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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0-30 천국 안식으로의 초대


예수님은 반응하지 않는 ‘세대’를 향한 탄식 선언에 이어 반응하지 않는 ‘도시’를 향해 탄식하시며 심판을 예고합니다. 천국복음은 결국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만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잘못된 종교전통의 굴레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을 천국의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 20-24절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을들이 회개 하지 않자 책망하십니다. 언급된 고을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입니다. 앞의 두 고을은 두로와 시돈에 비교해서 회개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가버나움은 소돔과 비교하여 그들의 교만을 책망하십니다. 이방의 두로와 시돈, 멸망과 죄악의 도시 소돔보다 못한 이들의 복음에 합당한 회개의 반응을 하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

마태복음에는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한 기적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 단락에서 반응하지 않는 세대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빈말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곳이라 한 것이 아니라 복음서에 다 기록하지 못한 주님의 권능에 대해 기록되지 않은 많은 역사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기적들이 증거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러한 권능에 대한 은혜에 반응하지 않고 급기야 이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없다는 것에 대한 반증으로 보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에 있는 고을들이어서 외세의 영향을 받아 이방족속들이 섞여 있는 바람에 예루살렘으로부터 혈통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갈릴리 인근 지역으로서 복음의 출발도 여기서였고 주님이 많은 활동이 있었던 곳이며 제자들을 불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소외된 이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향같은 이곳에서 선지자가 대접받지 못했던 것처럼 주님의 권능과 사랑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권능을 행하실 때마다 그의 육신의 부모를 알고 있고 어린 시절을 안다고 주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메시아 되신 주님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며 그것은 결국 주님의 권능에 대한 메시지도 깨닫지 못한 결과로 귀결됩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지역이 복음에 반응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환경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고라신은 상업로에 위치한 부와 권력을 가진 풍요함 때문인 것으로 보이고, 벳새다(물고기 잡는 동네라는 의미)는 지정학적으로 많은 어획량과 풍성한 추수가 가능한 지역으로 부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부요함들이 오히려 천국 복음에 대한 갈급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가버나움은(다른 복음서에는 이곳에서의 기적행함이 몇군데 있습니다) 주님을 잘 아는 지역이기도 하면서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마다의 자랑과 교만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라고 주님이 이들의 교만을 반문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

몰라서 그랬다는 것도 변명에 불과합니다. 알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더욱 심각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가진 소유로 인하여 정작 그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천국복음을 거절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권능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말 보고 들어야 했던 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강퍅함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의 말씀 앞에서 소위 믿는다고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정작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는 교만과 무지속에서 어리석게 반응하고 있진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는 앎에 갇히지 않길 힘써야 하고, 주님을 알아가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내려 놓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이 땅의 부질없는 소유와 바꾸는 어리석음 범하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이 권능을 행하심은 하나님나라 도래의 선포요 가르침이요 회복을 위한 큰 사랑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권능 앞에 우리의 반응은 ‘회개’ 곧 돌이킴이고 영접이어야 했고 더 나아가 한분 하나님만을 섬기는 거룩한 천국백성의 길로 행함이고 그렇게 복있는 자로 살아가며 축복의 통로 됨일진대 많은 권능을 경험하고도, 한번 빛을 비추임을 받고도 돌이키지도 반응하지도 않는 강퍅함은 결국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배은망덕이요 오래참으심에 대한 배반이요, 부르신 뜻에 대한 배도이기에 결국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보다 더한 심판을 선언하시게 된 것입니다.

부지런히 주님을 알아가는 일들, 많은 권능을 보고 경험하는 이들 중요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하신 뜻을 헤아려서 정작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반응 곧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는 일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 소위 주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른다 하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반응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진정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들이 심판을 면하는 길일 것입니다.



# 25-27절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복음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숨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계시)을 주님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임도 주님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천국 복음을 권능으로 증거하시는 주님, 그리고 주님의 간절한 소망과 사랑으로 계시 곧 가르침을 입은 자들이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고 그 뜻을 따르게 됩니다.

*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권능을 행하시며 가르치고 선포하신 천국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어떤 이들이 과연 이 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깨달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참된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들 곧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과 전통가운데 형성된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곧 우상이나 진배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이 계시해 주신대로 보고 듣고 배운대로 알고 만난 그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임하는 것은 겸손의 의미도 있으나 전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에 대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허락하심과 계시하심을 수용하고 영접하는 어린아이의 특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나타나심을 주님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그 뜻대로 보내심을 받고 천국 복음 곧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 곧 하나님 아버지는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증거해 주신 것을 받는 이들(영접함)만이 아버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천국복음이 예수님이고 이 복음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관계들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역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의 역사를 실행하신 예수님과 이 놀라운 은혜를 적용하시며 깨닫고 합당하게 반응(행)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까지 이해하면 오늘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사모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바람직한 반응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하여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 앎의 범위에 하나님을 제한하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자신 소견에 옳은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고 급기야 자신의 생각이 어느새 하나님의 뜻인것처럼 언행을 휘두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어느새 눈과 귀가 멀어버린 영적 장애를 가진 이들입니다. 마음이 굳어져 버려서 다른 하나님, 더 풍성한 하나님을 더 깊고 높고 넓은 하나님, 온 우주의 하나님을 그리고 성경 66권의 역사와 천지 만물의 주재이시며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을 기껏 수년동안 배우고 경험한 지식의 범주에 가두어서 다 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새 눈이 가려져서 정작 주님의 권능과 말씀을 보고 듣고도 볼 수 없게 눈이 가려져 버리기에 이를 숨기었다고 표현합니다. 스스로 갇히고 가려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소외된 이들 어린아이 병자 죄인들은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알기에 겸손히 수용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라고도 표현합니다. 팔복에서 이미 언급된 복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의 앎은 말씀을 통해 계시해 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의 실존과 정체성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 땅에 우리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함인지를 바로 깨달아 주님의 뜻을 따라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배워 우리의 삶의 내용과 방향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말씀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의 내용과 방향을 말씀의 거울이 비춰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 내일 일은 모르기에 내 발에 비춰주는 등불을 따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그렇게 주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반응이 지금 우리가 변함없이 우리 삶에 채워가야 할 천국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 28-30절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안식으로의 초대에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불러 주님께 나아오면 쉬게 하리라 약속해 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합니다. 그럼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여기서 짐은 죄의 짐이나, 인생의 짐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것은 잘못된 율법의 적용으로 인해 생기는 율법주의의 무거운 짐을 말한다고 봅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안식일 법을 재해석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로 쉼 곧 안식하게 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와 겸손하다고 말씀하는데 이 두 가지 표현은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랑에 근거한 일을 하시는 성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멍에는 성경에서 긍정 부정적인 의미 모두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당대의 멍에는 우리나라에서 처럼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고 가는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는 주님이 함께 메어 주시는 멍에이고, 주님을 따라 가며 배우는 멍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힘으로 내 맘대로 가지 않고 따라가면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 가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원래 살리는 법이고 온전케하고 즐거이 따르게 하는 법의 본질을 되찾아 주는 것이기에 또한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이라는 표현은 삼분설 내지 이분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성요소의 어느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그 자체, 그리고 전인적 인간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통상 주님의 성품이 온유와 겸손하다 하고 우리도 그런 주님을 따라 갈 때 주님과 함께 우리는 치유와 회복과 온전케 됨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된 쉼 곧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그렇게 함께 할 때 안식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

창조의 목적이 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서 구원과 천국과 영생이라는 말과 연관되는 개념입니다. 주님은 새창조의 주님으로서 우리를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안식은 시간의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공간의 성소가 아니라 시간의 성소를 통해 자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공간의 성소를 세우고 지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공간에 두는 것은 천지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편재하지 않으시고 무소부재하십니다. 그것을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도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과 시간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영생으로서 시간의 성소에 속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일들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고 배우고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는 신앙이면 어딜 가든지 그 공간이 어떠하든지 거룩한 시간 곧 영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간에 제약된 신앙은 장소가 이동되면 그 시간의 성소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래의 취지를 잊고서 율법 조문에 갇혀서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고 남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은 원래 하나님의 뜻 곧 본질을 되찾아 자유케하면서 온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권능을 행하시면서 안식을 언급하시는 이유와 내일 본문에서 안식일의 성취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잘못된 신학, 신앙, 지식이 하나님과 율법을 오해하고 본질에서 벗어나게하여 결국 반응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길에서 돌이켜 참된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주님이 오신 뜻이고 마침내 이루실 사명이었습니다. 안식으로의 초대에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 기도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행하신 권능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을 알아갈 수록 우리가 잘못 가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이 이끄시고 뜻하신 대로 순종하길 원합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부질없는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뺏기지 않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 하셨으니

어리석은 길에 서지 않게 온유와 겸손으로 옷입게 하옵소서.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 하지 않으며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면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어린아이와 같이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이 계시해 주신대로 보고 듣고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주님 뜻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이 함께 지신 멍에를 메고서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주님께서 온유와 겸손으로 가르쳐 주신대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오며

그 가운데 허락하신 참된 쉼을 누리며

주안에 안식하면서

날마나 주님과 더불어 안식하며 살게 하옵소서

안식으로 초대하신 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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