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24-10:13 신앙의 완주를 위한 영적 절제와 거짓 안전감에 대한 엄중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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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8장에서 시작된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한 권면의 연장선상에서, 9장 후반부(24-27절)를 통해 영원한 상급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 운동선수'로서의 처절한 자기 절제와 모본을 제시합니다. 이어서 10장 전반부(1-13절)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는 영적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와 음행, 원망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멸망당한 역사적 사실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영적 지식과 성례적 은혜에 안주하며 우상 제물 먹는 것을 자유라 여기던 고린도 교회의 교만(선 줄로 아는 자)을 엄히 경고하고, 미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시험을 이겨낼 것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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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및 문화적 배경 : 1세기 고린도 지역에는 2년마다 열리는 유명한 '이스미아 경기(Isthmian Games)'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달리기나 격투기에서 승리하여 시들고 썩어질 소나무나 샐러리 관을 얻기 위해 엄청난 자기 훈련과 절제를 감내했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이방 신전의 제사와 연회, 그리고 신전 창기들로 인한 성적 타락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 신학 및 사상적 배경 :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신학적 질병은 '과실현된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과 헬라 이원론에 기초한 거짓된 영적 안전감이었습니다. 이른바 교회 내의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례를 받고 성찬(영적 음식)에 참여했으므로, 어떤 우상 신전의 식사에 참여하거나 육체적 방종을 저질러도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술적이고 기계적인 성례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3절은 8장부터 이어지는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증의 연속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실패 사건을 종말론적 '모형(Typology)'으로 삼아, '육신에 속한 자'로 머물며 우상 숭배와 교만에 빠진 교회는 종말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수 있다는 '교회의 멸망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묵상 포인트 : 하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을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시며, 은혜를 방종으로 바꾸는 영적 교만을 심판하시되,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신실하게 피할 길을 내사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완주하게 하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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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7절 썩지 않을 관을 위한 자기 절제와 복종
하나님은 썩어질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며, 날마다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는 거룩한 절제의 삶을 원하시는 상급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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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임을 상기시키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명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여 썩을 승리자의 관을 구하지만, 성도는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향방 없는 달음질이나 허공을 치는 싸움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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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스미아 경기의 육상 선수와 권투 선수의 은유를 사용하여 영적 생활의 치열함을 묘사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소유했으니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도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삶을 예로 들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자신조차도 구원의 여정에서 '버림을 당할까(아도키모스, 자격 미달로 실격될까)' 두려워하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노예로 만드는) 영적 훈련을 감당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버림받음'의 두려움은 단순히 천국에서 받을 상급(보너스)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낭만적인 뜻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기 부인 없이 방종에 빠진다면 궁극적인 구원의 목적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실존적이고 종말론적인 거룩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값싼 은혜에 취한 교회를 향해,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을 위한 '절제'만이 생명의 길임을 아비의 심정으로 절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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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교회 안에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를 오용하여, 아무렇게나 세속적으로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론과 거짓 평안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내 일상의 모습이 영적 달음질을 하는 선수처럼 치열한지, 아니면 허공을 치며 적당히 종교 생활에 타협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남들처럼 부와 명예(썩을 관)를 얻기 위해서는 밤잠을 설치며 절제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나의 이기심과 정욕(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수고를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라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할 거룩한 여정입니다. 우리는 내 권리를 포기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본능의 욕구를 쳐 복종시키는 십자가의 자기 절제를 뼈저리게 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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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5 영적 특권에 안주한 이스라엘의 실패
예수님은 광야 길을 걷던 이스라엘에게 친히 신령한 음료를 내어주신 영적 반석이시며, 특권에 안주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의 실패를 통해 우리를 깨우치시는 진리와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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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만나)과 신령한 음료(반석의 물)를 마셨다고 회고합니다. 그들을 따르던 신령한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셨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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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논증의 무대를 구약의 광야 이스라엘로 옮깁니다. 1-4절에 반복되는 "다(all)"라는 단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동일하게 엄청난 영적 은혜에 참여했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구름과 바다를 지나는 출애굽 사건을 기독교의 '세례'로, 만나와 반석의 물을 '주의 만찬(성찬)'으로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합니다. 영적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대반전이 5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엄청난 성례적 특권(세례와 성찬)을 누렸던 그들이었지만, 그 은혜가 그들의 구원과 생존을 기계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은 우상 신전에 들어가 제물을 먹어도(우상 숭배의 자리에 참여해도) 자신들은 이미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했으니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성례관(Sacramentalism)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주님)은 이스라엘의 처참한 시체들이 뒹구는 광야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임재 상징 아래 있으면서도 우상에게 절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두렵게 경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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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가 '교회 마당을 밟고 세례를 받았으며 직분을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영적 안전을 확신하는 '종교적 기득권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주일에는 성찬과 예배에 참여하여 신령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평일에는 버젓이 직장과 사회에서 탐욕과 권력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 꿇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나의 직분이나 성경 지식, 모태 신앙이라는 과거의 영적 이력서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망상을 철저히 부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동판매기에서 나오는 산물이 아닙니다. 내 삶에 십자가의 복종과 거룩함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우상(돈, 쾌락, 명예)과 타협하다가 광야에 엎드러진 이스라엘처럼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매주 예배당에 나아올 때마다 습관적인 종교 의식에 머물지 말고, 내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드리는 영적 갱신이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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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11 말세를 만난 자들의 거울, 광야의 범죄
성령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패역한 역사를 본보기(거울)로 기록하게 하사,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의 악한 우상과 정욕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경성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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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광야 이스라엘의 실패가 우리의 '본보기(typos)'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그들의 구체적인 네 가지 죄악인 우상 숭배(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뛰놂), 음행(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음), 주를 시험함(뱀에게 멸망함), 원망함(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함)을 열거하며 이와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모든 일은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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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범죄 사건들이 단순히 과거의 죽은 문자가 아니라, 새 언약 백성을 향한 '예표론적 본보기(튀포스)'이자 경고의 거울임을 밝힙니다,. 바울이 나열한 네 가지 죄악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우상 숭배(7절) : 금송아지 사건(출 32:6)의 인용으로, 우상 신전 연회에 참석하여 우상 제물을 먹고 즐기는 고린도 교인들의 행태를 저격합니다.
음행(8절) :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던 사건(민 25장)입니다. 고린도 사회의 성전 창기 문화를 교회로 끌고 온 이들을 경고합니다.
주를 시험함(9절) : 광야 길로 인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 불뱀에 물린 사건(민 21:5-6)입니다.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바울의 사도권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험하던 교만을 찌릅니다.
원망(10절) : 고라 자손의 반역(민 16장)처럼 교회 내에서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며 지도자와 형제를 원망하여 파당을 짓는 분열의 죄악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말세를 만난 우리(11절)"라는 종말론적 시각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현재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마주한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일깨웁니다. 자유와 권리라는 미명 하에 형제를 짓밟고 세속의 죄악을 탐하는 것은 영원한 멸망으로 직행하는 급행열차임을 알리는 목회자의 피 맺힌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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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죄를 짓고도 '시대의 문화'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교묘히 포장합니다. 오늘날의 우상 숭배는 눈에 보이는 신상에 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 대박을 위해 영혼을 팔아넘기는 탐욕, 미디어를 통한 은밀한 음란물의 소비,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직장 상사나 교회의 리더를 함부로 헐뜯고 원망하는 악한 입술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의 시체들을 밟고 지나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일상과 일터에서 "이 정도는 남들도 다 하는 문화적 관용이지"라며 세상의 악을 즐겨하려는(타협하려는) 욕망이 솟구칠 때마다 이 엄중한 멸망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특히 타인을 향해 내 자유와 권리를 무자비하게 주장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죄가 됨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돌이켜 거룩한 순결을 지키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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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13 선 줄로 아는 교만 경고와 미쁘신 하나님
하나님은 스스로 섰다고 자만하는 우리의 교만을 꺾으사 겸손하게 하시며, 맹렬한 유혹과 환난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감당할 힘과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미쁘신(신실하신)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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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서늘한 명제를 던집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위로의 약속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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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고린도전서 8장부터 이어진 기나긴 우상 제물 논증의 절정이자 대반전의 결론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12절)는 철저히 자신들의 신학적 지식(그노시스)과 성례적 참여를 근거로 '우리는 영적으로 강한 자요,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자들을 향한 직격탄입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가장 확실한 징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준엄한 심판의 경고로만 끝맺지 않습니다. 13절은 영적 딜레마에 빠진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장엄한 보호 선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회생활과 상업적 이익을 위해 우상 신전의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현실(불가항력적인 시험)'이라고 변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미쁘사(신실하사, 피스토스 호 데오스)"라는 신론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시험(유혹과 환난)은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제하시며(감당할 만한 것만 허락하심), 반드시 '피할 길(에크바시스, 출구)'을 내어 주십니다. 이 피할 길은 마술적인 공간 이동이 아니라, 14절의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도망치라)"는 명령처럼, 죄의 자리에서 단호하게 결단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십자가의 은혜와 인내의 능력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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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수많은 타협의 유혹에 직면합니다.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회식 자리의 타락한 문화나 불의한 관행에 동참해야 한다"며 자신의 연약함을 합리화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상황을 핑계 삼는 우리의 비겁함을 꼬집습니다. 미쁘신 하나님은 우리가 타협하지 않고도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피할 길'을 이미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신앙의 연륜이나 지식을 자랑하며 "나는 절대 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방심하는 영적 교만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선 줄로 아는 자의 착각).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죄의 유혹이나 극심한 삶의 환난이 몰려올 때, 내 힘으로 싸우려 하지 마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십자가 뒤로 숨으십시오. 우상과 탐욕의 자리에서 과감히 일어서서 돌이키는(피하는) 결단이야말로, 미쁘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구원의 출구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믿음의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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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거룩하시고 미쁘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썩어질 세상의 관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발버둥치면서도, 정작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위해서는
나의 육체와 이기적인 욕망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게을리하였던
저희의 영적 나태함을 뼈저리게 회개합니다.
주님, 출애굽의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입고서도
광야에서 우상 숭배와 음행, 교만과 원망으로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참혹한 주검들이, 바로 영적 기득권에 안주하여
세속의 우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교회와 우리의 모습이요 내 속사람의 민낯임을 고백합니다.
오 주님,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이 서늘하고도 준엄한 경고가 우리의 영혼을 찌르는 거룩한 채찍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례와 직분을 방패막이 삼아 값싼 은혜를 남용하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의 권리와 교만을 못 박는
자기 부인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방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과 환난으로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능히 감당할 힘과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끝까지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 공동체가 거짓된 영적 안전감을 버리고,
형제를 위하여 내 권리를 포기하며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끝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거룩하고 순결한 주님의 신부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요 참된 반석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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