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01-15 꽉 쥔 손을 펴게 하시는 벼랑 끝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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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에 기근이 더욱 심해져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지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가서 양식을 사 오라고 지시합니다(1-2절). 그러나 유다는 애굽의 총리가 "아우와 함께 오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엄히 경고했음을 상기시키며,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버팁니다(3-5절). 야곱은 "어찌하여 아우가 있다고 말하여 내게 괴로움을 당하게 하느냐"며 아들들을 원망하고, 아들들은 총리가 캐물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합니다(6-7절). 이에 유다가 나서서 자신이 베냐민을 위하여 '담보'가 되겠다고 맹세하며 아버지의 결단을 촉구합니다(8-10절). 결국 야곱은 현실을 수용하고, 가나안의 특산물(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살구)과 갑절의 돈, 그리고 베냐민을 내어주며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체념 섞인 항복의 기도를 올립니다. 형제들은 예물과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11-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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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야곱이 준비한 예물(유향, 꿀, 향품 등)은 가나안 땅의 값비싼 특산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는 권력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전형적인 외교적 조공이자 처세술이었습니다. 또한 9절에서 유다가 사용한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히브리어: 아라브, עָרַב)"라는 말은 상업적, 법적 용어로, 타인의 빚이나 생명에 대해 자신이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대속적(substitutionary) 선언입니다.
# 신학적·문학적 배경 : 이 본문은 야곱 가정의 주도권이 아버지 야곱에서 넷째 아들 유다에게로 넘어가는 중대한 분기점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동생 요셉을 은 20세겔에 팔아넘기자고 제안했던 주동자 유다가, 이제는 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관점 : 본문은 가족 전체가 굶어 죽어가는 위기 속에서도 오직 라헬의 소생인 베냐민의 안전에만 병적으로 집착하는 야곱의 이기심을 폭로합니다. 야곱에게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지키고 곡식을 구해올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수평적 읽기는 이러한 가부장의 끔찍한 편애와 자기 연민을 고발함과 동시에, 기근이라는 외부의 물리적 압박과 유다의 책임지는 리더십을 통해 마침내 야곱이 쥐고 있던 마지막 우상(베냐민)을 강제로 내려놓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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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기근의 압박과 평행선을 달리는 밥상 : 회피하는 가부장,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아들
하나님은 우리가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을 부수시기 위해, 우리의 모든 자원을 바닥내시는 기근을 통해 진실의 벼랑 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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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이 더욱 심해집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이 바닥납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가서 양식을 사 오라고 지시하지만, 유다는 애굽 총리가 엄히 경고했음을 상기시킵니다(히브리어: 아이다 헤이드, עֵד הֵעִד, '증인으로 세우다, 엄숙히 경고하다'). 베냐민 없이는 총리의 얼굴을 볼 수도 없다는 단호한 현실 앞에서, 야곱의 지시는 공중에 뜨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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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읽기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이 가정이 얼마나 지독한 환상과 회피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곡식이 바닥났다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닙니다. 열두 명의 대가족과 수많은 식솔들이 아사(餓死) 직전에 내몰렸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장막 안으로 성큼 들어선 이 위기의 순간에도, 야곱은 "양식을 조금 사 오라"는 말로 본질적인 문제를 덮으려 합니다.
야곱의 지시 속에는 베냐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려놓아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외면합니다.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은 야곱의 눈에 그저 곡식을 구해오는 도구일 뿐, 애굽 총리 앞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두려움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이 야곱이라는 가부장의 민낯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편애, 보살핌이 아니라 도구화.
그러나 하나님은 이 회피의 장막이 찢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기근이라는 냉혹한 물리적 현실이 야곱의 모든 우회로를 하나씩 막아버립니다. 유다의 입을 통해 선포된 총리의 경고, "아이다 헤이드", 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세계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준엄한 진실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처럼 기근이라는 거친 손으로 우리의 환상을 뿌리째 흔드십니다. 우리의 모든 자원이 바닥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집착해온 것의 실체를 직면하게 되는 은혜의 문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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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삶에도 야곱과 같은 회피가 숨어 있지 않습니까? 공동체가 메말라가고 있는데, 내가 꽉 쥐고 있는 기득권, 오래된 편애, 마음속 깊이 숨겨둔 나만의 베냐민을 차마 내려놓지 못해 근본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회피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도록, 삶의 곡식 창고를 비워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기근이 찾아왔을 때, 그것이 채찍인지 아니면 은혜의 벼랑 끝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내 마음의 회피를 내려놓고, 두려워도 진실 앞에 서는 용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벼랑 끝에서 생명의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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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절 야곱의 자기 연민과 유다의 대속적 리더십 : 남 탓하는 아버지, 담보가 되는 아들
하나님은 책임 회피와 자기 연민으로 병든 공동체를 회복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한 사람의 십자가적 헌신을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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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너희가 어찌하여 아우가 있다고 말하여 나를 괴롭게(히브리어: 라아, רָעַע, '해하다, 상처 입히다') 하였느냐"며 아들들을 탓합니다. 아들들은 총리가 가족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기에 사실대로 답했을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그때 유다가 나섭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히브리어: 아라브, עָרַב)가 되오리니, 내가 그를 아버지께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우리가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두 번 다녀왔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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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야곱의 극단적인 자기 연민과 유다의 대속적 희생이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가족이 굶어 죽어가는 마당에 야곱은 "어찌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라고 외칩니다.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깊은 상처와 손상을 뜻하는 강한 단어입니다. 야곱은 이 생사의 위기를 오직 자신이 받은 상처의 언어로만 번역합니다. 아들들의 두려움도, 공동체의 굶주림도, 그것이 얼마나 야곱 자신의 편애가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역기능 가부장의 전형입니다.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고 자신의 감정만을 절대화하는 자기 연민의 감옥.
이 교착 상태를 깨는 것은 유다입니다. 바로 전 장면(42:37)에서 장남 르우벤은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라며 자신의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야만적이고 무책임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은 흉내 낸 책임감이었습니다. 자신의 희생이 아니라 남의 희생으로 포장한 거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아라브(עָרַב)가 되겠습니다." 아라브는 고대 근동의 상업적, 법적 용어로 타인의 빚이나 생명에 대해 자신이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대속적 선언입니다. 남의 목숨이 아닌 자신의 목숨과 영원한 도덕적 책임을 담보물로 내놓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은 20세겔을 받고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에 앞장섰던 유다가, 이제는 동생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자본주의적 이기주의자가, 이제 십자가적 리더로 서 있습니다. 이 변화는 유다 안에서 일어난 무언가가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아마도 요셉이 구덩이에서 부르짖던 소리를 외면했던 그날의 기억(창 42:21)이,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회개의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평적으로 무너진 가정을 살려내는 힘은 권력자의 호통이 아니라, 내 몫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속적 헌신에 있음을 성경은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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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누구를 닮아 있습니까? 야곱처럼 "도대체 누가 이 상황을 만들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며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르우벤처럼 내 책임은 쏙 뺀 채 허세 가득한 종교적 언어만 울려 퍼지게 하는 사람입니까? 공동체를 살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유다처럼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희생양이 되어 이웃의 생명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불화 속에서, 교회의 갈등 속에서 핑계 대기를 멈추고 내가 그 짐을 지겠다는 거룩한 대속의 결단이 오늘 여러분의 삶 안에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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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절 섞인 항복과 "내가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 처세술과 체념이 뒤섞인 야곱의 뼈아픈 손 펴기
하나님은 얄팍한 처세술과 체념이 섞인 우리의 불완전한 항복조차도 긍휼히 받으시며,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잃을 각오로 손을 펼 때 비로소 생명의 문을 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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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마침내 뜻을 꺾습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인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살구를 예물로 준비하게 하고, 자루에 도로 넣어져 온 갑절의 돈을 챙겨 가라고 철저히 지시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내어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히브리어: 엘 샤다이, אֵל שַׁדַּי)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이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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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읽기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야곱의 지극히 현실적인 처세술과 마지못해 이루어진 처절한 항복이 뒤섞인 복잡한 내면이 드러납니다. 야곱이 준비한 아름다운 소산과 갑절의 돈을 보십시오. 이것은 수십 년 전 분노한 형 에서를 만나러 가던 길에 앞서 보냈던 뇌물 작전(창 32장)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권력자의 마음을 돈과 특산물로 녹여보려 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통제력과 세상의 방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야곱이 내뱉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אֲשַׁכַּל כַּאֲשֶׁר שָׁכַּלְתִּי, 아샤칼 카아쉐르 샤칼티)." 히브리어 원문에는 '자녀를 잃다, 사별하다'는 뜻의 동사 샤칼이 두 번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이미 요셉을 잃은 사람이, 이제 베냐민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을 언어가 감당하지 못해 같은 단어를 두 번 울부짖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언이 아닙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꽉 쥐고 있던 마지막 것을 놓아버리는, 수동적이고 숙명론적인 내려놓음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엘 샤다이. 이 이름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이름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족장들의 언약의 하나님입니다(창 17:1). 인간의 모든 계획이 바닥을 치는 그 자리에서, 야곱은 자기도 모르게 바른 이름을 부릅니다. 자신의 노력과 처세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베냐민의 생명을 보장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고백이 거기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불완전한 항복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기도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처세술과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꽉 쥐고 있던 베냐민을 놓는 그 처절한 상실의 순간에,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요셉도 찾게 하시고 온 가족을 기근에서 살려내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빈손을 기다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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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나의 인맥, 돈, 경험과 지혜라는 갑절의 돈과 꿀을 총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려 발버둥 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인간적 방법이 통하지 않는 한계 상황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 나만의 베냐민, 즉 자녀, 재산, 명예, 건강을 스스로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라며 눈물로 쥐고 있던 그것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뼈아픈 고백과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순간, 죽을 것 같던 절망은 도리어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통로로 변합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끝까지 버티며 움켜쥐고 있는 당신의 베냐민은 무엇입니까? 불완전한 체념일지라도 좋습니다. 오늘 십자가 앞에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잃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안에서 모든 것을 풍성히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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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가장 끔찍한 기근과 고통의 벼랑 끝에서,
기어이 우리의 꽉 쥔 손을 펴게 하시고
구원의 생명수를 흘려보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엘 샤다이.
오늘 죽어가는 가족의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우상인 베냐민만을 움켜쥐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던
야곱의 이기심과 자기 연민을 봅니다.
주님, 이 역기능 가부장의 흉한 민낯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세상을 원망하고,
내 자식과 내 기득권만을 보호하려다 도리어 공동체를 굶주림과 죽음으로 내몰았던
우리의 이기적이고 완악한 심령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옵소서.
주님, 과거에는 동생을 은전 20세겔에 팔아넘겼던 유다가
이제는 "내가 그를 위하여 영원한 담보가 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성숙한 리더로 변화된 것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대속적 책임감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핑계 대며 서로를 비난하는 입술을 닫고,
무너진 가정과 교회를 살리기 위해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희생양이 되는 거룩한 결단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는 여전히 내 지혜와 갑절의 돈, 세상의 예물을 의지하며
문제를 해결해 보려 발버둥 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눈물과 체념 속에서라도 "내가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며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베냐민을 주님의 주권 앞에 온전히 내어드리기를 원합니다.
나의 얄팍한 처세술을 꺾으시고, 내가 쥐고 있던 우상을 내려놓는 그 빈손 위에,
하늘의 생명과 진정한 회복의 샬롬을 가득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담보가 되시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참된 리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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