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S 교육개발센터 주최 학습법 시리즈 특강
“성경의 맥을 잡아라”
장종길 장로
현, 도서출판 그리심 편집장
위의 제목은 평신도인 나에게는 너무 거창한 분야이다. 이를 설명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너무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나의 경험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느꼈던 점을 간증하는 형식으로 전개해야 할 것 같다.
언제인가부터인가 나는 성경이 너무 재미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획기적인 사건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 15년 후에 일어났다. 그 동안 성경이 송이 꿀처럼 달다거나 재미있다고 느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교회를 떠나 방황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시골 교회의 새파란 청년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집안은 기독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나의 사촌과 함께 처음으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나는 교회생활에 아주 열심인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때가 65년도였다. 젊은 사람이 많지 않던 교회에서 시골 청년은 얼마 되지 않아 주일학교 교사로 내몰린다. 당시'주일학교'라는 말도 낯설었던 나에게는 열심 하나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흔히 말하는 “당신은 주님을 영접했습니까?”는 말에서 '영접'이라는 말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가냘픈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전도사님은 나에게 책 한권을 소개한다. 루이스 벌코프의 「기독교신학 개론」이었다. 앞으로 교회 집사님이 되려면 누구나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내용이야 충분히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조금씩 신학 용어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채로 아직도 그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 생활에 익숙하게 될 즈음, 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 성경이 무엇인가 공부를 해보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나는 아주 두꺼운 주석 한 권을 구입한다. 공관복음 주석서였다. 마태복음부터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무조건 앞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 이제는 궁금했던 성경의 세계가 확 펼쳐 질꺼야!”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각한 것은 그나마 희미했던 믿음이 더욱 혼란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친절하게 성경의 세계로 인도할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에 주석의 설명은 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이 나를 교회에 붙들어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주님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신 가정에서 홀로 선 청년, 그 청년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오랜 방황을 계속한다.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가정을 갖는 과정에서 성경은 나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 동안 주일학교 교사, 청년회 회장, 그리고 교회 집사 등 착실한(?) 성도로서 교회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 사이에 1970년도 중반이 되었다. 물론 성경을 잘 모른다고 불편한 것도, 답답한 것도 없었다.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었으나 성경의 지식이 없다 해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교사용 공과책이 있었고, 혹 앞뒤 내용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그들을 가르치기에 답답함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직장생활을 「교사의 벗」이라는 데서 시작했다. 몇 년 후, 성서유니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매일성경」이라는 계간지(당시)를 내면서 차츰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물론 이때도 나는 성경이 재미있다고 느껴지지 아니했다. 성경을 '매일' 읽자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QT라는 단어가 한국교회에서 사용되지 아니하던 때였다. 따라서 「매일성경」독자도 많지 않았다. 경영의 어려움으로 결국 모든 직원이 사표를 내게 되었고, 이때 나는 총신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총신대학에서 나는 엄청난 영적 축복을 받게 된다. 소위 말하는 선지동산에서 여러 훌륭한 교수님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성경을 마음껏 연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뒤돌아보니 그것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순수했던(?) 청년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1976년도부터 총신대학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으나 성경의 기쁨을 느낀 것은 그 뒤로도 몇 년이 흐른 뒤였다. 나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시간을 내어 필요한 강의를 듣곤 했다. 이 때쯤 내가 출석하고 있던 교회에서는 남전도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회원 중 한 사람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주일 낮 예배 후에 둘러 앉아 성경을 읽자는 것이었다. 그 안은 즉각 회원들의 동의를 얻었고 그 다음 주부터 즉각 성경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라도 그 내용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누가 성경 내용을 설명해 주지?” 결국 내가 신학교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성경의 내용을 설명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어디부터 성경을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은 어떻게 설명을 한담…” “차라리 기존 교재를 이용한다면 문제될 것도 없을 텐데…” 나는 급히 성경공부 안내에 대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책 제목은 잊었는데, 그 책에서는 요한일서부터 읽을 것을 권면했다. 그 책의 안내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하루에 요한일서를 전부 끝냈다. 그 어려운 내용을 하루에 다 끝내다니…. 지금 생각하니 너무 무모한 교사가 아니었는가. 게다가 그 다음 주가 더 문제였다. “이번에는 어떤 성경을 읽을까?” 그 책은 다음 차례로 요한복음을 읽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고 안내했다. 급한 대로 주석을 읽고 간단하게 안내했다. 물론 집사님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냥 같이 성경을 읽는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얼마의 기간이 지나고 이번에는 누가복음을 공부했다. 한 주에 3장씩 요약해서 설명을 했는데, 역시 반응은 뜨겁지 아니했다. 물론 나 역시 뜨겁지 아니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일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회원들 각자 돌아가면서 식사대접을 했는데, 공부하는 즐거움보다는 먹고 환담하는 일이 더 즐거웠으리라. 그리고 얼마의 기간이 지나, 로마서를 공부할 차례가 되었다. 학교에는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요약해 놓은 쪽지들이 많이 굴러다녔다. 나는 로마서를 요약 정리한 쪽지를 발견한다. 잘되었다싶어 그 쪽지를 복사해 나누어주고 공부를 했다. 로마서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주에 한 장씩 공부했다. 문제는 요약된 내용이 로마서 2장밖에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이크, 큰일 났네. 어떻게 하지. 다음 주에 로마서 3장을 요약해서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고민을 거듭하다, 결단을 내린다. "뭐, 내가 직접 작성하지 뭘." 급하게 몇 권의 주석서와 참고 서적이 동원되었다. 책상 가득히 참고서적을 갖다 놓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 전보다 더욱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로마서 3장을 내손으로 직접 요약하던 그 날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지금까지 막혀있던 봇물이 터져나가는 기쁨을 느꼈다. 만약 내 주위에 로마서 3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 발견되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지도 모른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소리를 그렇게 많이 들어왔지만 그 내용이 로마서 안에 그대로 녹아있다니….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셨다고 생각한다. 이 시간 이후로 나는 그 기쁨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아니했다. 차 속에서, 집에서도 그 기쁨은 이어졌다. 그 날 이후로 성경연구는 나의 기쁨의 원천이요, 생명이 되었다. 로마서의 내용을 어떻게 하면 집사님들에게 잘 전달할까 고민하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모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경을 전달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성경이 재미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나는 직접 교재를 만들기 시작한다. 말이 교재이지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타자기도 드물었던 때라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지금 그 교재를 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 성경 공부는 2년간 계속 되었다. 열매가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나는 그 뒤로도 수많은 성경공부팀을 인도하게 된다. 우선 일주에 성경 한 장씩 교재를 만드는 일을 쉬지 않았다. 자연히 노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이 일은 내가 주님을 믿은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15년 동안 나는 종교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렇게 성경에 눈을 뜨게 되니까 분명히 전보다 다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과 다른 점은 눈에 보이는 윤리적인 삶의 어떤 열매보다는 무엇보다 내 안의 샘솟는 기쁨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는 방향이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내 안의 기쁨은 성경을 소개받는 모임에 바로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나는 그 동안 성경을 옆에 두고서도 긴 방황을 계속했을까? 물론 성경을 깊이 몰랐다고 해도 전혀 답답할 이유가 없는 삶을 살았다. “교회에 오래 다니다보면 언젠가는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겠지.” 그때까지 나에게 성경의 내용을 소개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꼭 성경을 그렇게 공부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성경의 지식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공과 책이었을 뿐이다. 그것도 교사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에 신학서적이 꼭 필요할 일이 없었다. 교회에서는 가끔 신구약을 통독할 것을 권면 받았지만, 통독을 몇 번 했다 해도 거기서 획기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종교생활의 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지금이야 성경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교재도, 강의도 많지만, 60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교재는 거의 주제적 접근 방법이었다. 혹 성경 전체를 훑어볼 수 있는 책이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면도였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공부하는 것도 자연히 평면도를 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주로 신약성경을 정리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지 않고 로마서를 가르친 것을 후회했다. 얼마 후 마태복음을 조금 깊게(?) 연구했는데, 마태복음을 연구하지 않고 로마서를 가르친 것을 후회했다. 결국 성경 어느 한 책을 가르친다 해도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때, 그러니까 청년의 때에, 지금과 같은 접근 방법을 소개하는 주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든가, 아니면 그런 책을 접근할 기회가 있었다면 나는 오늘 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두꺼운 주석 책을 뒤적이던 그때에 차라리 성경 전체를 개괄해 볼 수 있는 강해서나, 흔히 말하는 “성경신학”의 내용을 다룬 책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렇게 긴 기간을 방황한 그 일차적인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었다. 만약 말씀에 목말라 몸부림쳤다면 그 방황의 기간은 훨씬 단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또 다른 저항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왜, 성도들에게 이런 자각 증상을 눈뜨지 못하게 했을까”하는 울분이었다. 교회에서 말씀은 여전히 선포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양들은 여전히 배고파하고 있다.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면 되는데, 양은 여전히 우리 안에 갇혀 있고, 꼴은 맛없는 것뿐이다. 만약 우리에게 지속적인 신앙의 성장이 없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훌륭한 신학자들을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에게는 주변에 있는 신학 서적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출판부에서 근무했기에 교수들의 논문을 많이 접하고 있었는데, 이런 논문들은 이제 막 새로운 성경 세계에 눈을 뜬 나에게는 신앙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이는 혹 빠지기 쉬운 신학상의 오류를 잡아주었을 뿐 아니라 성경 공부의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이후 나는 훌륭한 신학자들을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신학자가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신학지남」(총신대 교수 논문집)은 나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고, 각 신학교에서 발간되는 논문집들은 정말 귀중한 보배가 아닐 수 없었다.
성경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때 막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던 여러 서적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G. I. 윌리암슨의「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주석」, J. I. 팩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H.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등의 서적들을 요약정리 또는 정독했다. 이를 통해 나에게는 내 나름대로의 성경 이해의 평면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아직 “성경의 맥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기억으로는 80년대 중반까지는 “언약” 개념이나 “하나님의 나라” 등의 주제가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것 같다. 논문 및 번역서를 통해 나는 “언약”이란 주제에 눈을 뜨게 된다. 특히 팔마 로벗슨이 쓴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S. G. De. Graaf의 언약사를 다룬 「약속 그리고 구원」 등은 성경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뒤이어 소개된 헤르만 리델보스의 「바울신학」(번역도 어렵고, 영어 원서도 어려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G. E. 래드의 「신약신학」 등의 서적들은 성경이해를 평면도에서 입체도로 바꾸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책들을 정독했고, 필요한 부분들은 요약 정리해 두기 시작했다. 나는 점차 계시의 점진성, 계시와 역사, 구속사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란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견해를 달리하고 있지만 G. Vos의 설명대로 언약 개념은 성경의 흐름을 잡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물론 요사이는 성경신학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신학서적이 봇물을 이룬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무엇부터 읽어야할까 할 정도로 많은 서적들이 번역 소개되고 있다. 전보다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서적과 강의가 넘쳐나고 있다. 복된 일이다.
“교회에서 성도의 믿음을 체크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교회에 출석해서 일정한 기간이 흐르면 신앙이 저절로 성장할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기도를 시킬까봐 머리를 숨기던 시절에서 어느 사이에 대표기도도 익숙해지고 성경지식도 상당한(?) 수준에 오른다. 웬만한 설교는 성경구절만 보아도 알아차린다.
어느덧 안수집사, 장로, 권사가 된다. “이제는 훌륭한 인격자가 되었겠지.” 그러나 상황은 이와 정반대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처음 믿었을 때 그 주체할 수 없었던 기쁨을 체험했을 것이다. 매일 교회에 가고 싶고, 매일 기도하고, 입에서는 찬송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처음에 느꼈던 복음에 대한 그 기쁨은 사라진지 오래다. 존경스럽던 어른들도 차츰 질타의 대상이 된다. 송이 꿀같이 달다던 성경 말씀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점차 모든 게 형식화 되어간다. 믿음이 화석화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 위에 열심을 더하지만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은 없다. 자연히 외식적인 삶이 되어간다. “나는 또 다른 바리새인이 아닌가!” 왜 처음에 가졌던 그 기쁨과 감격이 나도 모르게 사라져 갔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교회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체크하는 유일한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성도의 열심일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그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그 열심은 절망으로 빠져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외식적인 교인이 되기 쉽다. 더 나아가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더욱 침체되어 갈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의 성숙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교인들은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지낸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많다. 따라서 나도 모르게 습관적인 신앙생활이 되어버린다. 물론 그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즈음의 성도들은 전보다 더욱 바쁘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시간이 없단다. 자연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있기에 나는 일등 신자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어쩌다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지만 정작 참석해야 할 남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일까?”
최근,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신앙을 키우기 위한 여러 장치들이 도입되고 있다. 다양한 성장 프로그램들이 소개되고 있다. 세상이 다양화되고 성도들의 수준도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공부 교재도, 방법도 다양화되었다. 아주 고무스러운 일이다. 이 때문에 목회자도 바쁘다. 많은 세미나에 참석해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교회도 있다.
그렇다면 말씀 공부는 반드시 인격의 성장을 가져오는가? 물론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씀 연구가 단순히 신학적인 또는 성경적인 지식만을 추구한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교만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고도 했다. 성경을 가르치니 교만만 해지더라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을까? 나는 전달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즉 조금의 생명력만 있다면 분명히 성장할 수 있다. 복음은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연구는 단순히 성경의 내용만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인격을 성장시키는 일은 결국 성경을 전달하는 자의 몫이다. 만약 전달자가 비복음화 되어있다면 우리의 인격은 성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매개자(목회자이든, 말씀 사역자이든)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같은 성경이 손에 들려있지만 한 사람은 정통 사상을 또 한 사람은 이단 사상을 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말씀 사역자는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인가! 가르치는 일은 축복된 일이기도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성경에는 박사일꺼야”
교회 성도들은 신학교에 있는 교수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 건강이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오히려 영적 건강이 빈곤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신학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이런 분들이 갖고 있는 그 기쁨을 어찌 일반 성도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는 성경 지식이 바로 힘의 원천이 된다. 이런 분들에게 성경 지식이 교만의 원인이 될 리 없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영적 건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개의 성도들은 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님을 신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성경에는 박사인 줄로 안다. 또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이런 표현에 용서를 빈다). 그동안 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또 신학교에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성경을 잘 요리하는(?) 훌륭한 요리사는 그리 많이 배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고단한(?) 신학생”
대개의 경우 성경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신학교에 오게 된다. 적어도 3년 또는 7년을 공부하면 성경학자가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졸업이 임박해서야 깨닫게 된다.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성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몸부림치지 아니한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도전 받은 일도, 받을 일도 없다. 물론 당연히 성경의 맥을 잡는 일은 요원해진다. 성경이 한 눈에 잡히지 않는다. 적당히 공부해도 낙제할 일도 없다. 리포트를 쓰는 일도 수월치 않다. 이미 한 두 학기 배운 히브리어, 헬라어가 현재는 발음하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주일날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방학이 되자 더욱 바빠진다. 수양회를 준비해야 하고 여름성경학교 행사를 치뤄야 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졸업할 때가 된다. 성경을 잘 요리하기 위해 배운 신학이 목회 현장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신학 따로 성경 따로 놀기 시작한다. 진짜 공부는 정작 졸업 후에 시작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수없이 들어온 소리, 그것은 목회자들이 좀처럼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묵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보다 불충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성도들은 자각 증상을 느끼지 못한다. 목회자가 깨어 있지 못하다면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 변화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개 교회는 목회자의 따라 그 질의 높낮이를 달리한다. 어느 한 목회자의 영향력은 개인에게서 멈추지 아니한다. 그가 속해 있는 교회는 물론이고 그 지역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다. 그와 반대로 목회자가 게으르고 하나님의 복음을 바로 전파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큰 손해를 끼친다.
훌륭한 목회자, 인격적인 목회자,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귀중한 자산인가.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여기서 훌륭한 목회자란 어떤 개념일까?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를 통해 성경의 내용이 바로 소개되기를 원하실 것이다. 어느 한 목회자의 명령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장난감 병정과 같은 교인들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그런 공동체를 하나님은 원하실 것이다. 성도는 목회자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스런 양이기 때문이다.
“왜 성경을 공부시켜야 할까?”
교회 안에서는 좀처럼 말씀을 배우지 아니하려는 성도들이 많다. 이들을 잘 설득시키는 일도 말씀 사역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단순한 성경 지식의 증가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권면했을 것이다. 결국 그 길의 방해물이 무지(ignorance)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고의적인 무지,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시간도 있는데 전혀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이런 사람들은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넉넉히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명령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부지런히 선악을 분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반드시 성숙한 연단이 필요한데 성경은 바로 그 분별하는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선악에 대한 분별력도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성숙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간편하게 살려하면 세상의 상식을 따라 살면 된다.
좀처럼 교회에 헌신적이지 않은 사람들, 주일 낯 출석으로 신앙생활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영원한 손님으로 안주하려는 골치 아픈 사람들. 문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막무가내의 신앙이다. 맹목적인 열심, 도에 지나친 신비주의, 열심과는 달리 그 생활이 아주 비성경적인 사람들이 더 문제다. 만약 올바른 교육이 없다면 신앙 연륜은 오히려 공동체에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네 공동체에는 믿음이 아주 좋다는 분들에게서 강한 고집과 교만을 볼 수 있다. 믿음이 자란 것이 아니라 고집이 더욱 자랐을 뿐이다. 이는 교회 내에 더욱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목회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과 일생동안 싸움을 치러야 한다.
“인격의 변화란 가치관(세계관)의 변화”
성도들은 나름대로 훌륭한 신자에 대한 상이 그려져 있다. 그 이상이 각자 다르겠지만 대체
로 교회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모든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온전한 십일조를 내며, 때
로는 새벽기도회를 지키며, 봉사에도 적극적인 사람을 모델로 삼는다. 이런 분들이 훌륭한
성도인 것은 확실하나 이들 모두가 인격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만끽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는 수없이 이런 일들을 소개하고 독려하고 있다. 열심 위에
열심을 내지만 마음은 공허해지기 쉽다. 우리 성도들의 뜨거움은 단순한 감상적 혹은 감정
적 흥분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곧 식어버리기 쉽다. 이런 예는 아주 뜨거운
(?) 부흥회에 참석했지만 그 열기가 이내 식어버리고 삶은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수없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큰 산을 오르는데 등산로가 여럿이듯이 성경을 공부하는 데 이것만이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우겨댈 필요는 없다. 어느 교재이든지 다 특성과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경험으로 보아 과거에는 주로 주제적 접근이 많았음을 본다(예; 선교 단체의 대부분의 교재, 대․소요리문답, 각 교단의 계단 공과, 평신도 양육 교재 등등). 그것은 조직신학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설교도 그러했다. 필요에 따라 신구약 여기저기서 성경 구절이 동원(?)된다. 어떤 개념을 정리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 결국 가르침의 결론은 윤리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 모두가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의 큰 흐름이었다. 이미 어른이 된 성도들에게는 익숙한 스타일이었다. 나도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길들여져(?) 왔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젊은이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러나 요사이 어느 교회이고 젊은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젊은이들이 자꾸만 줄어간다면 교회가 침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교회도 있다. 이는 메시지의 목마름 때문에 수평이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나려 할까? 젊은이라고 말씀에 갈급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과거의 스타일의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는 교장선생님의 훈화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성경을 소개해야 할까? 그것이 오늘 신학을 공부하는 분들의 숙제이다.
나는 그동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훌륭한 신학자들이 일생동안 연구했던 연구물들이, 그리고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일반 신도들에게까지 정확하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학문들이 학생들에게
전달되었을 텐데 교회 현장에서 성도들이 느끼는 것은 전과 별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사람에게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거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개인적인 차가 있게 마련이지만 성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든, 아니면 표현력이 부족했든 성도들이 성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은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성도들은 비록 아무리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 해도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성도들이 이해하는 성경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집의 구조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석가래도 알고 기둥도, 기왓장도 알고, 벽지 색깔도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집을 지으라고 하면 지을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는 일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역사에 대한 전망이 생긴다. 대체로 성도들에게는 이런 역사관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새로 나온 성도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봉사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올바른 성장일 것이다. 성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선의 봉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신앙의 성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엄청난 신앙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그의 가치관이 변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 중심적이던(엡 2:1-3) 삶과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바뀌어져 가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세계관(가치관)의 변화가 없다면 그는 진정한 성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단순한 성경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오늘 교회에서 성경 교육이 실패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성경 지식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교사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성경이 단순히 문제집의 빈칸을 채우는 해답집에 머문다면 거기에서 진정한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성경 교재가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전하는, 그리고 가르치는 자의 역량이 문제가 된다.
제일 좋은 성경 교재는 어떤 것일까? 제일 중요한 교재는 바로 성경이다. 성경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는 길만이 최선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 그 어떤 신학도, 신학사상도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보조수단이다. 어떤 신학자의 주장을 도와주고 합리화시키기 위해 성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성경을 통한 도전이 없었다면 다시 되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을 통한 희열을 맛보지 못했다면, 말씀을 연구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경험이 없었다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말씀에 대한 충격적인 경험이 없이 신학을 계속한다면 그 기간이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강단을 두드리고 소리를 쳐도 청중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성경을 전하는 자의 가슴이 뜨거워질 때 교인들의 가슴도 뜨거워진다. 교회의 질적 양적 성장은 성도를 인도하는 교역자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하다. 목회자의 변화가 곧 교회의 변화이다. 목회자의 말씀 연구에서 오는 열기가 성도에게 전달될 때 문제는 해결된다. 언제까지나 강단에서 자장가를 들려주려 하는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서적들”
공과 책과 설교집과 그리고 몇 가지 주석이 전부였던 60-70년대 보다는 지금은 얼마나 많은 신학서적들과 논문, 그리고 공부 교재들이 출간되어 나오는가. 이제는 어느 책을 골라 읽어야 할까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성도들의 학력 수준은 높아졌고 이들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이해시키고 건강한 신자가 되게 할 수 있을까 몸부림친다. 그들의 기호에 맞추어 서점가에는 소위 “How to”(즉, ~하는 비결) 종류의 책들이 차고 넘친다. 하도
많이 출간되어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성경에 재미를 느끼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마치 흙탕물이 되어 버린 호수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양동이로 물을 갖다 붓는 행위와 같다. 어떻게 흙탕물이 되어버
린 정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호수에 샘이 터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의 방
법을 동원하고 있지 아니한가!
“만약 신학생들이 보다 일찍 성경에 눈을 뜬다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때, 성장의 동력이 붙기 시작한다. 만약 신학생들이 보다 일찍 성경에 눈을 뜬다면 자신과 주변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게 분명하다. 이런 말씀에 대한 도전이 없다면 신학을 공부하는 기간이 유익한 기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주위에서 너무나 이런 일을 많이 보고 있다. 오직 성경 한 권만을 들고서 며칠 밤이라도 성경 전체의 내용과 신학과 사상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수준이 높아진 성도들, 그러나 여전히 구태의연한 전달 방법, 순종하지 않는다고 성도들을 닥달하는 사역자,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교회, 더욱 사악해져만 가는 사회, 그래도 우리는 잠만 자려는가? 얼마나 많은 신학교와 교수들과 신학생들이 있는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평신도의 눈에 그늘이 서려 있음은 어찜일까?
그동안 신학교를 다니면서, 신학교에 근무하면서 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성경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진 분은 극히 만나기 힘들었다. 그것이 뭐 그리 큰 문제일까?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결국 인간의 갖은 수단을 동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는 경우가 있지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해야 오는 부흥과는 거리가 멀다. 신자의 성숙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법대로 양육해야 한다. 신앙 연륜이 고집과 교만으로 커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원리에 기초한 일관성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 형성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성도의 인격이 계발(啓發)된
다. 그래야 성도는 강한 인격의 소유자가 된다.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주어야 분들이 앞으로 교역자가 될 여러분들이 아닌가! 자신도 비인격화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키울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인류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오랜 세월이 걸린 것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을 이해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야 원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 일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직도 나에게 성경의 도전이 없는가? 아직도 성경 속으로 빠져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문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에이, 그런 비유가 어딨어)" 많은 신학생들을 퇴출시켰을 것이다. 왜? 어정쩡한 추수꾼은 오히려 추수에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뒤에 추수해야 할 사람만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왜 신학을 공부하러 왔을까? 각기 다른 대답이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책임져야 할 목회자가 될 것이 아닌가?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되돌려져 내가 신학을 공부해야할 초년생이 되었다면 나는 어떤 자세로 공부를 할까,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내가 다시 젊은이가 되어 신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아직까지 서성이고 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니
누구나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삶이 주어진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성경의 눈을 떴을 때의 나이가 35세 정도였던 것 같다. 평신도였던 나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다. 만약 나이가 더 들어 성경의 재미를 느꼈다면 물론 오늘의 즐거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말씀 연구에 대한 행보는 느렸고, 또 어느 이상은 깊이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중요한 주제들은 요약 정리해 두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나이가 많이 들어, 생을 정리하는 시기가 되면 성도들에게 아주 유익한 성경 교재를 한권쯤 써 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너무 신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쉬어서 내용이 없는 그런 책 말고…. 왜냐하면 일반 성도가 성경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진입로 역할을 하는 교재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어려운 신학서적 아니면 너무 평범해서 성경의 맥을 잡을 수 없는 교재가 대부분이었다.
하나님은 나의 이런 막연한 생각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셨다. 나의 생에 고난이 닥친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나에게 평신도를 위한 성경교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셨고, 진통 끝에 책이 나왔다. 평신도가 겁도 없이…
▲ 성경에 미친 사람이 됩시다.
성경에 눈을 뜨는 순간 신학은 재미있어진다. 만약 성경에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신학수업은 어렵고 재미없어진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미쳐야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훨씬 탄력을 받게 된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경험한 바이다. 성경이 재미있다고 느껴진 순간부터 나의 삶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종교적 생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경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보통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끝없이 적용거리만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의 윤리 교과서가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사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몸부림(?)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대입식 적용보다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상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상이 나의 머리 속에 가득 차야 한다. 그 하나님 사상이 나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몰아내게 된다. 그것이 가치관의 변화이다. 그 가치관(세계관)의 변화가 곧 믿음의 성장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는 길이 바로 성경의 맥을 잡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인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활동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성경에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다루고 계신가를 보여준다.
자, 여러 소리 할 것 없고, 아직 성경의 맥이 잡히지 않는 학생들을 위하여 부팅(booting)용 교재를 소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어디로 진입하면 내가 성경의 맥을 잡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큰 주제가 무엇일까? 물론 성경의 통일된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다. 학자들의 주장도 다르다. 학자들은 성경의 큰 주제를 ‘ 언약' '약속'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주권' 등으로 이해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W.A. 밴게메렌의 '구원계시의 발전사'(성경읽기사), 서론을 읽어보도록 하자.
G. Vos라는 학자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마치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이 그 안에 발전하는 계시의 흐름이 있다고 했다. 、씨앗 ⇒ 싹 ⇒ 연한줄기 ⇒ 잎 ⇒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성경에는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發展)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렇게 발전해 가는 계시의 흐름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언약(言約)이라고 했다.
어쨌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80년대, 초반인지, 중반인지), 나는 언약 개념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성경 전체를 다룬 책들이 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평면도만을 그리고 있던 나에게 성경이 입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때에 아주 유용한 책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던 책들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교수님에게 소개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책들을 소개한다.
○ O. P. 로벗슨, 계약신학과 그리스도(기독교문서선교회) - 요약 정리 /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도움
○ 토마스 맥코미스키, 계악신학과 약속(기독교문서선교회) - 정독
○ 엘머 A.말텐스, 하나님의 계획(아가페문화사) - 정독
○ W. A. 구원계시의 발전사(성경읽기사) - 정독
○ 필립 E. 휴스(Hughes), 성경과 하나님의 경륜(여수룬) - 정독 및 정리
○ 그레엄 골즈워디, 김영철 역,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성서유니온) - 정독
○ W.J. 둠브렐, 언약과 창조(크리스챤서적) - 요약 정리 / 크게 도움 받음
○ 에드워드 뵐, 권호덕 역, 구약 속의 그리스도(그리심) - 정독
○ W. C. 카이저, 새롭게 본 구약(바실래)
○ G.V. 그로닝겐, 류호준 역, 구약의 메시야 사상(기독교문서선교회)
○ 체스터 레만, 성경신학[구약] / 신약신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G. E. 래드, 신성종 / 이한수 역, 신약신학(대한기독교서회) - 정독 및 일부 정리
○ H. 리델보스, 오광만 역, 하나님의 나라(엠마오) - 요약 정리 / 마태복음 공부에 엄청난 도움을 받음
○ H. 리델보스, 바울신학 - 정독 및 요약 정리 / 이 책의 앞 부분은 로마서를 이해하는 데 한 차원을 높여주었음
○ 요아킴 예레미아스, 신약신학(엠마오) - 정독
○ 윤영탁 역편, 구약신학논문집(시리즈) (합동신학교 출판부)
○ 김희보, 구약소선지서 주해(시리즈) (총신대학교출판부) - 편집과정에서 도움을 받음
위의 책들은 내가 성경의 맥을 잡아가는데 초기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밖에 많은 책들이 도움이 되었지만 생각나는 것들만 소개했다. 물론 지금은 성경신학 분야에 엄청난 책들이 번역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성경 본문의 연구 없이 이런 책들만 보아서는 크게 효과도 없고 그 중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성경공부팀을 인도하면서 이런 책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같은 책이라도 어떤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만약 이런 가벼운 책에만 눈을 돌린다면 언젠가 반드시 목회 현장에서 힘든 날이 올 것이다. 비록 힘들더라도 앞에서 소개한 무게 있는 신학서적들을 정독, 요약 정리, 그리고 나의 신학으로 만드는 과정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런 자기 살을 깎는 과정이 없다면 성경의 맥은 잡히지 않는다.
▲ 요약하는 습관을 갖자
대체로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은 나름대로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한다. 문제는 읽고 거기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모든 책들을 다 요약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주제를 정리하려면 가장 좋은 책을 두 세권 선정, 그것을 내 말로 바꾸어 교재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약 독서로만 끝난다면, 막상 그 분야가 필요해서 찾으려면 난감할 때가 많다. 물론 요즈음은 컴퓨터를 이용하면 손쉽게 자료를 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지식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파워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매우 힘이 들었지만 교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신학서적들이 동원되었고, 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교재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습관을 가졌다. 예를 들어, 리덜보스의 「하나님의 나라」, 「바울신학」, G. E. 래드의 「신약신학」, H.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 J. I. 팩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과 같은 책은 전권을 요약 정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중요한 주제들도 요약 정리하는 습관을 가졌다. 지금도 이 일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은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마치 학교에서 리포트를 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성경교재를 작성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다. 이는 성경에 눈을 뜬 초기 과정부터 요약하는 습관을 가진 덕택이기도 하다. 또 이런 요약 정리하는 습관은 훗날 신학서적들을 읽고 분석․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신학교에 다닐 때 성경 자체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다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막상 신학교를 졸업하면 성경을 연구할 시간은 거의 없어진다. 성경의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에 친숙해지는 일이다. 그래야지 졸업 후에도 연구는 계속된다. 이런 습관이 붙어 있지 않으면 목회 현장에서 설교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그때부터 급해지기 시작하고, 여기 저기 세미나에 참석하지만 이미 자기 신학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본인이 아니라 성도들이다. 성도들은 맛없는 꼴을 매일 먹어야 한다. 물론 이런 꼴을 먹는 양이 아름다운 털을 생산할 리 없다.
▲ 표현력을 기르자
똑같은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그 내용이 성도들에게 전달될 때는 엄청나게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성도들에게 큰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설교는 그 나팔소리가 분명치 못해서이다. 만약 나팔이 불분명하여 자라는 소린지, 전진하라는 소린지 구분할 수 없다면 문제가 커진다. 대체로 목회 현장에서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것은 실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전달력이 약해서 그렇다. 실력은 곧 표현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이 없다면 효과는 반감한다.
그 표현력은 성경 지식에 대한 저장 탱크는 물론이려니와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신학의 저장 탱크 역시 크면 클수록 유리하다. 따라서 끊임없는 성경 연구와 정치, 경제, 사회, 분화 분야 등에 대한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목회할 때 읽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독서 역시 습관이기 때문이다. 설교 전달 방법에 대해서 최근 읽은 홍인규 교수의 、바울과 설교(고전 1:17-2:5)、(「기독신학저널」, vol. 7. 2004, 11. 83-110면)라는 논문을 재미있게 읽어 보았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습관이 필요하다. 설교의 내용이 청중에게 잘 전달하지 않는 것은 이런 표현력의 부족 때문이다. 결론에서 이야기할 것을 앞에서 다 이야기 한다든가, 아니면 중복 설명이 계속된다든가 하는 것은 이런 훈련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어떤 주제를 정해놓고 나름대로 글을 써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만약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책을 요약할 때, 본인이 이해한 말로 바꾸어 정리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표현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장기전을 필요로 하는 학문
어떤 분야는 몇 달만 집중해서 연구하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러나 단기전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어학 분야이다. 성경 원어를 잘 모르고도 목회를 잘 하시는 분이 너무 많다. 지금은 원어를 분해, 설명한 좋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많다. 구태여 힘들여 원어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훗날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려면 위와 같은 질문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피땀 흘려 습득한 것이 아니려면 똑같은 지식이라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어느 교수님에게 어학은 매일 15분씩만 투자하면 박사가 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매일 15분씩을 투자하지 못해서, 나는 오늘도 원어 성경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만약 신학교에 다닐 때 이런 어학 능력을 충분히 습득한다면 훗날 목회 현장에서 분명히 노래 부를 일이 있을 것이다.
영어 신학원서를 볼 때, 신학용어에 익숙하기가 어렵다. 만약 원서를 구입하여 영어로 정리하는 습관을 갖는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아직 젊다면 말이다. 외국에서 공부하신 교수님의 공부했던 방법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
지금부터라도 영어로 일기를 써보는 것이 어떨까? 나는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필요성도 없어졌다. 앞으로 영어 원서를 많이 보게 될 터인데, 이런 훈련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이 시기를 놓친다면, 늘 한발짝 뒤에서 걸어가야 한다.
▲ 역사 그리고 철학에 대한 기초 공부
역사에 관한 통찰력을 가진 목회자를 만나보기가 힘들다. 성경의 맥을 잡는다는 일은 또 다른 면에서는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의 줄기를 통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성경의 맥을 잡는다는 것은 그런 역사의식이 생겨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 속의 큰 인물들은 다 이런 역사의식이 있던 인물들이다. 하나님이 진행시키시는 구원의 역사를 개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권 역사를 소홀히 여기지 않게 된다.
기독교 역사관에 관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김기홍 교수님의 「역사와 신앙」(두란노)이라는 책은 이런 면에서 처음 나에게 도전을 주었다. 물론 철학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좋다. 복음 전파는 성경의 사상과 불신 세계의 사상과 싸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런 기초 과정의 훈련은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여기에 충실할 때 이 세상이 요구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알기 위한 우리의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의 신학수업은 목사 되기 위한 과정이거나 목사 노릇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우리가 느끼는 세월의 속도
신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모든 문제들이 다 잘 될꺼야 하는 막연함 생각은 버리자. 세월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젊을 때에 바울 것이 있고, 늙어서 해도 좋을 일이 있다. 물리적 시간이야 같겠지만 나이마다 느끼는 시간은 다르다.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머지않아 후회하게 된다.
한국의 미래는 여러분의 손에 있다. 한국의 미래는 여러분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도전을 줄 때 여러분의 신학공부는 탄력을 받게 된다. 현장의 목회자는 지금 교수님 수준으로, 교수님은 세계 신학계의 거장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환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