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1:01-15 다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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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1:1-15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16년 동안 중단했던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도록 촉구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집을 꾸미는 데는 분주하면서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며 성전 재건을 미룹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그들의 삶이 공허하고 땀 흘려도 만족이 없는 이유가 바로 황폐한 하나님의 집을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는 준엄한 명령과 함께, 성전 재건이라는 우선순위의 회복을 명하십니다. 놀랍게도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듣고 즉각 두려움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위로와 함께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재건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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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 때는 페르시아 다리오 왕 2년 (BC 520년경)입니다. BC 538년 고레스 칙령으로 유다 백성들이 1차로 귀환한 후,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에스라 3장)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거센 방해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공사는 16년이나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에스라 4장) 백성들은 희망을 잃고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문화적 배경 : 귀환한 백성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황폐한 땅을 개간하고 자신들의 생계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판벽한 집'(1:4)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나름대로 안정과 사치를 추구하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회복했음을 보여줍니다. 생존의 문제가 신앙의 문제를 압도해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신학적 배경 : 구약 시대에 성전은 단순히 예배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상징하는 거룩한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황폐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명기 28장 등의 언약에 따라, 순종에 복을, 불순종에 가뭄과 기근 같은 저주를 내리시는 분으로 고백되었습니다. 학개는 백성들이 겪는 경제적 궁핍(1:6, 10-11)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바로 우선순위를 잃어버린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자 '신호'임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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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나님의 부르심과 백성의 변명 : 멈춰선 자리,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영적 무관심과 안일한 변명 속에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일을 위한 거룩한 열심을 회복하기를 촉구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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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핑계로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황폐한 성전을 보시며 "너희가 펏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며 그들의 우선순위를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다리오 왕 2년 여섯째 달 초하루,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고 통렬하게 반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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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합니다. 백성들의 변명,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일견 신앙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겸손한 표현 같지만, 실상은 불신앙의 정중한 합리화입니다. 그들은 외부의 방해와 경제적 어려움을 '하나님의 뜻'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가장 중요한 사명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반면, '판벽한 집'은 '패널(나무판)로 마감한 집'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안락함과 사치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무너져 비를 맞고 있는데, 나의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는 분주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선순위의 전도(顚倒)'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계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계를 핑계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냈습니다.
이 질문("너희가 이 때에 펏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은 우리의 정곡을 찌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순서를 바로잡으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락함보다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 즉 우리 마음속 '하나님의 집'이 먼저 세워지기를 애타게 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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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때가 아니다", "너무 바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이 좀 더 크면"이라는 신앙적인듯한 변명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말씀 묵상, 기도, 예배, 섬김)을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판벽한 집'(나의 경력, 재산 증식, 자녀의 성공, 안락한 노후)을 세우는 데는 그토록 분주하면서, 정작 내 영혼이라는 '하나님의 집'이 황폐해져 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나의 시간과 재물과 에너지의 사용처를 정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성도들의 안락함과 친목, 혹은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하며, 정작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과 사회의 아픔이라는 '황폐한 성전'을 돌보는 일을 "때가 아니다"라고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태의연한 종교 활동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적용은 '무조건 헌신하라'는 강요가 아닙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의 시간과 재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모셔 들이는 '태도의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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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1절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 : 무너진 삶의 이유, 삶의 공허함, 그 원인을 살피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헛된 수고로 끝나지 않도록,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경제, 건강, 관계)을 통해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이키도록 섭리하고 경고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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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백성들의 삶이 수고에 비해 결실이 없고 공허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집을 방치했기 때문임을 밝히시며,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5절)고 강력하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나열하십니다. 많이 뿌려도 수확이 적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스럽지 않고,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품꾼이 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전대'에 넣는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이유가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기 때문"(9절)이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과 땅의 소산을 그치게 하셨다고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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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행위를 살피라"는 말씀은 학개서의 핵심어입니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반성을 넘어, 삶의 총체적인 방향과 결과를 냉철하게 진단하라는 촉구입니다.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성전 재건을 미뤘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몸부림'이 오히려 '생존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구멍 뚫린 전대'는 현대인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삶의 공허함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문학적 은유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 물질을 소유해도 만족이 없는 영적 기근의 상태입니다. 이는 인문학적으로 '소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자연(이슬과 소산)과의 관계가 막히고, 노동(수고)의 열매로부터 소외되며, 결국 자기 자신(먹어도 배부르지 않음)으로부터 소외된 것입니다.
그들은 원인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명확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서 제외한 결과, 삶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핍'과 '공허함'이라는 삶의 신호(Sign)를 통해, "너희가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하신 말씀의 구약적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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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금, 아무리 애써도 삶이 나아지지 않고, 관계는 꼬여가며, 마음은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을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능력이 부족해서', 혹은 '불공평한 사회 구조' 탓으로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학개서는 우리에게 "너의 행위를 살피라"고, 그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찾아보라고 도전합니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의 90%를 '나의 판벽한 집'을 위해 쓰면서, 10%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하나님께 "왜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외치지만, 정작 '갓라밸'(God-Life Balance)이 처참히 무너진 것은 아닙니까?
현대 사회는 끝없는 성장과 소비를 부추깁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가 성공의 척도입니다. 교회조차 이러한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더 큰 건물과 더 많은 교인 수, 더 화려한 프로그램에 '빨랐지만', 정작 이웃의 고통과 사회적 불의에는 눈감는 '황폐한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는 이 명령은,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과 '풍요'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근본적으로 되물으라는,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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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5절 순종과 회복의 시작 : 말씀 앞에서의 경외함,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백성들의 작은 움직임에 즉각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임재의 약속으로 응답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새 일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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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학개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즉각 순종하며, 하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임재의 약속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즉시 학개를 통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위로와 약속을 주십니다.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다리오 왕 제2년 여섯째 달 24일에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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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절의 날카로운 책망이 12절의 즉각적인 순종으로 이어지는 이 놀라운 반전은, 학개서의 백미입니다. 무엇이 16년간 멈춰 있던 그들을 움직였습니까? 바로 '들음'과 '경외함'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지식으로 듣지 않고,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자신들의 실상을 보며 압도당했습니다. '경외함'(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불순종을 깨닫고 엎드리는 거룩한 떨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시작입니다.
백성들의 이 진실한 반응을 보시자마자,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13절) 이것이야말로 학개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며, 성전 건축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머무시는 것', 즉 임마누엘의 회복이었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15절)는 표현입니다. '감동시키다'는 히브리어 '우르'(עוּר)는 '흔들어 깨우다', '흥분시키다'는 뜻입니다. 16년 동안 무기력과 변명에 잠들어 있던 그들의 영(루아흐)을 하나님께서 직접 흔들어 깨우신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 말씀에 감동된 영이 움직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신약성경의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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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설교, 성경 읽기)을 들을 때, 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지적인 정보나 윤리적 교훈으로만 스쳐 지나갑니까, 아니면 나의 삶의 기반을 흔드는 '경외함'으로 다가옵니까? 순종은 무거운 '의무'나 '부담'이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특권'의 시작입니다. 내가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은 이미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계시며, 그 일을 감당할 힘과 소원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망설이고 있는 영역이 있습니까? '펏벽한 집'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순종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가장 큰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리더(스룹바벨, 여호수아)부터 평신도(남은 백성)까지 모든 구성원이 그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고, 함께 '감동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무기력과 변명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서는 길은, 거창한 비전 선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놓인 '황폐한 성전'(예: 돌봄이 필요한 지체, 무너진 예배의 자리, 섬겨야 할 이웃)을 향해 삽을 드는 작은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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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행위를 살피시는 주님 앞에 오늘 말씀을 들고 섭니다.
우리의 안락한 '펏벽한 집'을 짓느라 분주하여,
정작 주님을 모셔야 할 우리 마음의 성전이
황폐해진 것을 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신앙의 언어로 우리의 불순종을 합리화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은" 삶의 공허함 속에서도
그 원인을 깨닫지 못했던 완악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학개의 말씀처럼,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는 주님의 음성에
우리 영혼이 경외함으로 떨며 반응하게 하옵소서.
변명과 무기력에 잠들어 있던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미루어 두었던 순종의 자리에 기쁨으로 서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16년간 멈추었던 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나의 가정과 교회, 일터와 이 사회 속에서
황폐한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우는 거룩한 일꾼으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수고가 '구멍 뚫린 전대'에 담기지 않고,
주님과 함께 짓는 영원한 집을 세우는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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