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05:01-12 아침의 탄식을 영광의 찬송으로 바꾸시는 거룩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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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편은 시인이 이른 아침, 대적들의 잔인한 박해와 거짓의 위협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으며 드리는 탄원이자 신뢰의 아침 기도입니다. 시인은 먼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깊은 신음과 부르짖음을 주께서 들어주시기를 청원하며, 아침에 번제물을 늘어놓듯 기도를 정돈하여 바치고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을 바라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나 행악자, 거짓말하며 속이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악인들을 철저히 미워하시고 멸하시는 거룩한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악인들의 공포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풍성한 언약적 자비(인자)에 의지하여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해 엎드려 예배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거짓과 부패한 말(열린 무덤)로 해하려는 대적들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며, 주께 피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모든 의인들에게 기쁨의 승리를 주시고 큰 방패처럼 주님의 은혜로 덮어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며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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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및 문화적 배경 : 본 시편은 표제에 '다윗의 시'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전 예배(제의)에서 찬양대 지휘자에 의해 불린 음악적 성격을 지닙니다. 문화적으로 3절의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는 고백은 구약 시대 제사장이 아침 번제단에 제물을 질서정연하게 늘어놓은(아라크) 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상달되기를 망대에서 파수꾼처럼 간절히 바라보고 기대하던(차파) 제의적 배경과 언어를 차용하여 인생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구별된 영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 신학적 및 정경적 배경 : 신학적으로 시편 5편은 하나님의 타협 없는 거룩하심(죄와 동행할 수 없으심)과 당신의 백성을 향한 언약적 사랑인 인자하심(헤세드)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조화를 이루는지를 웅변합니다. 정경적인 관점에서 시편 5편은 앞선 시편 3편(아침의 신뢰)과 4편(저녁의 안식)의 흐름을 이어받으며, 죄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의인이 나아갈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인도와 그분의 피난처 되심뿐이라는 시편 전체의 영적 대전제를 확고하게 지탱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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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아침에 깨어 주께 드리는 탄식과 응답 대망 : 우리의 신음까지 들으시는 영원한 왕
하나님은 우리의 말하지 못하는 깊은 신음(심사)까지도 온전히 헤아려 주시며, 매일 아침 기도를 정돈하여 바치는 백성의 고통 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시는 우리의 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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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심사를 통촉(헤아려)' 달라고 청원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실 것을 간구하며, 특별히 '아침에' 주께서 자신의 소리를 들으실 터이니, 아침에 주께 기도를 정돈하여 드리고 주님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고 바라볼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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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토로하는 '심사'는 히브리어로 하기그(הָגִיג)로, 말로 정제되어 나오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탄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정교한 언어로 완성하지 못한 내면의 비명과 탄식 소리조차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온전히 아시며 통촉하시는 섬세하신 분입니다. 시인은 이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천지를 지으신 절대자가 멀리 계시지 않고 고난받는 개인의 온전한 주권자이자 보호자가 되신다는 아주 인격적이고 깊은 언약적 확신을 담은 표현입니다. 더욱이 시인이 '아침에' 주께 기도를 정돈하여 바치고 바란다는 것은, 제사장이 성전 제단 위에 제물을 규칙에 맞게 차려놓고(아라크, עָרַךְ)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워주시는 구체적인 응답을 망대 위에서 파수꾼처럼 앙망하며 바라보던(차파, צָפָה) 제의적 행동의 묘사입니다. 하루의 가장 첫 시간인 아침에 내 생각과 염려를 먼저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 앞에 나의 온 삶과 갈망을 정돈하여 드리는 것이 기도자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이 고백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과 긴밀히 통하며,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끊임없는 사역의 소음 속에서도 매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찍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던" 생명의 아침 루틴(막 1:35)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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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인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세상의 불안한 뉴스나 성과 지표를 먼저 마주하며 하루를 염려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하여, 나의 계획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보좌 앞에 기도를 '정돈하여 바치고' 주님의 얼굴빛을 잠잠히 기다리는 영적 질서를 훈련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아침에 짧게라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감사의 기도와 말씀을 읊조리는 축복의 문화를 형성하고, 공동체 안에서 고통 중에 조용히 흐느끼는 지체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닮아 서로의 아픔을 경청하고 기도로 연대하는 따뜻한 샬롬을 일구어가야 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내면의 고독과 곤고한 신음까지도 기뻐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함으로, 오늘 아침 우리 심령이 소성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가장 깊은 신음이 이미 하늘 보좌에 닿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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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죄악을 배격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 : 악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재판장
하나님은 결코 죄와 함께하실 수 없는 완벽하게 거룩하신 분이시며, 오만과 거짓과 피 흘림을 즐기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영원한 재판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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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감히 서지 못할 것이며, 주께서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고 선언합니다. 나아가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며,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철저히 싫어하신다고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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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라는 선언은, 당시 고대 근동의 이방 우상들이 인간의 도덕적 악행이나 죄악에 상관없이 뇌물과 제물만 주면 기뻐하던 변덕스러운 존재였던 것과 야훼 하나님을 철저하게 구별시키는 위대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 자체가 완벽하게 성결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악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에 잠시라도 빌붙어 기생하거나 함께 안식을 얻을 수(구르, גּוּר)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비추어 결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을 단계적으로 열거합니다. '오만한 자'(홀렐림, הֹלְלִים)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왕 노릇 하며 으스대는 미친 자들이며, 이들의 내면적 오만함은 결국 이웃을 향해 '거짓말'을 하고, '사기(속임)'를 치며,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하는 구체적인 파괴 행동 양식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화려한 종교적 외식과 예배의 가면을 쓸지라도 그 중심에 도사린 오만과 거짓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반드시 그 손이 행한 대로 엄정히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이 준엄한 선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선언한 것과 연결되며,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 선포한 최후 심판의 공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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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서도 일상생활 속에서 남을 이기기 위해 가벼운 속임수나 편법, 거짓말을 도구로 사용해 온 타성을 뼈아프게 직시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 할례가 베풀어지기를 원하시며,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인본주의적 꾀나 교만함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현대 사회는 피 흘림과 속임이 지배하는 정글과 같은데, 이러한 거친 세태 속에서 교회마저 세상의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라는 오만한 가치에 취해 타락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는 중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결이 곧 진정한 영적 능력이 됨을 깨닫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거짓 방식과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자로 서기로 오늘 결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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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주의 인자에 근거한 예배와 공의의 인도 청원 : 엎드리는 자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신실한 구원자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주의 풍성한 자비(헤세드)만을 힘입어 엎드리는 겸손한 예배자를 영적 위기 속에서 친히 붙드시고 곧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신실한 구원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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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앞서 언급한 악인들과 예리하게 대조하여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님을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사방에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나의 원수들로 인하여' 주의 의로 자기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길을 나의 목전에 곧고 평탄하게 펴 달라고 간절히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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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의 첫 단어인 '오직 나는'(와아니, וַאֲנִי)는 시편 기자가 앞서 파멸당할 오만하고 거짓된 악인들의 길과 자신이 선택한 예배자의 길을 아주 선명하게 대조시키는 전환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로 자신의 도덕적 무결함이나 자격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인생에 불과함을 잘 알기에, 오직 하나님의 변함없고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인 '인자'(헤세드, חֶסֶד)만을 철저히 의지하여 성전 예배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주의 집에 들어가 경외함으로 '절하는 것'은 예배에 있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올바른 마음의 태도를 몸으로 낮추어 겸손하게 고백하는 신앙적 예우입니다. 시인은 사방에서 원수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조급한 지혜나 칼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완벽한 다스림의 기준인 '주의 의'로 삶의 걸음을 인도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소서"라는 요청은 시인이 걸어갈 믿음의 도리가 장애물에 가로막혀 비뚤어지거나 좌절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삶의 현장에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의지적인 기도입니다. 이 고백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신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 오직 보혈의 공로(헤세드)로만 하나님의 은총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담대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게 하는 신약의 예배 정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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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매일의 경건과 주일 예배가 '이 정도면 내가 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다'는 바리새인적인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때마다 나의 자격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나를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적 사랑(헤세드)에만 감격하며 온 마음을 낮추어 엎드리는 겸손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거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세상의 그럴듯한 처세술이나 인맥에 기대기보다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구한다는 것은 막연한 꽃길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험난한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말씀에 온전히 인생의 닻을 내리고 묵묵히 정직의 길을 고수하는 순종의 훈련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예배가 자격이 아닌 은혜로 드려지는 예배인지 조용히 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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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2절 대적의 악독에 대한 심판과 성도의 방패 보호 : 주께 피하는 자를 은혜의 방패로 두르시는 영원한 왕
하나님은 거짓과 부패한 말로 이웃을 무덤에 밀어 넣는 악인의 간계를 부수어 정죄하시며, 오직 주께 피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을 평생 은혜의 방패로 둘러 지켜주시는 주권적인 보호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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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대적들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그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고 심중은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혀로는 거짓된 아첨을 일삼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쫓아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 소리 지르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께서 늘 지켜주시므로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되 '방패로 호위함 같이' 은혜로 그들을 친히 둘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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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들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닌 바로 부패한 말(언어)입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는 묘사는, 무덤이 열릴 때 송장 썩는 악취와 부패가 뿜어져 나오듯, 대적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거짓과 비방, 아첨하는 말이 결국 타인의 생명을 파멸의 구렁텅이(무덤)로 몰아넣는 죽음의 도구임을 상징하는 극적인 환유입니다. 시인은 사사로운 힘으로 보복하려 하지 않고, 원수들이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파멸하는 '자기 꾀에 빠짐'의 역설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을 구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영원히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주께 피하는 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의인"으로 정의되며, 이들에게 임하는 복은 세속적 물질의 양에 제한되지 않는 전인격적인 하나님의 호위와 안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방패로 호위함 같이' 두르신다는 비유는, 전신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덮는 고대의 대형 전신 방패(치나, צִנָּה)처럼, 하나님의 풍성하시고 한량없는 은혜(라촌, רָצוֹן)로 성도의 전 생애를 물 샐 틈 없이 감싸 안아 지키신다는 안전 보장의 대선언입니다. 대적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과 같다는 이 폭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 13절에서 모든 인류의 철저한 타락과 언어적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 그대로 인용하여 복음의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한 구절의 기초가 되며, 방패로 호위하신다는 은혜의 대선언은 에베소서 6장 16절의 "믿음의 방패"와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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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입과 목구멍이 이웃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며 아첨과 궤계로 상처를 주는 '열린 무덤'이 되지 않도록, 매 순간 언어의 파수꾼을 세워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세상의 든든한 연줄이나 재물을 인생의 방패로 신뢰하도록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캄캄한 인생의 밤중이나 거친 싸움터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를 완벽하게 호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방패만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는 기도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온갖 모함과 조롱, 물질주의의 거센 공격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혈과 육의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주께 피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천상의 기쁨을 소유한 자답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넉넉한 샬롬과 환희의 찬송을 울려 퍼뜨리며, 사회 속에서 억압적인 함정에 걸려 신음하는 약자들을 향해 교회가 기꺼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은혜의 방패'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이 땅 위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영광입니다. 오늘 당신의 방패는 무엇입니까. 그 방패가 주님인지 조용히 확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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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호흡이시며, 인생의 가장 깊은 신음까지 통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침마다 먼저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며,
하루의 첫 숨을 기도로 정돈하여 드릴수 있는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무너뜨리려 하는 수많은 대적들의 살기 어린 소음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조롱하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오직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정돈하여 바쳐 올리는
경건한 아침 기도의 소리를 날마다 들려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린 오만함과,
눈앞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고 남을 속이려 하던
'열린 무덤'과 같은 모든 불의의 언어들을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씻어 주시옵소서.
스스로의 공로나 자격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죄인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시는
주의 풍성한 인자하심(헤세드)만을 신뢰하며,
경외함으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엎드리는 겸손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원수들이 사방에 파놓은 함정과 올무 속에서도
우리 인생의 방향을 오직 주의 선하신 의의 말씀으로만 공평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의 헛된 권력이나 물질이 아닌, 주님께 피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원한 기쁨만을 온전히 소유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평생에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로서,
우리를 사방으로 빈틈없이 감싸주시는 주의 은혜의 큰 방패 안에서
요동치 않는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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