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4:18-31 탐욕의 할례와 야만의 칼날, 그리고 비겁한 가장: 일그러진 언약 가문의 영적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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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장 후반부는 세겜 땅에서 벌어진 야곱 가문의 총체적 영적 파산을 기록합니다. 하몰과 세겜은 할례라는 신앙의 표지를 야곱 가문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한 투자 수단으로 삼아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고,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습니다. 제삼일 극도의 고통 속에 있던 그들을 시므온과 레위가 기습하여 학살하고, 다른 형제들은 재물과 부녀자, 아이들까지 노략질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이 끔찍한 참극 앞에서도 아들들의 죄악이 아닌 자신의 안전과 생존만을 염려하고, 아들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폭력을 정의로 포장하며 대화는 차갑게 끊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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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고대 근동에서 성문은 재판과 상거래,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공적 광장이었습니다. 하몰과 세겜은 이 공적 공간에서 종교 의식인 할례를 사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자 계약으로 변질시킵니다. 그들의 논리는 노골적입니다. 잠시의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시므온과 레위의 기습 학살과 이어진 노략질은 고대 전쟁 윤리로 보아도 도를 넘은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 신학·정경적 배경으로 보면,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할례는 육신의 정욕을 베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겠다는 거룩한 신앙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34장에서 이 거룩한 언약의 징표는 이방인들에게는 재산을 불리는 상업적 계약 수단으로,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적을 무력화하는 살상의 덫으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한 예식이 인간의 탐욕과 복수심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는 비극입니다.
# 송민원 박사의 수평적 읽기 관점은 이 본문을 도덕적 위인의 이야기가 아닌, 파괴된 인간 관계의 총체적 파국으로 읽도록 안내합니다. 종교를 경제적 이익으로 소비하는 세속 자본주의적 탐욕, 정의를 빙자하여 언약의 징표를 살육의 무기로 삼는 위선적 신앙, 이웃의 피 흘림 앞에서 오직 나의 생존만을 계산하는 비겁한 이기주의, 이 세 가지 악이 얽히며 수평적 관계는 완벽하게 붕괴됩니다. 그러나 이 참담한 파국의 끝에서도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이 병든 가정을 벧엘로 불러 올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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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4절 탐욕이 신앙을 삼키는 자리 : 종교를 소비하는 세상의 민낯
하나님은 거룩한 신앙의 표지를 세속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인간의 탐욕을 아시며, 그 기만의 민낯을 온전히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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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몰과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이 내건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세겜은 디나를 사랑했기에 지체 없이 할례를 받고, 두 사람은 성문으로 나아가 읍 사람들 앞에 섭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23절)."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남자가 이 경제적 논리에 설득되어 할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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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하몰과 세겜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낯선 종교 의식을 기꺼이 수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문 광장에서 읍 사람들을 향해 쏟아낸 그 말 한마디가 그들의 진짜 본심을 폭로합니다. 그들은 야곱 가문의 신앙, 곧 여호와의 언약에 동화될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잠시의 육체적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투자라고 계산했을 뿐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며 이것이 언약의 표징, 곧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거룩한 언약의 살아있는 징표라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오트(אוֹת), 곧 '표징'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진 약속의 자리이며, 인간의 살 위에 새겨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세겜의 성문에서 이 거룩한 징표는 "저들의 재산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입장권"으로 전락합니다. 거룩한 오트가 세속의 계약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가나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끄 엘륄이 통찰했듯, 기술과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효율과 이익의 논리로 환산됩니다. 신앙도, 사랑도, 심지어 몸에 새기는 언약의 징표조차도 예외가 없습니다. 종교가 탐욕에 의해 철저히 소비되고 도구화되는 일은 3천 년 전 세겜의 성문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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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떤 기대를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있습니까? 예배의 자리에, 기도의 골방에, 성찬의 식탁 앞에 앉을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 내게 이익이 되겠지." "이 정도 헌신하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겠지." 세겜의 논리는 때로 가장 경건한 언어를 입고 우리의 심장 안쪽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결코 이익과 거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의 탐욕 그 자체를 베어내도록 주어진 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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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9절 언약의 표지가 칼날이 되는 날 : 할례를 무기로 삼은 야만
하나님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 안에서도 인간의 죄성을 정확히 보시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신 신앙의 언어가 죽음의 무기로 변질되는 것을 애통해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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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일, 모든 남자가 할례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을 기습합니다. 그들은 하몰과 세겜을 포함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데려옵니다. 이어 야곱의 여러 아들들이 시체들이 가득한 성읍으로 달려들어 노략질을 시작합니다. 양과 소, 나귀, 재물, 부녀자들, 어린아이들까지, 살아있는 것과 값나가는 것은 모두 빼앗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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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행동은 정당방위를 아득히 넘어선 광기 어린 학살이었습니다. 앞 단락에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경제적 도구로 삼았다면, 이 단락에서 언약의 자손들은 할례를 살상의 덫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신앙의 언어가 가장 교활한 속임수의 미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7절부터 가세한 야곱의 여러 아들들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심에 취해 칼을 휘둘렀다면, 나머지 형제들은 그 죽음의 피바다 위에서 재산과 가축,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로로 잡아 노략질을 감행합니다. 히브리어 바자즈(בָּזַז), 곧 '약탈하다'는 단어는 전쟁에서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동생의 명예 회복은 핑계였을 뿐, 그들의 실체는 가나안의 탐욕스러운 강도 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단 한 아이의 눈물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그 조화를 받아들이겠느냐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한 사람의 수치를 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은 디나를 위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야곱 가문의 명예라는 추상적인 정의를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 가장 잔인한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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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신앙은 지금 누구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습니까? 거룩한 십자가는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 주신 은혜의 표지인데, 우리는 그것으로 내 생각과 다른 이를 정죄하고 배제하고 언어의 칼로 찔러 죽이는 무기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분노가 아무리 정의롭게 포장되어 있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나의 감정과 사적인 복수를 위해 이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시므온과 레위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포장된 혈기와 탐욕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끕니다. 십자가를 타인을 찌르는 칼이 아닌, 자신을 죽이고 세상을 품어내는 생명의 도구로 붙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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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절 나만 살면 된다 : 비겁한 가장의 이기적 고독
하나님은 이웃의 피 흘림과 공동체의 파산 앞에서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셈하는 비겁한 이기주의를 책망하시며, 진실한 책임의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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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끔찍한 학살과 노략질을 지켜본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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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강간 소식을 듣고도 침묵했던 야곱이 아들들의 대학살 앞에서는 마침내 입을 엽니다. 그런데 그 책망의 언어를 수평적으로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아들들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과 약탈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없습니다. 무고하게 피 흘린 세겜 사람들을 향한 미안함도, 언약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신학적 애통함도, 상처 입은 디나의 영혼을 향한 위로도 없습니다.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들어보십시오. "내게, 나로 하여금, 나는, 나를, 나와 내 집." 히브리어 아니(אֲנִי), 곧 '나'만이 이 문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공포는 주변 족속들이 연합하여 자신을 공격하면 자기 목숨과 재산이 끝장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가족을 인간 방패로 앞세우고 맨 뒤에 숨었던 야곱의 치독한 이기주의가 34장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다시 폭로됩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그 사람이 맞습니까. 가장으로서의 영적 권위와 도덕적 리더십이 완전히 붕괴된 자리입니다.
함석헌은 고난의 현장에서 도피하는 인간을 두고 "씨알은 흙 속에 묻혀 죽어야 꽃을 피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꽃을 피워야 할 그 흙 자리에서 자꾸만 도망칩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비명에 귀를 닫는 것, 이것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비명에 귀를 닫는 것, 이것이 야곱의 죄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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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당신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얼마나 아픈가"가 아니라 "이 일이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가"를 먼저 계산한다면, 우리는 야곱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세상의 평판이나 눈앞의 손해를 두려워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윤리와 신앙의 본질을 먼저 아파해야 합니다. 자신의 알량한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비겁함에서 돌이켜, 철저히 자아를 부인하는 은혜를 날마다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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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절 끝나지 않는 복수의 노래 : 정당화된 폭력의 차가운 결말
하나님은 폭력이 폭력을 낳고 보복이 보복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끝없는 악순환을 아시며, 친히 그 사슬을 끊기 위해 십자가의 어린양이 되신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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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책망을 들은 시므온과 레위가 대답합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이 한 마디 반문을 끝으로 창세기 34장의 서사는 아무런 해결도, 어떤 화해도 없이 차갑게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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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의 이 반문은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했던 아버지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딸이 겁탈당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이제 와서 자기 안전을 걱정하며 책망하자 아들들은 예리하게 찌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야곱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영적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은 가장에게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이끌 도덕적 언어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평적 읽기로 볼 때, 이 마지막 구절은 인간 사회에 내재된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과 그 정당화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세겜의 폭력,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 나머지 형제들의 약탈, 그리고 끝까지 "내가 옳다"고 맞서는 이 차가운 평행선 위에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 곧 참된 평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누구도 회개하지 않고, 누구도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34장을 이처럼 해결되지 않은 질문으로 끝맺음으로써 섬뜩한 고발을 남깁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분노와 정의가 얼마나 잔인한 비극으로 치닫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5장 1절에서 하나님은 침묵을 깨고 이 병든 가정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탐욕과 폭력과 비겁함으로 얼룩진 세겜의 자리에 하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제단의 자리로, 언약의 자리로, 벧엘로 다시 불러 올리십니다. 이것이 이 참담한 본문 속에 숨겨진 가장 작고 가장 강한 은혜의 빛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와 너(I-Thou)'와 '나와 그것(I-It)'으로 구분했습니다. 세겜 땅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나와 그것'의 세계였습니다. 하몰과 세겜에게 야곱 가문은 재산을 탈취할 '그것'이었고, 시므온과 레위에게 세겜 사람들은 제거해야 할 '그것'이었으며, 야곱에게 이웃의 고통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그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그것'의 세계로 찾아오셔서 "일어나라"고 부르심으로, 다시 '나와 너'의 관계, 곧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된 만남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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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 안에 아직도 "그가 먼저 나를 무시하지 않았느냐"며 칼을 갈고 있는 자리가 있습니까? 내가 받은 상처가 크기에 내가 돌려주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논리, 그것이 시므온과 레위의 논리이며 우리 시대가 가장 사랑하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그 브레이크 없는 보복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나의 정당성을 끝까지 주장하며 상대를 찌르는 자리에서 돌이켜, 나의 권리를 내려놓고 용서를 선포하는 거룩한 벧엘의 제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겜의 자리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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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파괴된 인간의 탐욕과 폭력 한가운데서도
묵묵히 당신의 백성을 붙드시는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본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세겜의 성문에서 할례라는 거룩한 오트(אוֹת)를
재산을 불리는 계약서로 둔갑시킨 하몰과 세겜의 탐욕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언약을 나의 형통과 성공을 보장받기 위한
조건으로 소비했던 날들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기도의 골방에, 성찬의 식탁 앞에서도
"내게 이익이 되겠지"를 먼저 계산했던 우리의 세속적인 심장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또한 시므온과 레위를 닮았습니다.
나의 분노를 정의로 포장하고, 나의 혐오를 신앙의 언어로 치장하여
거룩한 십자가를 타인을 찌르는 칼로 휘두른 적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신 복음의 말씀을
누군가를 배제하고 정죄하는 무기로 삼았던
종교적 위선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야곱을 닮아 이웃이 피 흘리는 자리에서도
나의 체면과 나의 안전을 먼저 셈했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형제가 쓰러지는 현장에서
"이것이 내게 무슨 손해인가"만을 따지며 비겁하게 뒤로 물러섰습니다.
이 치독한 이기심, 이 작고 단단한 '아니(אֲנִי)'의 감옥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주시옵소서.
끝까지 "내가 옳다"고 맞서며 보복의 칼을 놓지 않았던
시므온과 레위의 차가운 물음이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음도 아뢰옵니다.
당한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복수의 논리가 정의의 옷을 입고
우리의 입술 위에 앉아 있을 때,
친히 샬롬(שָׁלוֹם)이 되어 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보복의 사슬을 끊기 위해 스스로 찢기신 그 어린양의 이름으로,
우리도 나의 정당성을 내려놓고 용서를 선포하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탐욕과 폭력과 비겁함으로 얼룩진 세겜의 자리에 우리를 버려두지 마시고,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그 음성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소서.
언약의 제단 앞에, 회개와 경배의 자리에, 다시 무릎 꿇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끝없는 복수의 사슬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끊으시고
참된 화해와 평화가 되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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