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6:1-27 브엘세바의 밤, 제국의 심장으로 동행하시는 맹렬한 은총
.
참된 신앙이란, 미지의 두려움 앞에서 주저앉은 자아를 넘어 '현실의 장벽과 하나님의 초월적 신비를 동시에 읽어내며 다음 단계의 삶을 상상하는(묵상)' 영적 도약을 통해, 상처 입은 우리를 일흔 명의 온전한 생명으로 엮어 기어코 제국의 한복판까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위대한 여정입니다.
*
삶의 익숙한 요새를 떠나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미지의 경계선에 서야 할 때, 인간은 누구나 짙은 두려움과 망설임에 사로잡힙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내면은 지금 이 순간, 약속의 땅 가장자리인 브엘세바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밤을 지새우던 야곱처럼 캄캄한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는 멈춥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왜 그는 주저했을까요. 애굽은 철저한 신분 구별 아래 바닥 계층의 사람들이 인격을 박탈당한 채 거대한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부속품처럼 착취당하던 제국의 폭력적 중심지입니다. 평생 유목민으로 살아온 늙은 야곱에게 그 심장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끔찍한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가족은 20여 년 전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넘겼던 잔혹한 폭력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파괴된 공동체였습니다.
.
그 캄캄한 밤, 두려움에 떠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환상 중에 찾아오시어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3-4). 하나님은 "네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착취와 폭력이 지배하는 그 어두운 제국의 현실 속으로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세속의 한복판에 기꺼이 스며들어, 상처 입은 백성의 손을 친히 맞잡고 동행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살려내시는 임마누엘의 맹렬한 은총입니다.
.
이 은혜는 이어지는 긴 족보를 통해 경이로운 완성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 수가 모두 일흔 명이었음을 명확히 기록합니다(창 46:27). 이 명단은 단순한 인구 조사가 아닙니다. 이기심과 편애, 살의와 거짓으로 산산조각 났던 가족이 마침내 하나님의 끈질긴 섭리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거쳐 온전하고 완전한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묶여졌음을 선언하는 위대한 샬롬의 증언입니다.
.
이토록 낯설고 두려운 인생의 흉년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감각하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정성국 교수는 묵상이란 "현실의 삶만을 응시하던 우리가 말씀을 펴면서 두 세계를 동시에 읽는 것"이며 "마침내 다른 삶을 꿈꾸고 다음 단계의 삶을 상상하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갈파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은 당장 눈앞의 기근과 제국의 위협이라는 한 가지 세계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묵상은 내 생존을 방어하려는 옹졸한 시선을 거두고, 나보다 앞서 애굽으로 내려가시는 초월적 하나님의 신비를 동시에 읽어내는 일입니다. 묵상은 두렵고 흠집 많은 내 삶의 자리를 기어코 나를 일흔 명의 온전한 생명으로 빚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편입시키며, 기꺼이 다음 단계의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는 치열한 헌신입니다.
.
이제 내 힘으로 인생의 두려움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그 피곤하고 서늘한 짐을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형제들끼리 서로를 팔아넘겼던 야곱 가족의 치명적인 허물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의 벼랑 끝으로 친히 찾아오시어 그들의 남루한 이름을 하나하나 생명의 책에 엮으시며 제국의 한복판까지 동행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두려워 떨며 멈춰 선 우리의 비루한 일상 곁으로 다가오시어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 하시며 기어코 우리를 생명과 환대의 길로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그 압도적이고도 다사로운 자비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
우리의 연약한 신앙 여정은 척박하고 메마른 광야에 서 있는 나무가 깊은 수맥에 닿기 위해 뿌리를 뻗어 내리는 일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타는 듯한 가뭄 속에서 금방이라도 잎이 타들어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세상은 당장 네 힘으로 물을 구하지 않으면 끝이라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땅속 가장 깊은 곳에는, 결코 마르지 않는 거대한 은총의 물길이 고요히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며 바깥의 메마른 현실만 바라보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말씀 안에서 다음 단계의 삶을 상상하며 영혼의 뿌리를 가장 깊은 곳으로 뻗어 내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세상의 거센 모래바람 앞에서도 결코 시들지 않고 일흔 명의 찢겨진 생명조차 넉넉히 품어 살려내는 든든하고 푸른 은혜의 거목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듣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