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8-46 예수님은 생명의 권세를 가지신,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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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 갇힌 친구 나사로가 있는 무덤으로 가셔서, 믿음이 부족한 마르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을 말씀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어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이미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수의에 싸인 채 무덤에서 살아 나왔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표적을 본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나, 일부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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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는 당시 유대 종교의 중심지와 가까워 예수님의 활동이 큰 주목을 받았던 곳입니다. 나사로의 장례는 유대인의 장례 관습(돌무덤, 나흘 만에 시신이 썩기 시작한다는 믿음)을 따랐으며, 많은 유대인 조문객들이 모인 것은 이 가족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 죽음의 나흘 : 유대 문화에서 영혼은 사망 후 사흘 동안 시신 주위를 맴돌다가 나흘째 되는 날 완전히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흘 후에 도착하셔서 일으키신 것은 '진짜 죽음'을 이기신 권능을 상징하여, 논란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는 사건이었습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요한복음의 '표적' :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표적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언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라는 말씀을 최종적으로 증명하며,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인 예수님의 신성(Divine Nature)과 영광을 절정에 이르게 보여줍니다. / 예수님의 비통함 : 38절의 예수님의 '비통히 여기심(ἐμβριμάομαι, 엠브리마오마이)'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죽음과 그 죽음을 낳은 죄의 권세에 대한 거룩한 분노의 감정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서 고통에 공감하심과 동시에, 참 하나님으로서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음을 신학적으로 보여줍니다.

# 철학적/인문학적 의의 : 실존적 질문 : 죽음은 인류가 직면하는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한계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무력한 슬픔(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울음)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 능력(나사로의 부활)을 대조시키며,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궁극적 문제에 대한 신적 해답을 제시합니다. / 믿음과 상식 : 마르다의 반응("냄새가 납니다")은 믿음과 인간적 상식, 이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현실의 한계(죽음, 냄새)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자신을 개방하는 행위임을 인문학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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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40절 성자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시어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비통해 하시며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무덤은 큰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인 마르다는 "주님, 이미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납니다"라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미리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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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 단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에 맞서는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믿음이 이 영광을 보는 유일한 통로임을 증거합니다.

38절의 '비통히 여기시고(ἐμβριμάομαι, 엠브리마오마이)'는 '분노하다', '꾸짖다'의 뜻이 강하며, 33절의 '눈물(δάκρυον, 다크뤼온)'이 연민의 표현이었다면, 38절은 죽음 자체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표현하며 죽음을 정복하려는 주님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39절의 '냄새가 나다(ὄζω, 오조)'는 부패가 시작되어 구제불능 상태임을 현실적으로 고발합니다.

마르다의 "냄새가 납니다"는 인간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대변합니다. 그녀는 부활이 미래의 일(11:24)임을 믿었지만, 현재의 기적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믿음이 우리의 상식과 계산을 뛰어넘어 불가능한 가능성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으면" 현재적 영광(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음을 제시하며, 이는 믿음의 본질이 시제(時制)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신뢰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이미 막힌 것을 여는 사건들에서 나타났습니다. 마가복음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막 5:35-43)에서처럼, 예수님은 '늦었다'는 인간의 판단(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는 마르다의 판단)을 뒤엎고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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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과 비관적 전망 속에서 '미래가 없다'는 절망의 '냄새'가 가득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삶의 문제(취업, 관계, 재정) 앞에서 '이미 늦었다', '이미 실패했다'는 마르다의 절망적인 상식에 안주하는 대신,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믿음을 요청받습니다. 가정 내의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갈등이나 자녀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과 치유의 역사를 신뢰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장의 정체나 시대적 도전에 직면할 때 '구태의연함'이나 '현실의 벽'이라는 냄새를 맡기 쉽습니다.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교회의 관행, 낡은 사고방식, 기득권을 대변하는 시스템을 치우고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향해 공동체가 개방될 것을 촉구합니다. 이는 헌신적인 봉사(계산하지 않는 믿음)와 불가능을 향한 도전(전도, 사회적 약자 돌봄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은 불의와 비리, 무력감 같은 '죽음의 냄새'를 맡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는 단순히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그 죽음의 세력에 맞서는 거룩한 분노를 품고 공의와 진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개혁이나 개선 앞에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약속은, 크리스천 리더십에게 현실을 개혁할 용기와 비전을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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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42절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신뢰와 순종의 기도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확증하십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알았다고 고백하십니다. 이어서 이 기도는 주변에 서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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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 짧은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이며, 그 권능의 근원은 성부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ἐπῆρεν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ἄνω)"라는 표현은 유대인의 기도 자세를 따르면서도, 성부와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기도가 이미 응답받았음을 알고 계셨고, 이는 감사의 기도로 나타납니다. '듣는 줄(ᾔδειν)'이라는 단어는 지성적인 앎을 넘어선 관계적 확신, 즉 본질적인 일치를 의미합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요 17장)와 같이,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무리들의 연약한 믿음을 돕기 위한 공적인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성부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순종을 보여주는 동시에, 성자로서의 권능이 성부와의 분리되지 않는 관계(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비롯됨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표적은 단순한 마술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구원의 역사임을 확증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잔을 받으시기로 결단하는 기도의 모습(막 14:36)은, 이 기도의 태도(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일치)와 맥을 같이합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생명으로 승리하는 순종이라면, 겟세마네는 죽음을 통해 승리하는 순종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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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기도는 종종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순종의 고백임을 깨닫게 합니다. 개인의 기도 생활에서 '무엇을 주십시오' 이전에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를 묻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나 배우자를 위한 기도가, 나의 소원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중보의 기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이나 사역은 반드시 기도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때 기도는 '교회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처럼 성부께 대한 확신에 찬 감사의 기도는 공동체의 분열을 막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하는 영적 기준점이 됩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과나 능력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신뢰하는 기도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특히 리더의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지시나 명령 이전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모습을 통해 동료나 부하 직원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신뢰를 심어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에 앞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자체가 응답임을 확신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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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44a절 성자 하나님은 말씀의 권능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새 생명을 창조적으로 불러내시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매인 채,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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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의 창조주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며, 그분의 말씀은 죽음의 세력조차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짐을 증거합니다.

"큰 소리(φωνῇ μεγάλῃ, 포네 메갈레)"는 권위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나사로의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 전체를 향한 선포였습니다. "나오라(δεῦρο ἔξω, 데우로 엑소)"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창조의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창 1:3) 말씀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듯이,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무(無)의 상태에서 '생명'이라는 유(有)를 불러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곧 창조주의 말씀과 동일한 권능을 가짐을 보여줍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모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의 예표이며,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심을 시대를 초월하여 보여줍니다.

구약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겔 37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뼈들에게 임하여 생기를 불어넣어 군대가 되게 한 사건은, 예수님의 명령이 죽음의 절망을 생명의 군대로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연결해 줍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광풍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라, 고요하라" 꾸짖으신 사건(막 4:39)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물리적 자연법칙을 넘어 생명의 영역까지 다스리는 주권자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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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에서 습관처럼 굳어진 죄악, 절망, 무기력, 중독과 같은 모든 '묶여있는 상태'는 영적 죽음의 수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힘이 아닌, 예수님의 "나오라"는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묶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선포하는 것은, 나사로를 일으킨 창조적 권능을 나의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됩니다. 가정 내에서 끊기 힘든 악순환이나 부정적인 대화의 패턴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로 끊어내고 생명의 언어로 변화를 선포하는 영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즉, 생명의 메시지를 '큰 소리'로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이는 세상의 '죽음의 문화' (생명 경시, 소비주의, 이기주의 등)에 맞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관을 대담하게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권능을 통해, 잠들어 있는 영혼과 침체된 교회의 사역이 다시 깨어나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직장 내의 부당한 관행, 부정적인 조직 문화, 혹은 사회의 부패한 구조는 영적 나사로의 무덤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말씀의 가치를 가지고 이 세상의 어둠의 구조를 향해 생명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때로는 불편함과 고립을 감수하더라도, "나오라"는 창조적 명령을 대리하여 공의와 윤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직장과 사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중요한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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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b절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생명의 자유를 완성하고 해방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살아난 나사로가 손발이 수의로 묶인 채 나오자,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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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명제: 요한은 이 명령을 통해 예수님은 죽음의 구속에서 해방된 자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 자유의 완성은 믿는 공동체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풀어 주어(λύσατε, 뤼사테)"는 '자유롭게 하다', '해방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강력한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끈을 푸는 행위를 넘어, 구속된 상태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셨지만, 그 생명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협력, 즉 공동체의 사역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구원이신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을 통한 교회의 사역(성화와 자유의 삶)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는 구속의 역사를 홀로 완성하셨지만, 죄와 절망과 망각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는 사명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완성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나사로의 수의는 죄와 죽음의 잔재이며, 이를 풀어주는 것은 해방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권능으로 성전 미문 앞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그가 자유롭게 뛰고 걸었던 사건(행 3:8)은, 영적인 해방뿐 아니라 육체적, 사회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성령 사역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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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아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 죄책감, 낮은 자존감 등 '영적 수의'에 묶여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과거의 묶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다니게' (자유롭게 활동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가정 내에서는 서로의 연약함과 과거의 실수를 붙잡아매는 '정죄의 끈'을 풀어주고, 용서와 격려의 말로 상대방의 영혼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돕는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는 종종 영적 생명은 강조하면서도 사회적/경제적/정서적 억압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는' 실천에는 미흡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나사로를 풀어준 사람들의 역할처럼, 사회적 약자, 갇힌 자, 고립된 이웃을 찾아가 그들의 짐을 풀어주는 해방의 공동체(디아코니아)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청년 세대의 고용 불안, 노인 세대의 고독사 문제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묶임'에 대해 구체적인 사회봉사와 옹호 활동을 펼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는 명령은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사명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갑질, 불공정, 노동 착취와 같이 사람들을 묶어 매는 비인간적인 관행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윤리적이고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 리더는 부하 직원들의 잠재력과 창의성이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격려하고, 권위로 억압하는 대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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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46절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표적을 통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확신을, 불신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기회를 주십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이 표적을 보고 마리아에게 조문 왔던 유대인들 중 많은 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바리새인들에게로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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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예수님의 표적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믿음'과 '불신'이라는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촉구하는 구원 또는 심판의 계기가 됨을 증거합니다.

46절의 '보고했다’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분의 사역을 막으려는 의도가 내포된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무리들의 삶과 당시의 종교체제를 흔드는 강력한 도전이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두 부류로 나누게 했습니다. 이 표적은 진정한 믿음의 기초를 쌓아가는 복 있는 길로 인도하는 계기인 동시에, 기득권과 완고함에 안주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될 때, 인간은 믿음으로 화답하거나 불신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이 선택이 궁극적인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게 됩니다.

유사 사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복음 증거와 표적(특히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치유)에 대해, 많은 이가 믿고 구원받았지만(행 2:41), 동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반응(행 4:1-3)을 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마다 믿음과 불신앙이 확연히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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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가치관이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의 상식(바리새인)에게로 돌아가 복음을 고발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의 시선과 성공의 기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확신 위에 굳건한 믿음의 기초를 쌓아가야 합니다. 가정 내에서 신앙의 문제로 갈등이 생길 때, 한쪽이 불신의 태도를 고수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표적)을 나타낼 때, 세상은 교회를 지지하거나(믿는 자들) 또는 비판하고 대적(바리새인에게 보고)하는 양극단의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긍정적 반응에는 감사하되 교만하지 않으며, 부정적 반응에는 위축되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본질적인 도전을 상기해야 합니다. 다양한 시사와 세태 속에서 발생한 일들(예: 윤리적 문제, 사회적 갈등)을 분석 및 해석할 때, 교회의 기득권이나 이익을 보호하려는 '바리새인의 입장'이 아닌,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공의와 사랑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과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인 삶, 헌신적인 태도, 또는 이웃을 위한 희생은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작은 표적이 됩니다. 이 표적은 동료들에게는 믿음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불편한 진실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끊임없이 증거하며 (전도, 착한 행실),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복 있는 자의 길을 굳건히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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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사랑과 생명의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가 요한복음 11장 본문을 통해 죽음의 권세마저도 비통히 여기시며, 

말씀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창조적으로 불러내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묵상합니다. 

저희의 연약한 믿음과 상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미 늦었다'고 체념했던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돌을 치우고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성부와 완전한 신뢰 속에 계셨던 예수님처럼, 

저희의 모든 삶과 기도가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는 

순종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가 개인의 죄악과 과거의 상처라는 

영적 수의에 묶여 자유롭지 못할 때, 

주의 말씀으로 "나오라" 명령하시고, 

또한 저희에게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는 

해방의 사명을 위임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이 대한민국과 저희가 속한 가정, 교회, 직장, 다양한 공동체에서, 

죄와 절망과 억압에 묶인 나사로와 같은 이웃들을 풀어주는 

성령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표적 앞에서 믿음으로 화답했던 자들처럼, 

세상의 불신과 고발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주님이 하신 일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생명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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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 요한복음 11:17-27 썩어가는 절망의 무덤 앞에서 참된 부활과 영원한 생명(Ego Eimi)으로 선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길벗 2026.03.06 3
1043 요한복음10:22-4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평화의길벗 2026.03.04 5
1042 요한복음 10:22-42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아버지와 하나 되어 전능하신 손으로 자기 양을 끝까지 보호하시는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길벗 2026.03.04 2
1041 요한복음10:01-21 예수님은 양의 목자와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십니다. 평화의길벗 2026.03.03 4
1040 요한복음 10:01-21 양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참되고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선한 목자요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길벗 2026.03.03 2
1039 요한복음09:24-41 예수님은 심판하러 세상에 오신 인자이십니다. 평화의길벗 2026.03.02 7
1038 요한복음 9:24-41 세상의 교만을 심판하시고, 상처받은 영혼을 찾아가 참된 빛과 구원을 주시는 생명의 주님 평화의길벗 2026.03.02 4
1037 요한복음09:13-23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평화의길벗 2026.03.01 4
1036 요한복음 09:13-23 맹목적인 종교의 틀과 세상의 두려움을 넘어, 참된 안식과 빛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길벗 2026.03.0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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