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8:1-20 이름이 불릴 때, 빈자리는 채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결핍 속에서도 '선한 손'의 은혜로 친히 일하시며, 잊힌 이름들을 불러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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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종종 거대한 서사나 승리한 영웅들의 이름만을 기억합니다. 제국의 흥망성쇠 속에서 개인의 삶은 덧없이 스러지는 안개와도 같습니다. 거대한 바퀴 아래 으스러진 들꽃처럼, 수많은 이름은 익명성의 그늘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호명(呼名)합니다. 에스라 8장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족보, 그 지루해 보이는 이름들의 나열로 시작됩니다. "게르손 자손... 비느하스 자손... 다윗 자손..."
이것은 단순한 명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의 행위이며, 존재의 확인입니다. 제국의 부속품이나 노예 번호로 살아가던 이들이 '아무개'의 자손, 거룩한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다시 불리는 순간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했듯, 진정한 관계는 '나-너'(I-Thou)의 만남, 즉 서로의 고유한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대중'이 아닌, 구체적인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절망의 땅 바벨론을 떠나는 순례의 첫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여정의 시작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 백성을 모으고 그들을 살핍니다. 폐허가 된 성전을 재건하고, 잊힌 예배를 회복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습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스 8:15).
이 얼마나 스산하고 아찔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의 집을 섬길 이들, 예배의 중심을 잡아야 할 이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갖춰진 듯했으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혹,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교회를 이루고 신앙의 여정을 걷는다 하면서도, 정작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이라는 레위 사람이 실종된 것은 아닙니까? 열심은 있으나 방향을 잃고, 직분은 있으나 섬김의 마음이 공허한, 텅 빈 중심의 초상. 신앙에 회의를 품은 이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묻습니다. "당신들의 신은 어디에 있는가?"
에스라는 이 결핍 앞에서 절망하거나 백성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냅니다. 이해력 있는 이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일꾼을 데려오라 요청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스무 명을 데려오고..."(스 8:18-20).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우리의 완벽함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결핍'과 '없음'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꾸짖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빈손을 절망 속에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빈손을 들고 '하나님의 선한 손'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레뱌와 하사뱌라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발걸음을 통해, 그들의 헌신을 통해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백 속으로 친히 걸어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메마른 마음에, 텅 비어버린 예배의 자리에, 그분은 새로운 일꾼들을 보내시고, 잊혔던 감사의 노래를 다시 채우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강가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는 벗들이여. 혹시 삶이 버겁고, 내 신앙이 초라하며, 공동체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괜찮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빈자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만지실 공간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의 결핍을 당신의 은혜로 채우고 계십니다. 그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시금 거룩한 순례의 길을 함께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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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8:1-20 아하와 강가에서 멈춰 서서
부족함을 아시고 기어코 우리를 하나 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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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예비했던 아하와 강가에서의 시간(에스라 8:1-20)은, 우리에게 바로 그 ‘멈춤’과 ‘채움’의 깊은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고토(故土)로의 귀환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언약을 재확인하는 숭고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순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익숙한 일상을 떠나 터벅터벅 걷는 동안 자기 속에 있는 약함과 모호함을 보게 되며, 그 길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만나는 곳이 됩니다.
에스라가 사람들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그는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가족의 명단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8:1-14).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출신 배경과 지향점이 각각인 이들을 불러 모아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빚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하와 강가에서 멈춰 서서 점검해 보니, 에스라는 그 대열에 레위 자손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8:15).
여기서 우리는 이 여정의 첫 번째 주제를 발견합니다. 바로 '완전함을 향한 하나님의 채움'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성전 봉사와 예배를 맡은 이들입니다. 그들이 빠진 공동체란, 아무리 열심히 일꾼들을 모았다 한들, 심장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 물질이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뜻'이 부족해서 빈곤했던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지향과 뜻)을 부여하는 벼릿줄,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거룩한 섬김이 빠져 있었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족함을 깨달은 인간의 자책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스라는 유력한 지도자들을 파견하여 레위인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오게 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에게 충실한 일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8:16-20). 성경은 우리가 겪는 모든 구원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꿰뚫어보게 합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이 여정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신 분도 결국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낙심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기어코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농부가 싹을 틔울 능력이 없으나 생명이 '저절로' 자라나듯, 하나님은 우리 연약한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제 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길 없는 곳에서 '가라' 하실 때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때로 부족함과 공허함(결핍)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세상의 풍요가 아니라, 우리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통해 영혼을 구원할 능력을 가진,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멈춰 서서 부족함을 직시했던 이들처럼, 우리도 삶의 중심을 잡고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깃든 아름다운 가능성을 호명하시며, 우리가 아직도 그분의 크신 사랑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완벽한 준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부족한 공동체의 여백을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든든한 기반이며, 우리 삶이 누추하고 맥이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만 경배할 용기를 주는 은혜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할지라도, 은총 바깥으로는 넘어질 수 없음을 확신하며, 다시 사랑의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마치 겨울이 아무리 매서운 눈보라를 몰고 와도, 너그러운 봄은 우리 가슴 속에서 움트고, 그 봄의 온기가 미움의 쇠붙이들을 녹여버리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연약함을 기어코 생명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