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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8:01-11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나는 나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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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별강화를 마무리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기도하시던 동산에 이르자, 유다는 군대와 종교지도자들의 아랫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이에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그들이 두려워 하자 이를 통해 제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베드로가 칼을 쓰는 것을 막으며 십자가의 길로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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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기드론은 ‘탁하다, 흐리다, 어두컴컴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여호사밧 골짜기’라고도 불렀습니다. 왕들이 우상들과 그 제단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곳을 지나 제자들과 함께 가끔(습관적으로) 모이시고 기도하시던 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곳은 유다도 잘 알고 있는 곳입니다. 유다는 로마 군대(200여명으로 추정)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를 잡으러 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지명과 사람과 도구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탁하고 어두운 우상의 골짜기인 기드론이 우선 그렇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를 나누시던 동산과 상반되는 지명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본질에서 벗어나 왜곡된 전통과,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며, 소외된 이들의 처지와 아픔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공적인 슬픔과 분노가 실종된 종교, 하나님을 말하지만 종교 중독 현상에 불과한 종교지도자들, 우상숭배와 다를바 없는 죽어버린 종교와 우상숭배로 뭇 영혼들이 고통당하는 암울한 현실 속에 함께아파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기도하며, 마침내 십자가의 길로 행하시는 주님,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시며, 뭇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사랑하며 살리기 위해 행하시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자주 모이시고 또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을 판 유다도 이곳을 잘 알기에 예수를 잡을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 제자들을 살리고 세우고 온전케 하는 섬김의 삶을 살아오신 주님과 달리 자신의 욕망과 이기를 따라,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요구를 이용하며 예수를 파는 유다도 대조적입니다. 제자들을 살리시는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을 팔아 죽음에 넘기는 유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대조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다가 데리고 온 군대와 아랫사람들은 그 숫적인 면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며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대적하는 어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멸망의 길은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길의 종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휩쓸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하시고 비무장 비폭력적 삶으로 일관해 오신 주님과 달리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온 이들 역시 대조적입니다. ‘등불’, ‘ 햇불’은 그 시기가 어둠의 때임을 보여주는 상징이고, ‘무기’는 불의한 세계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어둠에 살아가는 이들이 의지하는 것은 힘과 폭력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을지라도 한계가 있으며, 폭력으로는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진리의 말씀만이 사람도 세상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제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변함없이 사랑의 길로 행하시면서, 자신을 팔 자를 알고 있으면서도 겟세마네 동산을 피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넓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선한 길로 비폭력의 길로 행하시면서 사랑으로 폭력과 무력을 이기시는 길로 묵묵히 나아가십니다. 

우리 삶과 신앙의 조급함과 왜곡된 가치가 주님이 행하신 비폭력 저항과 자기 부인과 사랑의 힘을 불신하면서 세상과 같이 어둠에 거하는 자처럼 다수의 횡포와 폭력과 무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다시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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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무장한 그들을 통해 당할 일을 아시고도 누구를 찾는지 묻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 할때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하시며 유다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십니다. 그러자 갑자기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집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무장하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위협적인 모습 앞에서 예수님을 위축된 기색 없이 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고, 이제 보내신 뜻을 성취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에 당당히 그 길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나사렛 예수라는 비하와 폄하적인 이름을 들먹일 때에도 숨지 않고 정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내가 그니라”라고 하는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가 나다 라는 표현이지만 이 표현에는 중의적인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낸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신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곧 나다”(출애굽기 3:14). 세상의 어떤 서술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분,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시고, 그것들을 돌보고 지탱하시는 분의 이름이 바로 ‘나는 나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된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대답입니다. 

예수를 잡으려고 왔던 이들이 뒤로 물러나서 땅에 엎드러졌다는 표현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횃불과 무기로 부장한 군대 무리들이 비무장하고 볼품없는 작은 무리들의 수장인 예수님의 대답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 일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내가 그니라’라는 표현에 담긴 유대인들의 오랜 기억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쓰시고 민족의 창조자이시면서 두려움 가운데 그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분, 그래서 그 앞에 부정한 인간이 서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당당한 말씀 앞에 두려워하며 부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고백에 대한 무게가 내게는 어느정도 일까요? 모든 것을 다 용납하고 사랑하는 분으로 생각하다가 어느새 창조주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너무도 쉬운 분으로 전락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는 경외가 빠져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은 위세가 예수님에게 있었지만 세상처럼 그것을 휘두르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로 행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겸손히 관리해야 하는 것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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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절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제자들을 잃지 않도록 안전을 확보하십니다. 

엎드러진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 합니다. 이에 다시금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하시고, 이 위세를 제자들을 보호하는데 사용하시며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실상 표현은 용납하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보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무시하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사 새롭게 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십니다. 역설적인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청같은 명령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만 잡혀가시고 제자들은 잡히지 않고 떠납니다. 

선한목자는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 이리떼가 몰려올 때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여물지 않은 제자들을 지켜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부족한 제자들을 보호하고 지키시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제자들을 잃지 않도록 하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응하시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 성취하시기 위한 길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전한 위협과 문제와 고통과 두려움이 우리 삶에 즐비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위험으로 우리의 생명과 안전이 깨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고통과 아픔 속에서 그리고 상처난 가슴과 깨어진 관계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원수는 득세하고 있고, 우리의 안녕과 내일은 위태한 벼랑 끝에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의 안녕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도 힘과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궁핍과 위협과 문제와 아픔이 여전히 우리에게 엄습해 올지라도, 암울한 현실이 변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어둠이 아무리 깊을 지라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약속해 주셨으며, 내일일은 주님의 소관에 있고, 세상을 이기셨으며,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을 살아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오늘도 바라보며, 약속이 있는 계명,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통해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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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절 예수님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안전을 도모하시는 와중에 시몬 베드로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시면서 자신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셔야 한다고 담담히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 곧 예수님이 행하시고, 뜻하시고, 이루시려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무력과 폭력으로 만든 팍스로마가 주는 평화가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나라 방식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무력과 폭력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더 빠른 것 같고, 그래서 더 통쾌한 방식으로 욕망을 성취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더 강한자들의 에고를 강화해 줄 뿐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비폭력 저항의 길입니다. 예수의 싸움은 칼을 든 적들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쓴 잔’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의 싸움이요,  살기 위해 남을 해치려는 마음과의 싸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위한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면서 끝까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 길을 갈 수 있게 해달라도 간구하신 것입니다. 자기 부인 곧 죽어야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며 무력과 폭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무기는 폭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이 어려운 이유는 아직 자기 부인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뿌리깊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셨으며,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 앞에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랑의 힘을 믿으며, 주님이 가신 그 길로 행하기 원합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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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주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주님이 나의 주 이심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아직도 나를 부인하는 일이 부족하여

불쑥불쑥 세상의 방식과 폭력이 드러납니다. 

선하신 나의 목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정죄와 혐오와 폭력과 무력의 힘을 의지하는

무지몽매하고 믿음없는 나를 부인하고

온전히 주님이 가신 그길로 행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고백하며

탐욕도 성냄도 내려놓고

주님이 이루신 그 방식 그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의 보호와 승리를 믿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나를 부인하고, 마땅히 제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길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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