. 이제 야곱에게 인간적 의지처는 하나씩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 남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יִשְׂרָאֵ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이라는 이름을 다시 선포하십니다. 세겜에서 자식들이 살인자가 되고 가문이 무너지는 수평적 실패를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이유로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엘 샤다이'로, 즉 모든 인간적 불가능을 뛰어넘는 전능자로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야곱에게 쏟아부으십니다. 이 언약 갱신은 야곱의 도덕적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방적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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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껍데기뿐인 종교적 형식과 장소(벧엘)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 그분 자체(엘벧엘)와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예배와 기도가 장소의 형식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살아 계신 분을 직접 대면하고 있습니까. 아울러 당신이 세상에서 실패하여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느낄 때조차, 전능하신 하나님은 "너는 나의 이스라엘이다"라고 당신의 정체성을 다시 선포하십니다. 인간적 의지처였던 드보라를 눈물로 장사 지내고, 하나님의 언약 위에 당신의 돌기둥을 다시 굳게 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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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0절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탄생 : 집착의 허무한 끝과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손길

하나님은 세상의 우상이 생명을 구원할 수 없음을 폭로하시며, 슬픔의 자리에서 새 생명의 소망을 꽃피우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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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을 떠나 에브랏(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라헬이 극심한 산통 끝에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숨을 거두며 그 아들을 '베노니(בֶּן-אוֹנִי, 내 슬픔의 아들)'라 부릅니다. 야곱은 즉시 그 이름을 '베냐민(בִּנְיָמִין, 오른손의 아들, 능력의 아들)'으로 고쳐 부릅니다. 라헬은 에브랏(베들레헴) 길에 장사되고, 야곱은 그 묘 위에 비석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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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가장 애절하고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라헬은 이 서사에서 가장 강렬하게 욕망했던 여인입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며 생명 자체를 경쟁의 도구로 삼았고,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 깔고 앉으며 세속적 권리와 안전을 자기 몸 아래 가두려 했습니다. 요셉을 낳고서도 "여호와께서 다른 아들을 더하시기를 원한다(יֹסֵף, 요셉)"며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다른 아들'을 낳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생명을 잃습니다. 그토록 움켜쥐었던 드라빔은 그녀의 임종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했습니다. 라헬의 죽음은 헛된 집착과 우상 숭배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가슴 서늘하게 폭로합니다. 세상이 약속하는 것들은 우리가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라헬이 아들에게 붙인 이름은 '베노니(בֶּן-אוֹנִי)', 내 슬픔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어머니의 마지막 숨 속에서 나온 절망의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즉시 그 이름을 '베냐민(בִּנְיָמִין)', 내 오른손의 아들로 바꾸어 부릅니다. 오른손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능력과 권위와 승리를 상징합니다(시 118:16; 사 41:10). 야곱은 아내를 잃은 극심한 슬픔의 한복판에서, 그 아이를 절망의 이름 안에 가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소망으로 선포하여 이름 짓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거듭난 자의 시선입니다. 수평적으로는 가장 어둡고 처절한 상실의 밤이지만, 그 밤 안에서 이미 새벽을 향해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 그 고쳐 부름 안에 이스라엘의 신앙이 있습니다. 훗날 야곱 자신도 "내가 가나안 땅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라헬이 죽었다"고 회고하며(창 48:7) 그 슬픔을 끝내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을 삼키고 아이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고쳐 불렀을 때, 야곱은 이미 그 죽음의 자리를 십자가의 언어로 해석해 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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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이 라헬처럼 생명을 걸고 집착하는 드라빔은 무엇입니까. 자녀의 성공, 세상에서의 인정, 한 번도 내려놓아 본 적 없는 그 욕망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길가에 세워진 묘비처럼, 우리가 그토록 쌓아온 것들은 허무하게 그 자리에 남겨질 뿐입니다. 그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영혼이 숨을 쉽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찾아오는 예기치 않은 상실과 슬픔, 그 베노니의 자리에서 절망의 이름에 머물지 마십시오. 십자가 앞에 그 슬픔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드시는 베냐민의 소망으로 다시 이름 지으십시오.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베노니를 함께 안고, 함께 베냐민을 선포해 주는 믿음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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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2a절 르우벤의 패륜과 야곱의 침묵 : 역기능 가정의 적나라한 실존과 멈추지 않는 은혜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치욕스러운 죄악과 무너진 침묵의 현실 속에서도 구속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시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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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칩니다. 그 땅에 거주할 때 장남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거기서 멈춥니다. 징계도, 분노의 선언도, 아무런 조치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오직 침묵만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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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벧엘의 감격스러운 언약 갱신 직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직후, 야곱의 장막 안에서 상상하기 힘든 윤리적 파국이 벌어집니다. 고대 중동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것은 단순한 성적 타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와 가문의 통치권에 대한 공공연한 정치적 도전이었습니다. 훗날 압살롬이 반역하며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한 것(삼하 16:21-22),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청하다 죽임을 당한 것(왕상 2:22)이 모두 이 문법 위에 있습니다. 라헬이 죽자, 레아의 장자인 르우벤은 아버지의 총애가 라헬의 여종 빌하나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쏠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문의 실세(장자)임을 패륜으로 과시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 집안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나던 권력 다툼과 편애의 상처가 만들어낸 끔찍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야곱의 반응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וַיִּשְׁמַע יִשְׂרָאֵל)." 그뿐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 침묵은 창세기 34장에서 딸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아무 말 없이 이기적 계산만 하던 야곱의 침묵과 겹칩니다. 가장(家長)의 영적 권위가 회복되어야 할 자리에서 야곱은 또다시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갱신한 그 사람이, 자기 집안의 가장 추악한 죄에는 목소리를 잃습니다. 이것이 야곱 가정의 민낯이자, 성경이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이 장면에서도 야곱을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의 선택은 의도적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추악하고 무능하지만, 하나님은 이 쓰레기 더미 같은 수평적 현실을 우회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그 안을 뚫고 지나가 거룩한 역사를 완성해 내신다는 것. 르우벤의 패륜도, 야곱의 침묵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멈추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은혜의 두려운 끈질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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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우리의 신앙적 환상을 무참히 깨뜨립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제단을 쌓았다고 해서 우리 가정의 묵은 죄성과 갈등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번듯한 그리스도인의 가정 안에도 르우벤의 권력욕과 야곱의 비겁한 침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완전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적나라한 죄성과 무능함이 드러날 때마다 십자가의 보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치욕스러운 실패를 윤리적 잣대로만 정죄할 것이 아니라, 그 처참한 진흙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은혜를 함께 붙들며 울어주고 기도해 주는 에델 망대, 곧 하나님의 무리가 머무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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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수평적 실패와 추악한 죄악의 진흙탕 속에서도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빚어내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주님을 찾다가도, 

평안해지면 세겜의 안락함에 주저앉아 

영적 서원을 잊어버리는 우리의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드라빔을 몸 아래 숨기고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라헬처럼, 

우리도 알게 모르게 세상의 우상들을 품에 안은 채 

예배의 자리에 섰음을 회개합니다. 

아들의 패륜 앞에서 침묵으로 무너졌던 야곱처럼,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렸던 

우리의 비겁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세겜에 묻혀 있던 우상들을 

십자가의 상수리나무 아래 단호히 파묻고 

일어설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장소와 형식의 벧엘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 자체(엘벧엘)를 

깊이 대면하는 예배자로 세워 주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로서 

우리의 수평적 실패에도 아랑곳 않고 

언약을 갱신하시는 주권적 은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라헬처럼 집착하다 길 위에 묘비만 남기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삶에 찾아오는 베노니의 슬픔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해석하여 

베냐민의 소망으로 고쳐 부르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르우벤의 패륜과 야곱의 침묵처럼 

우리 안에 도사린 죄성과 무능함이 드러날 때마다,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은혜 앞으로 다시 기어나오게 하옵소서.

이토록 망가지고 일그러진 우리를 

여전히 '이스라엘'이라 불러 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이,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의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합니다. 

죄인들을 품으시어 거룩한 계보를 완성해 가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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