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1-8 절망의 눈물, 희망의 '그러나'
우리의 무너진 삶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통렬한 눈물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솟아나는 희망의 은혜를 만나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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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때로 낭만적인 독백이 아니라, 질펀한 삶의 현실이 고스란히 터져 나오는 통곡의 광장입니다. 에스라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홀로 경건의 골방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악, 곧 거룩한 언약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허물어버린 그 끔찍한 배신 앞에서 옷을 찢고 통곡하며 땅에 엎드렸습니다(스 10:1). 신앙의 지도자가 보여준 이 절절한 자기 고백적 슬픔은 전염성이 강했습니다. 거대한 무리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들어 "심히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연출된 슬픔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실패한 실존을 정직하게 대면한 이들의 부끄러움과 절망이 뒤엉킨 '거룩한 슬픔'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의 이름으로 이 슬픔을 회피하려 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애써 긍정의 언어로 상처를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절망의 바닥을 딛고서야 시작됩니다.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가장 뜻밖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스가냐가 외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스 10:2). 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라는 공동체적 고백으로 죄의 한가운데 섭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 중 하나를 토해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스 10:2).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실패와 죄악과 절망적인 현실을 딛고 서는 이 '그러나'라는 접속사 속에 은혜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스가냐의 희망은 인간의 가능성이나 결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 그 '아슬아슬한 희망' 자체이신 분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희망은 막연한 감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즉각 고통스러운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곧 이방 여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내보내기로... 언약을 세우라"(스 10:3). 이 결정이 얼마나 비정하고 참혹하게 들립니까?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인도주의적 감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찢어내는 고통입니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끔찍한 대가와 비극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단호한 결단' 이전에, 그 결단을 가능하게 한 '공동체적 응답'입니다. 스가냐는 엎드러진 에스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소서. 이 일이 당신이 감당할 일이니 우리가 돕겠습니다. 힘을 내소서"(스 10:4). 절망에 빠진 지도자를 향해 '우리가 함께하겠다'고 손을 내미는 공동체. 진정한 회개는 이처럼 서로의 짐을 지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걷는 '삶의 연대' 로 구체화됩니다.
우리의 삶이 다시 한번 실패와 타협으로 얼룩져 엎드러질 때, 우리는 홀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가 돕겠다'고 말하는 형제자매들의 손길을 통해, 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삶'이 됩니다. 그 아프지만 따뜻한 연대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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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10:1-8 눈물 젖은 땅에 피어나는 언약의 용기
죄의 무게 앞에 무너져 내린 집단적인 통곡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성찰을 넘어 거룩한 결단으로 나아갈 새로운 시작의 동력과 긍휼을 허락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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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종종 난파선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좇는 가치들이 근원적인 생명력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체제 속에 포획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한 이들을 속이거나 압박합니다. 이 거친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돌아볼 성찰의 시간을 잃어버린 채,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려 두리번거리는 가련한 시도에 몰두합니다.
진실은 자기 안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 부끄러움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세속의 가치에 물들어 언약을 저버린 죄악 속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에스라 10장 1절은 바로 그 죄의 무게 앞에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는 참담한 광경을 전합니다. 이 눈물은 단순히 개인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의 정직한 탄식에 전염된 듯,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어 크게 통곡했습니다.
이 통곡은 위선적인 껍데기를 벗어던진 진실한 고백입니다. 신앙이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길을 걸을 때, 그 죄의 무게는 너무나 커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羞恥)가 됩니다. 그러나 이 절망과 통곡의 심연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痛愛)이 작동하는 신성한 자리입니다.
지도자 중 한 명인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 일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나 이제라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희망이 있나니” (스 10:2)라고 말한 대목은 복음의 놀라운 반전을 선언합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으나, 그 죄를 직면하는 순간 **'희망의 단초'**를 발견했습니다. 이 희망은 백성들의 도덕적 우월성이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적 현실 속에서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고"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애(헤세드)**에 근거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깊은 긍휼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들이 언약을 갱신하려는 용기를 내고 “일어나 이 일을 처리하소서”(스 10:4)라고 에스라에게 촉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가냐의 제안은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과의 이별을 포함하는 가혹한 결단, 곧 **'떠나라'**는 명령을 요구합니다. 이는 개인의 편안함이나 일상의 습속을 내려놓고 '덜'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고단한 순례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은 모호한 삶의 한계 앞에서 지적인 깨달음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몸이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즉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온 이스라엘에게 맹세하게 하고 (스 10:5), 백성들을 소집하는 엄중한 명령을 내린 것은(스 10:7-8),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는 그 길’(어긋난 길)로 가지 않도록, 공동체의 거룩한 푯대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힘겨운 시련 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때로 ‘거칠고 울퉁불퉁한 오르막길’을 택할 용기를 얻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며,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기보다, 비틀거릴지라도 당신의 마음에 당도하려는 우리의 헌신을 사랑으로 맞아들이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