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5:27`36:8 서로를 살리는 거룩한 빈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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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한정된 것을 독점하려는 투쟁의 맷돌을 멈추고, 죽음이라는 유한성 앞에서 기꺼이 기득권을 양보하며 형제에게 삶의 자리를 열어주는 넉넉함으로써, 나와 하나님을 잇는 은총의 회로를 완성해 가는 아름다운 평화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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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푸르고 드높은 하늘이 아득하게 펼쳐진 이 맑은 날, 온 나라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환해집니다. 아이는 어른의 줄어든 꿈을 기억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먼저 자리를 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먼저 무릎을 굽히고, 먼저 공간을 내어주고, 먼저 기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린이날의 가장 깊은 정신은 경쟁에서 이긴 자의 축제가 아니라, 약한 자를 위해 강한 자가 자발적으로 자리를 양보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가 창세기에서 만나게 될 이야기의 심장과 조용히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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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본문은 창세기 35장 후반부와 36장 전반부입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이삭이 마침내 숨을 거두고,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나란히 아버지를 장사 지냅니다. 그리고 36장에 이르면 에서는 자신의 일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동생 야곱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갑니다. 표면만 읽으면 단순한 족보 기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낮고 조용한 구절들 사이에는, 인간의 가장 지독한 욕망과 가장 아름다운 양보가 동시에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숨결을 천천히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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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울창한 숲의 키 큰 나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기묘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보입니다. 나무들은 서로 가지를 뻗으면서도 이웃 나무의 가지와는 결코 겹치지 않습니다. 마치 서로의 영역을 조심스럽게 존중하듯,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가느다란 빈틈이 생겨납니다. 생태학자들은 이를 수관 기피(Crown Shyness)라고 부릅니다. 나무들의 거리두기, 혹은 나무들의 예의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비워진 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와 숲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바닥에 있는 어린 생명들까지 골고루 먹여 살린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영역을 포기한 그 다정한 빈틈이 오히려 숲 전체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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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는 자꾸 이 수관 기피를 떠올립니다. 그는 기꺼이 빈틈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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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에서 싸운 두 사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에서,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야곱, 그리고 죽이겠다는 형의 분노를 피해 20년 넘게 도망쳐 살아야 했던 세월. 이것은 두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적으로 삼는 인간의 근원적 탐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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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용서, 변화 없는 선포, 대가 없이 주어지는 위안입니다. 그것은 삶을 건드리지 않고, 관계를 바꾸지 않습니다. 진정한 은혜는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끌어당겨 무언가를 내려놓게 만듭니다. 에서와 야곱의 화해가 값싼 화해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것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역사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빼앗겼던 에서가 먼저 그 결단을 감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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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이삭의 죽음은 그 결단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문지방이 됩니다.
이삭이 기력이 다하여 숨을 거두고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갈 때, 성경은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9). 이 한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요. 창세기는 이미 아브라함의 장례를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치렀다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창 25:9).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이 화해의 제스처는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족보와 죽음의 기록 사이에 이 짧은 문장들을 새겨 넣음으로써, 인간의 가장 깊은 화해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일어난다고 조용히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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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유한함을 압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시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바로 그 버림받음의 심연에서 예수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회로가 완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오히려 관계가 완성된다는 역설입니다. 이삭의 무덤 앞에 선 에서와 야곱도 그랬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토록 치열하게 다투었던 것들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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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스승입니다.
그리고 36장이 시작됩니다. 에서는 가나안 땅을 떠납니다. "그의 동생 야곱에게서 떠났으니 이는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류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창 36:6-7). 우리는 오랫동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에서를 약속의 땅을 잃은 패배자로 해석해 왔습니다. 가나안을 떠났으니 하나님의 약속에서 벗어난 자라고 판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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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송민원 교수가 제안하듯 수평적 시선으로 이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면, 에서의 선택은 전혀 다른 의미로 빛납니다. 그는 땅을 두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재물 때문에 다시 형제의 원수가 되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먼저 물러났습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결단이었습니다. 도주가 아니라 증여였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가나안을 주었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변방 세일 산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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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은 현대 기술 사회의 핵심을 효율과 지배의 논리로 진단했습니다. 모든 것을 수단으로 환원하고, 관계를 이익의 계산으로 처리하는 문명의 흐름 속에서, 그가 가장 경계한 것은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그 논리에 포획되는 일이었습니다. 에서의 시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정된 땅, 한정된 풀밭, 한정된 물. 그 희소성의 논리는 형제를 경쟁자로 만들고,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문을 걸었습니다. 에서는 그 주문을 스스로 깼습니다. 희소성의 논리가 형제를 잡아먹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자리를 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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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이 칼 폴라니의 통찰을 빌려 경고하셨듯, 우정도 평화도 생명도 오직 이익이라는 사탄의 맷돌 속에 집어넣고 갈아버리는 세상에서, 에서는 그 잔혹한 맷돌을 스스로 멈춰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멈춤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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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날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 장면을 떠올립니다.
아이들이 좁은 그네를 차지하려고 다툴 때, 어른이 한 발짝 물러서면서 "네가 먼저 타"라고 말합니다. 그 한마디로 싸움은 멎고, 웃음이 피어납니다. 어른의 양보가 아이에게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줍니다. 먼저 자리를 비워주는 어른의 뒷모습 속에서 아이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의 자리마저 채우고 있는지요. 어린이날의 진정한 정신은 아이들을 위해 어른이 먼저 기꺼이 수관 기피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내 욕망의 가지를 한 뼘 거두어들이고, 그 비워진 틈으로 햇살이 흘러들어 오도록 허락하는 것. 에서의 발걸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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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묵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오래된 수도원의 독서 전통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기보다 성경에 읽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방식입니다. 본문을 천천히 읽고,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 속으로 스며듭니다. 헤시카즘(Hesychasm)의 전통도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저 서 있는 것. 이 침묵과 고요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작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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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이란 무엇입니까? 묵상은 내 성공을 위한 말씀 채굴 작업이 아닙니다. 묵상은 타인을 밟고 이기려는 세속의 스위치를 끄는 일입니다. 묵상은 내 영혼과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의 담벼락을 허무는 일입니다. 틸리케가 말했듯, 버림받음의 심연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예수님처럼, 묵상은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과의 회로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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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세일 산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 속에도 묵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분노를 내려놓고, 원한을 흘려보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가 가나안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고요히 받아들이는 과정. 그것은 결코 쉬운 내면의 작업이 아닙니다. 묵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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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옥중서신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비로소 당신의 힘으로 채우신다고 썼습니다. 타자를 위한 교회, 타자를 위한 삶이라는 그의 신학적 확신은 에서의 발걸음과 깊이 공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승리한 자의 편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기 자리를 비운 자의 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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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에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을 떠난 에서에게 에돔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일구도록 허락하셨고, 훗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신 23:7)고 명하시며 그를 끝까지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중심을 차지한 자에게만 독점되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 변방으로 기꺼이 흩어진 이들의 걸음까지도 넉넉히 덮고 보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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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금 변방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시는 혹시 지금 변방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야곱처럼 영리하게 중심을 차지하지 못해 늘 손해만 보는 것 같아 쓸쓸하신 분이 계십니까?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보니 내 자리가 세일 산 같다는 생각에 서글프신 분이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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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자리입니다. 수관 기피의 숲에서 빈틈이 가장 많은 햇살을 받듯, 자기 욕망의 가지를 거두어들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깊이 쏟아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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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은 씨알 사상 속에서 역사의 주인공은 중심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자들이 아니라, 땅 위에 낮게 엎드려 묵묵히 생명을 키워내는 씨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에서는 씨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비워주며 살아가는 여러분도 씨알입니다. 역사의 겉면에 화려하게 새겨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기억 속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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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하루, 아주 작은 수관 기피를 실천해 보시겠습니까? 내 욕망의 가지를 한 뼘만 거두어들이고, 그 비워진 틈을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열어주십시오. 오늘이 어린이날이라면, 어른인 우리가 먼저 무릎을 굽혀 아이들에게 공간을 내어주십시오. 삶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소진해 온 그 에너지를 잠시 멈추고, 고요히 하나님 앞에 앉아 이렇게 여쭤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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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무엇을 쥐고 있습니까? 그것이 형제와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물음 앞에 오래 머무르십시오. 서두르지 마십시오. 마르틴 부버가 말했듯, 진정한 만남은 내가 상대를 수단으로 바라보기를 멈출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만남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을 멈출 때, 그 고요한 멈춤의 자리에서 은총의 회로가 조용히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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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세일 산을 향해 첫 발을 내딛던 그 순간, 무거운 원한과 투쟁의 칼을 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놓고 걷기 시작하던 그 발걸음 위에, 하나님의 눈길이 따뜻하게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 눈길은 오늘 여러분의 발걸음 위에도 동일하게 머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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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나무들이 서로를 향해 가지를 거두어들이는 그 조용한 순간, 이름도 없이 일어나는 그 다정한 양보의 순간에, 하나님의 빛은 가장 깊은 어둠 속까지 흘러들어 갑니다. 오늘 우리의 묵상이 그 빛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빈틈이 되는 것, 기꺼이 변방을 택하는 것, 기꺼이 형제에게 삶의 자리를 열어주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평화의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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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례의 길 위에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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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