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18-34 유다의 어깨에 내려앉은 은총, 상처를 끌어안고 피어난 대속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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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나만의 안전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던 이기적인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형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는 '수평적 대속'의 자리로 나아가며,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을 넘어 성경이 내 영혼을 읽어내도록 내어 맡기는(묵상)' 치열한 대화를 통해, 일그러진 우리의 과거조차 기어코 구원과 화해의 도구로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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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화려했던 꽃잎들이 미련 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 작고 단단한 초록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하는 생동하는 아침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허물어뜨려 새로운 생명의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의 숭고한 섭리 앞에서도, 내 것을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차가운 세상의 인력에 지쳐 한숨짓고 계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모호한 현실 속에서 짙은 회의를 품고 참된 신앙의 길을 더듬고 계신 모든 분의 영혼에 창조주 하나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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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형제들은 꼼짝없이 절벽 끝에 섰습니다. 베냐민만 두고 도망친다면 자신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그렇게 속삭입니다. 꼬리를 자르면 몸통은 산다고. 그런데 그 차갑고 무거운 침묵을 깨고, 유다가 천천히 앞으로 나섭니다. 창세기 44장 18절의 그 장면, 유다가 요셉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그 짧은 한 걸음이 참으로 묵직하게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슬픔을 말했습니다. 막내를 잃으면 아버지가 스올로 내려갈 것이라고, 그 늙고 지친 사람의 심장이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낱낱이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 대신 내가 머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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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누구였습니까. 20년 전, 동생 요셉을 은 이십 세겔에 팔자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이었습니다. 이기심이란 때로 이렇게 구체적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제 평안을 지키기 위해 가장 약한 이를 제물로 삼는 일, 그것이 유다의 과거였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숨겨둔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지금 아버지의 슬픔과 동생의 공포를 자기 어깨에 얹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그가 이미 충분히 깎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위기가 그를 몰아붙였고, 아버지의 눈물이 그를 찔렀으며,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의 무게가 그를 오래 짓눌렀을 것입니다. 상처와 수치와 회한이 층층이 쌓인 세월 속에서, 유다 안의 단단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조금씩 부서졌습니다. 그 부서짐이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자리를 열어주었습니다. 레비나스는 참된 윤리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여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의 그 한 걸음은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영웅적 희생이 아니라, 깨진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거룩한 항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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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를 수 있을까요. 스스로 결심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곳은 말씀 앞에 오래 엎드려 있는 사람에게 열리는 자리입니다. 묵상이란 내가 원하는 위로를 성경에서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나를 읽어내도록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본문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나를 파헤치도록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때로 아프고, 때로 부끄럽습니다. 말씀이 내 안의 이기심을 건드리고, 내가 숨겨두었던 유다의 얼굴을 낱낱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하고 고요한 대화의 시간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빚어집니다. 유다가 아버지의 슬픔을 그토록 생생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슬픔을 오래 헤아리고 또 헤아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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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유다의 과거를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을 판 그 어두운 사건을 없었던 일로 처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밑바닥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그를 대속의 자리에 세울 수 있는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히고 상처받으며 비틀거리는 우리의 남루한 일상을, 기어코 화해와 생명의 이야기로 엮어내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자비에 있습니다. 투박한 돌멩이가 강물 한가운데 놓여 징검다리가 되듯, 우리의 깨진 자아가 이웃의 발이 밟고 건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압도적인 솜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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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 곁에 무너져가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두렵습니까. 먼저 말씀 앞에 고요히 앉으십시오. 성경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 읽어내도록, 그 불편한 침묵 속에 조금 더 오래 머무십시오. 그 자리에서 유다가 변화되었듯, 우리도 변화됩니다. 형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그 눈부신 자리로, 말씀이 우리를 천천히 이끌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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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나 나눕니다. 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거칠고 투박한 돌멩이가 차가운 강물 한가운데 놓여 '징검다리(Stepping Stone)'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이기심은 그 돌멩이(우리 자아)에게 물에 젖지 않는 뽀송하고 높은 마른땅에 홀로 머물며 남들 위로 군림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위대한 건축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그 뾰족한 이기심을 거센 은총의 강물 속(성경이 나를 읽어내는 깊은 묵상의 시간)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에 깎이고 수많은 사람의 흙 묻은 발길에 밟히는 희생을 묵묵히 감수해야 하지만, 우리가 내 안위를 포기하고 이웃의 고통을 짊어지는 수평적 대속의 자리에 기꺼이 엎드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절망의 강을 건너는 수많은 생명들을 무사히 구원의 언덕으로 이끄는 가장 단단하고 숭고한 은혜의 디딤돌로 아름답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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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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