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6:01-16 은혜의 기억과 공의의 발걸음 :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삶
*
미가서 6장은 하나님께서 변치 않는 증인인 산과 들을 세워 놓고 이스라엘과 벌이는 '언약 소송'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과거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 속에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상기시키며 백성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십니다. 이에 백성들은 과도한 제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 하지만, 하나님은 제물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일상의 상거래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불의와 속임수를 지적하시며, 공의를 저버린 삶이 가져올 황폐함과 징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
# 배경
주전 8세기 후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활동한 미가는 앗수르 제국의 팽창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주전 722년)을 목격하며 남유다의 부패를 경고했습니다. 상업 경제가 발달하면서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고, 상인들의 부정직한 저울과 지도자들의 탐욕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언약에 기초한 공의와 사랑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언약의 수호자'이십니다. 미가 6:8은 아모스의 정의, 호세아의 사랑, 이사야의 거룩을 하나로 통합한 구약 윤리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신약의 예수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
# 1-5절 언약 법정의 개회와 은혜의 회상
하나님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정죄하시기보다, 먼저 우리가 입은 은혜를 기억하게 하여 스스로 돌이키길 기다리시는 자비로운 변론자이십니다.
.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들을 증인으로 삼아 이스라엘과 변론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라고 물으시며, 애굽에서의 속량과 모세, 아론, 미리암을 통한 인도,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일, 싯딤에서 길갈까지의 보호를 상기시키십니다.
.
본문은 히브리어로 '리브(Rib)'라 불리는 전형적인 '언약 소송'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 재판장인 동시에 고소자로 등장하시면서도, 그 변론의 목적이 파멸이 아닌 '관계의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닌 '산'과 '땅의 기초'를 증인으로 세우신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지만,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이 성취된 역사의 현장은 영원히 변치 않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유를 억압하는 짐'으로 오해했음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상기시키시는 출애굽, 발람의 저주를 막으신 일, 싯딤(광야의 끝)에서 길갈(약속의 땅 입구)까지의 여정은 모두 '괴롭힘'이 아니라 '구원의 열심'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신앙의 침체는 하나님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입은 '구원의 기억'을 망각했기 때문에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과거의 은혜를 기억(Zakar)해 보라고 청구하십니다.
.
오늘 저녁, 일기장이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지난 1년간 하나님이 나를 '괴로움'에서 '건져주신' 사건 3가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봅시다. 막연한 감사가 아니라 '싯딤에서 길갈까지'처럼 구체적인 장소와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성경 읽기나 주일 예배를 '지켜야 할 의무'나 '무거운 짐'으로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변론'으로 관점을 바꿔봅시다. "주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저를 어떤 위험에서 건지려 하시나요?"라고 질문하며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
# 6-8절 참된 예배의 본질과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오는 화려한 제물보다,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공의와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
백성들은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 일 년 된 송아지, 천천의 숫양,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심지어 맏아들까지 바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이 단락은 '물량 공세'로 하나님의 마음을 매수하려는 종교적 위선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백성들이 제시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은 인간의 정성을 극대화한 표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전혀 없음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자신의 죄를 위해 '맏아들'을 드리겠다는 제안은 이방 신을 섬기던 인신 제사의 풍습까지 끌어들여 하나님을 달래보려 했던 영적 혼합주의를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8절을 통해 신앙의 3대 핵심 요소를 제시하십니다. 첫째, 정의(미쉬파트)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공적 책임입니다. 둘째, 인자(헤세드)는 언약적 신실함에 기초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셋째,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차나)은 앞선 두 가지 행위가 자신의 의가 되지 않도록 철저히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의 태도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소유(What)'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Who)'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
내가 헌금을 하거나 봉사를 할 때,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이 정도는 들어주셔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봅시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기도는 "주님, 무엇을 드릴까요?"가 아니라 "주님, 제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시나요?"로 바꾸어 보십시오.
주변에 내가 '당연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거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중 한 명을 택해 오늘 작은 친절(안부 문자, 따뜻한 음료 한 잔 등)을 베풉시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만만의 기름'보다 귀한 예배입니다.
*
# 9-16절 일상의 불의에 대한 고발과 심판
하나님은 우리 삶의 아주 작은 영역인 저울 눈금조차 지켜보시며, 공의가 사라진 곳에 평안과 번영이 머물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시는 분입니다.
.
하나님은 악인의 집에 있는 불의한 재물과 속이는 저울, 부자들의 포악과 주민들의 거짓말을 고발하십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그들을 쳐서 병들게 하시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심어도 거두지 못하는 헛된 수고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
마지막 단락은 신앙이 성전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상거래의 현장'과 '언어생활'로 확장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속이는 저울'과 '작은 에바(도량형)'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행위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임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 완전한 지혜"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아무도 보지 않는 시장 골목의 저울 눈금을 정직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므리의 법도'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오므리와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으나 영적으로는 가장 타락했던 왕들입니다. 그들의 방식대로 불의하게 얻은 재물은 결국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심어도 거두지 못하는' 허무의 심판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번영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독이 된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심판은 단순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쌓아 올린 바벨탑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입니다.
.
직장 업무, 세금 신고, 혹은 인간관계에서의 약속 등에서 내가 이득을 보기 위해 조금씩 눈속임하고 있는 영역은 없습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세상의 방식(아합의 예법)을 거부하고, 오늘 하루 정직한 기준(하나님의 지혜)을 선택하십시오.
더 많이 가지려다 정작 이미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오늘 점심이나 저녁 식사 시간에 TV나 스마트폰을 끄고,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음식과 가족의 소중함을 온전히 느끼며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자족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
# 거둠의 기도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까지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오늘 미가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 우리의 무뎌진 양심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건져 주시고 날마다 선한 길로 인도하셨건만,
우리는 그 은혜를 잊은 채 주님의 말씀이 짐이 된다고 불평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화려한 예배와 많은 예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님과 함께 걷는 것임을 다시금 가슴에 새깁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속이는 저울을 버리고,
약한 자의 눈물을 닦아 주며, 세상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신실한 남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걷는 길이 비록 좁고 험할지라도,
인자와 진실로 우리를 덮으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하게 하소서.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