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22-22:05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3

: 에덴의 완성 - 하나님과 어린 양이 모든 것이 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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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전반부에서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외부 구조를 본 후, 이제 요한은 그 거룩한 성의 내부로 우리의 시선을 이끕니다. 이 마지막 환상은 성경 전체의 결론이자, 모든 피조 세계와 구속받은 백성이 고대하던 소망의 최종적인 성취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가장 큰 특징은 놀랍게도 ‘없음’(absence)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성전도, 해도, 달도, 밤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 양께서 친히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상실했던 에덴의 완전한 회복을 넘어,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광스러운 완성이며,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를 향한 가장 궁극적인 위로와 소망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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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 성의 내부 모습과 그 성의 상태를 기술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성전이 없습니다. 해나 달이 쓸모가 없습니다. 밤도, 바다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가 이 모든 것을 대체합니다.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렇게 성 내부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끕니다. 이어서 새 에덴으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그리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에덴에서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것들을 회복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 우주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범위가 에덴 이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교제가 다 회복됩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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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3절 하나님과 어린양은 성전이시며, 영광의 빛이시며 등불이십니다.  

: 성전도 빛도 필요 없는 곳 - 임재의 완전함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매개체가 필요 없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직접적이고 충만한 임재 자체가 성전이 되고 빛이 되어, 모든 피조 세계를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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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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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전이 없음 : 구약 시대의 성전은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제한적인 통로였습니다. 휘장으로 가로막힌 지성소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그 휘장을 찢으시고(히 10:19-20), 친히 참 성전이 되셨습니다(요 2:19-21).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그림자인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체이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께서 직접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완전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지성소이며,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 임재 안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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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와 달이 쓸데없음 : 해와 달은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피조된 빛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에서는 피조된 빛이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되지 않은 근원적인 빛, 즉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모든 것을 비추고, 어린 양께서 그 영광을 온 세상에 전달하는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고 하신 말씀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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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시작하여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성전의 재건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 2: 19-22; 막 14:58; 15:29),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전의 ‘머릿돌' (마 21:42; 막 12:10-12; 눅 20:17-18; 행 4:11; 롬 9:32-33; 엡 2:20)로 묘사합니다.  계시록에서 성소는 예외 없이 하늘 성소를 지칭합니다. 성전은 창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패턴에서 에덴은 창조의 성전이고 아담은 대제사장입니다. 첫 창조의 실패를 새 창조에서는 어린양이 성취합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 성은 해와 달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임재로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촛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이 성읍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어린 양의 등불이 삶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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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도 이 영광을 부분적으로 맛보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며(고전 6:19),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았습니다(마 5:14). 비록 지금은 우리의 죄성과 세상의 어둠으로 인해 그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때가 많지만, 장차 완성될 그날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부터 우리의 삶이라는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지금 이 땅 어디에도 물리적 성전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공동체가 성전이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지성소입니다. 또한 이를 하나님나라라고도 말합니다.  이제 거룩하고 부정한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내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기억하고 살고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부름 받은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찰 그날은 꼭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고 함께하시고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나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영광의 빛과 등불이 인도하시는 가운데 교회는 먼저 그 빛 가운데 살고, 또 그 빛을 세상에 비추고 등불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빛의 자녀, 빛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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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7절 새 예루살렘 성으로 열방이 돌아옵니다. : 만국이 걸어올 빛 - 열방의 영광과 생명책의 기준

새 예루살렘의 빛은 너무나 영광스러워 구원받은 모든 민족(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나아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영광과 존귀)을 하나님께 경배의 예물로 드리게 되며, 이 영광에 참여하는 유일한 기준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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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만국의 왕들이 새 예루살렘 성으로 자기 영광을 가지고 모여듭니다. 시온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참조 사 60:1-16). 밤이 없으니 성문은 늘 열려 있고? 열방의 순례자들이 다양한 보화와 보배 곧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새 예루살렘 성을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에게 속한 자들은 거절당하고, 오직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한 이들만 그 영광의 도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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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온으로 돌아오는 열방 : 이 장면은 이사야 60장에서 예언된, 마지막 때에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의 빛을 보고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나아올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것은 심판 후에 또 다른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의 신실한 증언을 통해 구원받은 모든 민족과 문화를 대표하는 자들이 마침내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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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국의 영광과 존귀 : 그들이 가져오는 ‘영광과 존귀’는 바벨론이 착취했던 재물이 아니라, 각 문화와 민족이 가진 가장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이제는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됨을 의미합니다. 죄로 왜곡되었던 인간의 모든 문화적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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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 문과 거룩한 기준 : 성문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은 완전한 안전과 평화,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끊임없는 환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문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속되고 가증하며 거짓된 것, 즉 죄의 본질을 가진 자들은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 조건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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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열방이 시온으로 순례할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 성취됩니다. 이사야 2:2,5에서 제기한 이 주제는 이사야 60:3,5,11에서 장엄하게 선언됩니다. 요한은 이사야 사상을 함축하여 인유합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과 음녀 바벨론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음녀는 착취와 수탈로 축적합니다. 신부는 자발적인 헌신으로 공존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이사야 60, 61장의 문맥 그 어디에도 왕들과 열

방이 자신들의 영광(독사) 또는 명예(티메)를 들고 올 것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부, 재물’ 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가져 올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열방의 부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방이 가져오는 영광과 존귀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최고조로 조명하기 위함입니다. 

열방이 그동안 착취와 축적으로 바벨론에 세금과 노동을 상납하던 행태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나눔과 섬김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러 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이웃과의 연합은 예배의 진정한 목적입니다(사 11:6-12). ‘만국’과 ‘땅의 왕들'은 이사야 60장에서 도출된 용입니다. 하지만 계시록 자체의 논리적 흐름으로는 '만국’ 열방을 말하는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0:11은 족속 대신에 ‘임금'으로 대체합니다. 그 결과가 ‘땅의 왕들'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한 분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야웨 하나님을 경배하러 옵니다. ‘열방의 귀의 사상’은 15:4 이후에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 열방의 귀의는 신학으로 우선적인 주제임을 증명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노래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모든 열방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열방은 겁을 먹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저주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파루시아와 아마겟돈 전쟁(18-19장)에서 최후 심판을 당한 자들이 결국에는 강요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어떤 제안도 없습니다. 계시록이 열방에 대하여 제시하는 가능성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1)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11:13; 14:6; 15:4). (2) 짐승으로서 지속적으로 우상숭배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거절하고 저주하며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여 최후 심판에 이르는 것(14:9-11; 16:9, 11, 21; 17:14; 19:17-21)입니다. 

모든 열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는가?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방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는가?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강팍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21:8, 27; 22:15로부터 알수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계시록을 보편적 구원을 예견하는 책으로 보려는 시도들은 본문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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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의 빛으로서, 만국이 돌아올 빛을 비추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신실한 증인의 삶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은혜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줌과 동시에, 복음 전파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재능과 은사, 문화적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정도로 찬란할 것입니다. 이 영광에 거할 수 있는 이들은 온 열방에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광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경배할 이들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세력을 따랐던 땅의 왕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기를 마지막까지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증거 장막인 교회는 이 빛을 부지런히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열려 있는 이 성문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직 끝까지 어린양의 길을 따르는 자들만이 새 예루살렘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고, 그분과 동행함으로 세상을 그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저 하늘의 별처럼(마 2:9) 우리도 주를 경배하는 자리로 사람들을 인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속되고 가증하고 거짓된 자들(21:8)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만국 가운데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그분의 통치와 영광을 찬양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그 성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주안에서 새 창조된 이들과 주를 외면하여 사망아래 있는자들 중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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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5 하나님은 실낙원을 복락원으로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에덴의 완성 -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의 회복

새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에덴의 모든 복, 즉 생명과 풍성함, 치유와 저주 없는 삶, 하나님과의 얼굴을 마주하는 친밀한 교제,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왕적 통치권을 완전하게 회복하고 영광스럽게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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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강(창 2:10)이 새 예루살렘 성 거리를 가로질러 흐르고,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창2:9)는 생명수의 강 양쪽에 즐비합니다(참조 겔 47:12). 첫 인류의 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지만(창 3:24),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열두 열매를 맺고, 그 잎으로 만국 백성을 치료할 것입니다. 에덴의 저주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인데(슥 14:11), 첫 사람을 미혹하던 뱀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마주하기 두려워 숨었지만(창 3:9--11), 이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섬기며, 거기서 영원히 만물을 다스리며 왕 노릇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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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장면은 창세기 1-3장의 에덴동산과 완벽한 대칭과 완성을 이룹니다.

  • 생명수의 강 : 에덴의 강(창 2:10)은 이제 근원이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은혜를 공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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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나무 : 죄 때문에 접근이 막혔던(창 3:24) 생명나무가 이제 강 좌우에 풍성하게 자라, 모든 성도가 그 열매를 자유롭게 먹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 잎사귀가 “만국을 치료한다”는 것은, 더 이상 질병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 인해 상처 입고 분열되었던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치유되고 하나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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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는 저주가 없음 : 아담의 불순종으로 들어왔던 모든 저주(가시덤불, 해산의 고통, 죽음 등)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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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 죄로 인해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야 했던(창 3:8) 인간이,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여 보는 영광, 즉 완전하고 친밀한 교제를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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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 첫 사람 아담에게 주어졌으나 죄로 인해 상실했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적인 통치권(Dominion)이 회복되고 완성됩니다. 이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왕으로서 피조 세계를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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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신부 새 예루살렘을 새로운 에덴으로 묘사합니다 어린양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입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어린양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왕 노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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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에는 바벨론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생명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죽음과 대조됩니다. 

(2)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에 있던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유합니다. 에스겔 47:8-9, 12에 있는 강은 많은 물을 소생시킵니다. 그 안에서 피조물들이 헤엄칠 수 있도록 ‘생명'을 줍니다. 나무들이 자라서 그 잎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에서는 그 강을 ‘맑은 강'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에서 ‘소생'은 '치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치유하기를 영원히 지속하는가? 아닙니다. 새 창조에서는 치유되어야 할 죽음이나 고통이 없습니다(21:4).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고통을 단번에 치유하십니다(21:4; 7:16-17). 열방의 치유는 요한계시록 5:9의 뜻을 발전시킵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열방이 치유되어 하나님 보좌앞에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섬깁니다. 따라서 생명나무 잎의 치유는 비유적인 그림입니다. 어린양 그리스도가 회개하는 열방의 치유를 위해 죽임을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3) 셋째,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는 ‘헤렘’입니다. 구약에서 ‘해렘’은 죄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레 27:27-29). 봉헌한 물건 또는 봉헌(devotion) 또는 금지(ban)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적인 물건으로 엄격하게 적용되면, 파괴하든지 혹은 용기에 담아서 구별해둡니다. 봉헌된 것에 대해 신실하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수 7:1; 22:20).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인류에게 보내신 파괴적인 저주로부터 면제를 받습니다. 스가랴 예언의 성취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형태의 저주도 없을 것입니다. 

(4) 넷째, 다시는 밤이 없습니다. '다시는 없을 것이다'(21:1-4) 형식의 절정입니다. 바다와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고통과 밤이 다시는 없습니다.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슥 14:11).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세상에서 그들을 위협해왔던 모든 범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할은 촛대입니다. 성도들은 신적 등불의 빛을 담고 최종적으로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세상의 ‘등불’입니다(21:23). 구약 성도의 반복되는 기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춤으로써 그의 현존을 드러내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민 6:25-26; 시 4:6; 31:16; 67:1; 80:3, 7, 19; 119:135). 이 기도는 요한계시록 22:5에서 종합적이고도 완성적으로 응답됩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구약 본문은 민수기 6:25-27의 대제사장적 축복입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는 말씀이 지향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22장의 하나님 나라 완성입니다. 

(5) 다섯째,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합적 완성입니다. 이 통치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4-6의 천년왕국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이는 천년왕국 이후에 반역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성도들의 통치를 받는가? 통치는 첫 창조에서 아담에게 맡겨진 창조적 활동입니다(창 1:28; 시 8편).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에는 인간에 대한 통치 개념은 없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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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며, 우리가 받은 구원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장차 임할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이 땅에서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며,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생명나무 잎사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고,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창조를 통해 잃어버렸던 에덴의 생명과 영광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십니다. 죄로 인한 저주가 떠나가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교제하고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또 잃어버린 통치권(창 1:28)을 되찾아 주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다시 오실 주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풍성함, 치유와 회복, 거룩한 얼굴을 보고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거룩한 교제, 정의롭고 공평한 통치가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교회는 장차 임할 새 예루살렘 성을 이 땅에 미리 구현한 공동체입니다. 아직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고, 치유하고,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부르신 그 뜻과 은혜를 따라 허락하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싳을 비추고 치유하고 생명을 공급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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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새 예루살렘 성의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빛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등불로 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영광의 그 나라에 초청하여 거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어둠과 저주가 없고 죽음이 없는 나라에서

영영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그 나라에 거할 수 있도록

생명책에 기록해 주심을 또한 감사드리옵고

모든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주께 올려드립니다. 

이제 회복된 그 에덴을 살게 하시고

주님을 대면하여 뵐 수 있는 영광도

우리에게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여 주사

세세토록 왕노릇 할 수 있는 

영광을 온전히 기뻐하며 누리며

잘 감당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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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 요한계시록 17:01-18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의 멸망 1 : 큰 음녀 바벨론의 정체와 최후 평화의길벗 2025.07.26 4
783 요한계시록 16:12-21 악의 세계에 대한 재앙 - 일곱 대접 3 : 아마겟돈의 영적 전쟁과 하나님의 최종 선언 평화의길벗 2025.07.24 4
782 요한계시록 16:01-11 악의 세계에 대한 재앙 - 일곱 대접 2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 일곱 대접의 의로운 심판 평화의길벗 2025.07.23 5
781 요한계시록 15:01-08 악의 세계에 대한 재앙 - 일곱 대접 1 : 진노의 대접과 승리의 노래 평화의길벗 2025.07.23 3
780 요한계시록 14:14-20 긴장 -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 2 : 두 가지 추수 - 구원의 곡식과 진노의 포도 평화의길벗 2025.07.22 7
779 요한계시록 14:01-13 긴장 -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 1 : 시온 산의 새 노래와 바벨론의 진노의 잔 평화의길벗 2025.07.21 14
778 요한계시록 13:11-18 긴장 - 교회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투쟁 : 거짓 선지자와 짐승의 표 : 미혹의 시대 속 교회의 분별력 평화의길벗 2025.07.20 13
777 요한계시록 13:01-10 긴장 - 교회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투쟁 : 거짓 그리스도와 참된 성도: 짐승의 권세와 교회의 인내 평화의길벗 2025.07.19 13
776 요한계시록 12:01-17 긴장 - 교회와 용과의 투쟁 - 영적 전쟁의 실체와 교회의 승리 평화의길벗 2025.07.18 20
775 요한계시록 11:14-19 막간 - 말씀의 통치를 받는 교회 : 일곱째 나팔: 마침내 도래한 그리스도의 나라 평화의길벗 2025.07.16 14
774 요한계시록 11:01-13 막간 - 말씀의 증인되는 교회 : 측량받고, 증언하고, 승리하는 교회 평화의길벗 2025.07.15 14
773 요한계시록 10:01-11 막간 - 말씀을 먹고 사는 교회 : 말씀을 먹고 다시 예언하라 평화의길벗 2025.07.1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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