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30 20:34

교과서 단상

조회 수 46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50424 - 교과서 단상


늦은 밤 서재에서 한참을 책과 씨름하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가려고 거실에 갔는데 웬일인지 고1 딸네미가 거실 탁자에 공부하는 책을 그대로 펼쳐두고 들어 갔다. 학교에서 하는 야자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딴에는 집에서 하겠다는 약속을 나름 지켜보겠다고 애쓰는 모양새다. 밤 늦게까지 불이 켜 있을 때가 많고 퀭한 눈과 푸석거린 얼굴을 볼 때면 어느새 커버린 딸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었다. 이모가 도와주는 수학공부하고 친구랑 다니는 영어학원 외에는 다른 과외를 더 보내 줄 수도 없고,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오래전부터 그렇게 말해 오며 아이들에게 성적에 대한 부담을 주진 않았으나 스스로 학교의 경쟁에서 부담을 안고 오는 모양이다.


물을 한 잔 마시고 그냥 오려다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펼쳐 두고 간 책을 살펴봤다.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고 군데군데 동그라미 네모로 여러 번 덧칠해 둔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를 보니 과학 책이다. 듣도 보도 못했던 생소한 전문 용어들이 많아 서너 줄을 읽어가는데도 모르는 말들도 많고 아예 문장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 여느 논문이나 책처럼 각주나 미주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말과 논리들을 다 이해할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일일이 다 설명해 주겠지 했는데 책의 분량을 보니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걸 다 제대로 소화하도록 교수 하기에는 아마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책 옆에 ‘물리I’이라는 큼지막한 책이 또 있다. 그 책은 더 복잡하다.


이번엔 아예 첫 부분 목차를 훑어 보았다.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생명의 기원과 여타 기초적인 과학의 상식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아찔하다. 인류 역사를 공부하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은 분량일 터인데 기본적인 측정 방법이나 연구 방법들에 대한 이해와 공식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예상했던 범위를 훌쩍 넘어 과히 상당한 분량을 공부한다. 책상 한 켠에 있는 다른 교과서들이 보였다. 국어, 기술가정, 그리고 영어, 수학까지 대체 몇 과목이나 되는거지? 우리 때도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에는 수학책을 한번 보다가 기겁을 하며 벌써 까마득해진 함수와 방정식과 여러 공식들이 빼곡히 나열된 문제들을 보았었다. 어떻게 이걸 다 공부할까? 하면서도 한편으로 참 대견하기도 했다. 고등학생들의 사고와 지식 수준이 이런 것들을 제대로 이수한다면 상당하겠다는 마음도 들면서도 짧은 시간에 그것을 다 소화하기 위해 수 일 동안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혹사되는 현실에 씁쓸한 마음이 든다.


현대 문명이 발달이 되어갈수록 아이들이 배워야 할 지식은 자꾸 더 늘어만 갈 것이다. 하기야 갈수록 복잡 다단한 사회가 되어 가다 보니 그런 세상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배워야 할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러다 문득 이렇게 일반 지식을 배워가는 일만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터인데 그 가운데서 형성되어야 할 인격과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배우는 공동체와 사회생활까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과연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더 앞선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과목들을 최소한으로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하나 배우고 가르쳐야 할 것들을 정하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할 것 같은 생각에 어쩌면 너무도 많은 것을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맘이 불현듯 스친다. 결국 이도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지식적으로 배우다가 어느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의 특기 적성을 일찍 찾은 이들에게는 어쩌면 그러한 것들을 계발하기보다는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 일로 정작 자신의 특기를 제대로 연마할 기회를 놓치거나 퇴보해 버릴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이 교육에 대해 백년지대계로 책임지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수시로 공교육의 방향과 커리가 바뀌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 거기다가 우린 신앙교육까지 더해져 있다. 가정교육 분야와 학교교육이 담당할 분야들에 대해서 국가는 의무교육에 대한 커리큘럼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을 터이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과 책임은 결국 고스란히 부모와 학생 개인에게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어떤  부모들은 공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스스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교육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듯 하다. 조금만 들여다 보면 사실 신뢰가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공교육의 한계와 실제 가정에서 갖는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한계들을 조금이라도 계산해보면 지금 우리 아이들이 한 사람의 건강한 사회인과 성인으로 자라가는 일이 기적같다. 자녀들을 잘 양육해 가는 일보다 소중하고 우선되는 일은 없을 터인데 우린 무엇을 위해서 왜 이렇게 분주하게 살며 가장 소중한 것을 소홀히 여기다 떠나고 난 뒤에야 깨닫는지... 딸아이 교과서 빈칸에 즐겁게 그러나 쉬엄쉬엄 공부하라고 메모를 남겨두고 서재로 왔다. 기적같이 그렇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내일은 한번 안아줘야겠다.


웃는사람 라종렬

광양시민신문 쉴만한물가 기고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5 회복을 위한 단상 웃는사람 2015.02.06 430
44 ‘칠소회’(七笑會) 웃는사람 2015.02.06 480
43 부화뇌동(附和雷同) 웃는사람 2015.02.06 490
42 우왕(愚王)과 우민(愚民) 웃는사람 2015.02.06 502
41 인재등용 1 웃는사람 2015.02.06 438
40 세금과 혁명 웃는사람 2015.02.07 537
39 명절과 역사교육 웃는사람 2015.02.15 591
38 고통의 문제 웃는사람 2015.03.14 551
37 산감과 연습림 웃는사람 2015.03.14 544
36 춘(春) 삼월 꽃이 피면 웃는사람 2015.03.14 615
35 개념 찾기 웃는사람 2015.03.22 469
34 진상(進上) 갑돌이? 웃는사람 2015.03.28 710
33 꽃잎처럼 뿌려진 웃는사람 2015.04.04 519
32 사실(事實)과 진실(眞實) 그리고 진리(眞理) 웃는사람 2015.04.11 461
31 죄와 벌 웃는사람 2015.04.18 472
» 교과서 단상 웃는사람 2015.04.30 469
29 이 웃픈 현실에 고함 웃는사람 2015.05.02 515
28 하얀 수건 웃는사람 2015.05.11 545
27 집단의 광기 웃는사람 2015.05.16 483
26 오월의 시(詩) 웃는사람 2015.05.23 746
Board Pagination Prev 1 2 ... 3 Next
/ 3
XE Login